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구
Kim Duk-koo김덕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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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 | |
닉네임 | "기대"(영어:기대) |
무게 | 중량 부족 |
국적 | 대한민국 |
태어난 | 이덕구 1955년[1] 7월 29일 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 |
죽은 | 1982년 11월 18일 미국 네바다 [1]주 파라다이스 | (27세)
스탠스 | 남포 |
권투 기록 | |
총싸움 | 20 |
이김. | 17 |
KO로 승리 | 8 |
손실 | 2 |
그리다 | 1 |
경연대회 금지 | 0 |
김덕구 | |
한글 | 김득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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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得九 |
수정 로마자 표기법 | 김득구 |
매쿠네-라이샤워 | 김택구 |
김덕구[a](金德九[b], 1955년 7월 29일 ~ 1982년 11월 18일)는 레이 만치니와의 세계선수권 복싱 경기에서 싸우다 사망한 대한민국의 복서였다. 그의 죽음은 챔피언 결정전의 수를 15개에서 12개로 줄이는 것을 포함하여 파이터들의 건강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한 개혁을 촉발시켰다.
조기생활과 교육
김씨는 서울에서 동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한국의 강원도에서 5명의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세 번 더 결혼하셨다. 김씨는 가난하게 자랐다.[2] 그는 1976년 복싱에 입문하기 전 구두닦이 소년과 관광가이드와 같은 이상한 일을 했다.
직업 경력
아마추어 기록을 29 대 4로 편찬한 뒤 1978년 프로로 전향했다. 1982년 2월 동양·태평양 권투 연맹 라이트급 타이틀을 획득하여 세계 권투 협회의 1위 경쟁자가 되었다.[1] 김연아는 17 대 1 대 1의 프로 기록을 가지고 맨시니와의 경기에서[3] 세계 라이트급 챔피언인 맨시니에게 세계 1위 도전자로서 라스베가스로 가기 전에 KO로부터 8번의 바우트를 따냈다. 하지만 그는 이전에 필리핀에서 한국 밖에서 단 한 번 싸운 적이 있다. 그가 북미에서 싸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4]
만치니 매치
김병현은 미국 복싱계에서는 가볍게 여겼지만 이 싸움이 '전쟁'[1]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레이 맨시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5] 김태균은 경기 전 며칠 동안 몸무게를 줄이려고 애썼다. 그래서 그는 135파운드의 경량 한계치에서 체중을 감량할 수 있었다. 김씨는 싸움에 앞서 "그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 [1]둘 중 하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시합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자신의 라스베이거스 호텔 램프쉐이드에 '살아 있느냐 죽느냐'는 메시지를 적었다(잘못 번역한 것이 언론에 '죽느냐 죽느냐'는 보도가 나왔다).[1]
맨시니와 킴은 1982년 11월 13일(애런 프라이어가 알렉시스 아겔로를 물리친 다음날 밤) 시저스 팰리스 외곽의 한 경기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맨시니가 잠시 그만둘 것을 고려할 정도로 그 시합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 팽팽하게 맞섰다.[5] 김씨는 만시니의 왼쪽 귀를 찢고 왼쪽 눈을 부풀렸고, 만시니의 왼손은 보통 크기의 두 배로 부풀었다.[3] 싸움이 끝나면 만시니의 왼쪽 눈이 완전히 감겨 버리곤 했다.[1] 그러나 후반전이 되자 맨시니가 김 감독보다 훨씬 많은 펀치를 날리며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11번 홀에서 그는 김 선수의 무릎을 비틀었다.[1] 맨시니는 13라운드 초반 39개의 펀치를 날리며 김병현을 몰아붙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슈가 레이 레너드(이 싸움의 해설자 중 한 명으로 활동)는 김씨가 아주 강하게 돌아왔다고 말했다. 레너드는 나중에 이 라운드를 접전이라고 선언했다.[6] 14라운드를 위해 파이터들이 나오자 맨시니가 앞으로 돌진하며 김시니를 우중충한 뒤 우중충한 우중충으로 때렸다. 킴이 뒤로 비틀거리고, 만치니가 왼손으로 빗나가자, 만치니가 또 다른 단단한 오른손으로 킴을 때렸다. 김씨는 머리가 캔버스에 부딪히며 로프 속으로 날아갔다. 김병현은 겨우 일어서는데 성공했지만 심판 리처드 그린이 싸움을 말렸고 맨시니는 14라운드 19초 만에 TKO에 의해 우승자로 선언됐다.[3]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소속의 랄프 와일리는 김연아가 죽을 때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신체적인 위업 중 하나"[1]라고 자신을 채찍질했던 것을 나중에 기억하곤 했다.
싸움이 끝난 지 몇 분 뒤 김씨는 혼수상태로 쓰러져 들것에 실려 시저스 팰리스 경기장에서 쫓겨나 사막 스프링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병원에서 그는 두개골에 100세제곱센티미터의 혈액이 들어있는 경막하혈종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 그를 구하기 위해 병원에서 응급 뇌수술을 받았으나 김씨는 11월 18일 투병 5일 만에 숨졌다. 신경외과 의사는 한 번의 펀치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3] 그 다음 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반지의 비극'이라는 제목 아래 표지에 그 싸움의 사진을 게재했다.[7] 이 사건은 미국 CBS가 생방송으로 중계한 싸움으로 인해 더욱 부각되었다.
