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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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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성(史樂成, ? ~ 기원전 72년)은 전한 후기의 관료이다. 성씨는 (使)·(便)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천쯔(陈直)는 '𫢓[1]賢之印'이라고 적힌 한대의 인장이 발굴됨을 근거로 하여 사악성의 성씨는 본래 𫢓이며, 史는 𫢓의 간략한 표기, 使는 후대에 고쳐진 표기, 便은 使의 오기(誤記)라고 주장하였다.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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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었으나, 대장군 곽광의 총애를 받아 출세하여 구경에 이르렀다.[2]

원평 원년(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누가 뒤를 이을지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대신들 중에는 광릉여왕을 지지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은 곽광은 창읍왕으로 낙점하고 소부 겸 행대홍려사(行大鴻臚事) 사악성 등을 시켜 창읍왕을 모셔왔다.

그러나 창읍왕은 얼마 안 가 폐위되었고, 뒤를 이어 선제가 즉위하였다. 사악성은 조충국·전연년과 함께 공적이 전한의 옛 전객 유갈에 비견되어 원씨(爰氏侯)에 봉해졌고,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이라 하였고, 아들 사보가 작위를 이었다.

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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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고, 《한서
    • 권8 선제기
    • 권18 외척은택후표
    • 권19하 백관공경표 下
    • 권60 두주전
    • 권68 곽광김일제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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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亻+史. 음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2. 반고,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
전임
채의
전한소부
기원전 75년 ~ 기원전 72년
후임
후창
전임
위현
전한대홍려 (대행)
(기원전 74년 당시)
후임
위현
선대
(첫 봉건)
전한의 원씨후
기원전 73년 8월 신미일 ~ 기원전 72년
후대
아들 원씨강후 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