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티나 트러블스

Cortina Troubles
코르티나 트러블스
Emory-Brownsville.jpg
날짜1859 – 1860, 1861
위치
결과 미국의연합국의 승리
호전성
United States 미국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남부 연방
멕시코
멕시코 코르티니스타 민병대
지휘관과 지도자
미국 사무엘 하인첼만 소령
미국 스톤맨 캡틴
미국 캡틴 토빈
미국 연방 존 포드 대령
미국 연방 산토스 베나비데스 대령
Mexico 후안 코르티나
미국 육군
남부 연합군
텍사스 레인저스
브라운스빌 타이거스
마타모로스 민병대
정확히 알 수 없음
사상자 및 손실
31명 사망 및 부상자[1] 216명 사망[2]

The Cortina Troubles is the generic name for the First Cortina War, from 1859 to 1860, and the Second Cortina War, in 1861, in which paramilitary forces, led by the Mexican rancher and local leader Juan Nepomuceno Cortina, confronted elements of the United States Army, the Confederate States Army, the Texas Rangers, and the local militias of Browns텍사스 빌과 타마울리파스 마타모로스.

작가 로버트 엘먼에 따르면 후안 코르티나와 그의 추종자들은 후세의 가르지스타족이나 빌리스타족과 비슷한 최초의 "사회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국경 도적"이었다. 이 전투는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제 국경을 가로지르는 리오 그란데 밸리 지역에서 벌어졌다.[3][4]

트러블

제1차 코르티나 전쟁

제1차 코르티나 전쟁은 1859년 7월 13일 브라운스빌에서 시작되었는데, 코르티나가 코르티나의 전 직원인 토마스 카브레라를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마을 보안관 로버트 시어스의 팔에 총을 쐈다. 코르티나와 브라운스빌 당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9월 28일 그는 40에서 80명 사이의 남성으로 마을을 급습하여 점령했다. 그러나 그의 적들은 도망쳤다. 브라운스빌 점령 기간 중 코르티나는 '속담 22장 24절'의 말을 인용, 두 공동체에 자신의 의도를 밝히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 두려움은 필요 없다. 질서정연한 사람들과 정직한 시민들은 그들의 개인과 이익에 있어서 우리에게 불가침이다. 여러분이 보셨듯이 우리의 목적은 지금까지 처벌받지 않고 지켜온 적들의 악행을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묵인해 왔고, 말하자면 형식적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우리를 박해하고 강탈하기 위한, 그리고 멕시코 출신이라는 것 외에 다른 범죄는 없다는 이유로, 그들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그 선물들을 우리를 고려해서. (...) 멕시코인! 평화를 빕니다! 텍사스 주의 선량한 주민 여러분, 그들을 형제처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열정적인 사람의 친구가 되지 말며, 미친 사람에게도 동참하지 말며, 그가 하는 일을 배우고, 영혼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라."

[필요하다]

코르티나는 1859년 9월 30일까지 브라운스빌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다가 마타모로스의 영향력 있는 주민들의 권유로 마을을 탈출했다. 그 다음 날 브라운스빌의 마을 사람들은 "브라우스빌 타이거스"라고 불리는 코르티나와 싸우기 위해 20인조 그룹을 형성했다. 11월에 브라운스빌 타이거즈는 코르티나가 브라운스빌에서 서쪽으로 5마일 떨어진 란초카르멘이라고 불리는 그의 어머니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공격을 개시했고, 다만 그들이 부르는 대로 "코르티니스타"들에 의해 혼란에 빠져 퇴각할 뿐이었다.[citation needed]

같은 달 말 브라운스빌 타이거즈에는 텍사스 레인저스 그룹이 합류했고, 코르티나는 이들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공세는 성공하지 못했다. 12월에, 존 "립" 포드가 이끄는 두 번째 경비대가 도착했는데, 더 크고 더 잘 조직되었다. 브라운스빌 주민들의 호소로 미 육군은 샌안토니오에서 몇 년 전 버려졌던 인근 포트 브라운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이 요새의 새로운 사령관인 사무엘 하인첼소령은 코르티나 위협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모든 무장 단체를 통합하고 조정했다.

코르티나는 리오 그란데를 후퇴시켰고, 1859년 12월 27일, 헤인첼만과 포드는 리오 그란데시티 전투에서 그와 약혼했다. 코르티나의 병력은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60명의 병력과 모든 장비를 잃었다. 며칠 후 다시 포드에 쫓기고 패배한 코르티나는 부하들과 함께 부르고스 산맥으로 후퇴했다. 제1차 코르티나 전쟁은 대부분 끝났고, 미국과 멕시코 정부 양쪽으로부터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압력이 증가하면서 코르티나는 1년 이상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전쟁의 마지막 임무는 1860년 2월 4일 라 볼사 전투와 3월 17일 라 메사 전투였다. 포드 휘하의 텍사스 레인저스는 첫 약혼에서 성공적으로 강선을 방어했고 타마울리파스의 라 메사에서 코르티니스타를 강 건너편으로 격파했다.[5]

리오그란데 시의 텍사스 역사 표식기
히달고-카메론 군선 리오 그란데를 따라 281번 고속도로의 텍사스 역사 표지판

제2차 코르티나 전쟁

1861년 5월에 훨씬 짧은 제2차 코르티나 전쟁이 일어났다. 미국 남북전쟁이 막 시작되었고, 미국 연방정부와 제휴한 코르티나는 텍사스 사파타 카운티를 침공했다. 카리조 전투에서 산토스 베나비데스 남군 대위에게 패배하고 18명의 병사를 잃은 코르티나는 멕시코로 후퇴했다. 코르티나는 이후 몇 년 동안 이 지역의 부유한 텍사스 지주들을 상대로 게릴라 행동을 조장했다는 비난을 여러 차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미국 내에서 대규모의 군사 침입을 감행하지 않았다.[citation needed]

