박문성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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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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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일) 21:15 판
박서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boxer에 대해서는 복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박문성(朴文成, 생몰년 미상)은 고려 후기의 무신으로, 초명은 박서(朴犀),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초명인 박서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생애
호부상서(戶部尙書) 박인석(朴仁碩)의 7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1]
1231년(고려 고종 18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에 임명되었으며, 이 해 살리타(撒禮塔)가 거느린 몽골군이 철주(鐵州)를 거쳐 구주(龜州, 오늘날의 평북 구성시) 성을 공격하자, 김중온(金仲溫)·김경손(金慶孫)과 함께 누차(樓車)·대포차(大砲車)·운제(雲悌) 등으로 공격해 오는 몽골군과 한 달 동안이나 격전하여 마침내 물리쳤다.
이에 몽골군은 서경을 먼저 함락시키고, 고려와 강화를 맺으니, 조정에서도 몽골의 압력으로 귀주성의 장수들을 항복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이듬해 조정의 설득이 계속되자 왕명을 어기기 어려워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뒤에 몽골의 사신이 와서 박서를 죽이려고 했는데, 당시 무신 집권자 최우(崔瑀)가 박서에게 잘 처신하라고 충고했고, 박서는 고향으로 돌아갔다.[2]
이 무렵 박문성(朴文成)으로 개명했으며, 1234년(고종 21) 우산기상시(右散騎尙侍)에 임명되어 관직에 복귀했다.
1236년(고종 23)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승진했다가[3],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으며[2] 이후 고성(철성)박씨,음성박씨 시조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