연대기

  • The First Cortina War begins on July 13, 1859, when Brownsville town marshal Robert Shears was shot in the arm by Juan Nepomuceno Cortina for brutalizing his former ranch hand, Tomás Cabrera (who was said to be drunk and causing a scene in Gabriel Catchell's coffee shop), and after ignoring Cortina's request to let him handle the situation. 코르티나는 이 지역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인물 중 하나가 되어 1875년 그가 체포될 때까지 지역 사건에서 결정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였다.[citation needed]
  • 1859년 9월 28일, 후안 코르티나는 브라운스빌에서 적들을 죽일 목적으로 40에서 80명의 남성들과 함께 브라운스빌을 급습하여 장악했다. 그의 적들은 잠적했고 코르티나와 그의 부하들은 멕시코 민족인 텍사스인들에 대한 법적 학대에 연루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 사람들 중 5명을 사살했다. 브라운스빌의 나머지 인구나 그들의 재산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은 코르티나의 명령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코르티나는 브라운스빌의 미국 인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멕시코 주민들의 개인과 재산에 대한 존중을 요청하면서 유명한 선언문을 발표한다.[citation needed]
  • 1859년 9월 30일 코르티나는 호세 마리아 헤수스 카르바잘, 미겔 티제리나 대령, 마타모로스 출신의 마케도니오 카피스트란 대령, 돈 아가피토 롱고리아, 돈 마누엘 트레비뇨의 재촉으로 브라운스빌을 피난시킨다.[6] 다음 날 브라운스빌은 자신을 '브라우스빌 타이거스'라고 부르며 코르티나와 싸우기 위해 20인조 그룹을 형성한다. 멕시코 당국은 미국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마타모로스 민병대에 합류할 것을 지시한다. 아돌푸스 글래브케가 이끄는 이 그룹은 토마스 카브레라를 사로잡는다.[citation needed]
  • 1859년 11월 브라운스빌 타이거즈는 코르티나가 현재 브라운스빌에서 서쪽으로 5마일 떨어진 텍사스 산타 리타 근처의 그의 어머니 목장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타이거스는 코르티나의 군대에 의해 혼란스럽게 퇴각하기 위해 공격한다.[citation needed]
  • 같은 달 말 브라운스빌 타이거즈에는 텍사스 레인저스 그룹이 합류했다. 코르티나는 브라운스빌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며 카브레라의 석방을 요구했다. 타이거즈는 그 달 초에 카브레라를 교수형에 처했고 바로 다음날 코르티니스타스는 성공하지 못한 공격을 감행했다.[citation needed]
  • 1859년 11월 23일, 코르티나는 텍사스 주지사휴스턴에게 텍사스에 있는 멕시코 주민들의 법적 이익을 옹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두 번째 포고문을 발표했다.[citation needed]
  • 1859년 12월, 존 "립" 포드가 이끄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두 번째 그룹과 사무엘 하인첼만 소령이 지휘하는 미 육군의 연대가 브라운스빌 타이거즈에 합류했다. 코르티나는 리오 그란데로 후퇴한다.[citation needed]
  • 1859년 12월 27일, 헤인첼만과 포드는 리오 그란데시티 전투에서 코르티나와 약혼했다. 코르티나는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60명의 병사와 장비를 잃었다.[citation needed]
  • 1860년 2월 4일, 라 볼사 전투에서 존 "립" 포드와 한 무리의 경비대원들이 코르티나의 부하들을 상대로 강선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citation needed]
  • 1860년 3월 17일, 존 "립" 포드는 타마울리파스의 메사에서 코르티니스타를 격파했다. 제1차 코르티나 전쟁은 끝난다.[citation needed]
  • 제2차 코르티나 전쟁은 1861년 5월에 일어났다. 코르티나는 사파타 군을 침공하여 군좌인 사파타를 공격했다. 그는 카리조 전투에서 남부연합군 대위 산토스 베나비데스에게 패배하고, 18명의 병사를 잃고 멕시코로 후퇴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적어도 245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코르티니스타였다.[citation needed]
  • 1870년대, 미래의 멕시코 대통령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국경을 넘어 소떼를 바스락거리는 것을 핑계로 후안 코르티나를 제거하기 위해 브라운스빌 시민들로부터 거액의 금전적 기부금을 받았다. 1875년 7월, 코르티나는 체포되어 멕시코 시티로 끌려가 그곳에서 1894년 사망할 때까지 머물게 된다.[citation needed]

대중문화에서

멕시코 작가 카르멘 불로사는 2013년 제1차 코르티나 전쟁에 대한 가상화된 이야기를 담은 소설 텍사스를 출간했다. 이 소설은 2014년 사만다 슈니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7]

갤러리

참고 항목

참조

  1. ^ 엘먼, 페이지 189-190
  2. ^ 엘먼, 페이지 189-190
  3. ^ 엘먼, 페이지 189-190
  4. ^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3-12-15. Retrieved 2012-04-10.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5. ^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3-12-15. Retrieved 2012-04-10.CS1 maint: 제목으로 보관된 복사본(링크)
  6. ^ Chance, Joseph E (2006). Jose Maria de Jesus Carvajal: The Life and Times of a Mexican Revolutionary. Trinity University Press. pp. 169, 170. ISBN 978-1-59534-020-7.
  7. ^ https://store.deepvellum.org/products/texas-the-great-theft. 누락 또는 비어 있음 title=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