김연아는 한 번도 15라운드 경기를 치른 적이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만시니는 훨씬 경험이 많았다. 그는 15라운드에서 3번 싸운 적이 있고, 이전에 한 번 14라운드에 나간 적이 있다. 김병현은 17승 2패 1무의 기록을 세웠다. 김연아의 우승 중 8개는 녹아웃이었다.
김씨 사망 후폭풍
이 글은 검증을 위해 인용구가 추가로 필요하다. – · · 책 · (1919년 11월) (이 템플릿 |
만시니는 김씨의 죽음에 대해 자책하는 등 성찰의 시기를 거쳤다. 친구들이 그저 사고일 뿐이라고 말해 그를 도운 후, 만치니는 여전히 김씨의 죽음에 시달리면서도 그의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발기인 밥 아룸은 김씨의 사망 이후 만시니가 "전혀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2년 후, 맨시니는 리빙스톤 브램블에게 타이틀을 빼앗겼다.[8]
치명적인 싸움이 있은 지 4주 후, 마이크 위버 vs. 같은 시저스 팰리스 공연장에서 벌어진 마이클 도크스와의 싸움은 63초 만에 종료됐다. 조이 커티스 심판은 맨시니-킴의 싸움에 비춰 심판들이 파이터의 건강을 의식하도록 한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싸움을 일찍 중단한 사실을 인정했고, 재시합 명령이 내려졌다.[citation needed]
김씨의 어머니는 생명유지장비가 꺼지기 전 아들과 함께 있기 위해 한국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날아갔다. 3개월 후, 그녀는 농약 한 병을 마시고 자살했다.[2] 시합 심판 리처드 그린은 1983년 7월 1일 자해 총상을 입고 자살했다.[9]
김연아는 한국 복싱선수들이 여자친구를 갖는 것에 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약혼녀 이영미를 남겼다.[1] 김 씨가 사망할 당시 이 씨는 1983년 7월 태어난 아들 김치완 씨를 임신 중이었다. 김치완은 치과의사가 되었다.[2] 2011년, 김치완과 그의 어머니는 "좋은 아들"이라고 불리는 만치니의 삶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일환으로 레이 만치니와 만남을 가졌다.[1][10]
대중문화에서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밴드 선길문의 첫 번째 앨범인 Great Highway의 Ghosts는 복서들의 이름을 딴 3개의 트랙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맨시니 싸움을 언급한 김덕구에 대한 노래가 포함되어 있다; Sports Illustrated는 이 노래를 스포츠에 관한 최고의 노래 목록에 포함시켰다.[11]
권투 규칙 변경
네바다 주 체육위원회는 12월 10일 마이클 도크스와 마이크 위버의 경기 전에 일련의 규칙 변경을 제안했는데, 이 경기 자체는 관계자들이 경기 전에 통보받은 내용 때문에 논란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라운드 간 휴식 시간은 처음에 60초에서 90초로 제안되었지만, 나중에 다시 압축되었다. 스탠딩 8카운트(복싱 선수가 쓰러지지 않더라도 녹다운을 부를 수 있지만 쓰러질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가 부과됐고, 면허정지 관련 새로운 규정(녹아웃 손실 후 45일)이 부과됐다.[12]
싸움의 제재기구가 아니었던 세계복싱위원회(WBC)는 1982년 연례대회 때 싸움 전 투사들의 의료에 관한 많은 규정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WBC가 타이틀 싸움을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줄인 것이다. 1987년 WBC에 이어 세계복싱협회(WBA)와 국제복싱연맹(IBF)이 뒤를 이었다. 1988년 세계복싱기구(WBO)가 결성되자 곧바로 12라운드 세계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8]
김씨 사망 후 몇 년 사이 투사의 전전 검진에는 심전도 검사 뇌검사 폐검사 등 새로운 의료절차가 도입됐다. 한 권투 지도자의 말처럼 싸움 전 투사의 검진은 1982년 이전 혈압과 심장박동 점검으로 이뤄지곤 했다. 이젠 아니야."[13]
프로 복싱 기록
미디어
챔피언은 유오성이 연기한 김덕구의 삶과 경력을 다룬 2002년 대한민국의 영화다.[15]
참고 항목
- 탠 키(Tan Teng Ki, 1935년 사망)는 싱가포르 밖에서 복싱 사상 초기의 하나로 보고되었다.
- 베니 파레트(1937~1962) 쿠바 권투선수는 에밀 그리피스에게 패한 링에서 살아남아 사망했다.
- 링에서 부상을 당해 사망한 것으로 유명한 또 다른 복서 데이비 무어(1933–1963)
- 마지막 싸움에서 이기고 세상을 떠난 전 세계 챔피언 최요삼(1972~2008)
- 웨일스 복서 조니 오웬(1956~1980)은 루페 핀토르와의 WBC 월드 밴텀급 타이틀전 12라운드에서 탈락한 뒤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 복싱의 부상으로 인한 사망자 목록
참조
- ^ a b c d e f g h i j k l Kriegel, Mark (September 16, 2012), "A Step Back", The New York Times
- ^ a b c Shapiro, Michael (April 27, 1987). "Remembering Duk Koo Kim". Sports Illustrated. Retrieved November 14, 2019.
- ^ a b c d 1982년 11월 22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랄프 와일리 "그때 모든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다"
- ^ "Donaire vs. Nishioka Photos: Nonioto Donaire LA arrival - Boxing News". Eastsideboxing.com. October 9, 2012. Retrieved September 24, 2016.
- ^ a b "Archived copy".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January 5, 2015. Retrieved December 21, 2014.
{{cite web}}
: CS1 maint: 타이틀로 보관된 사본(링크) - ^ YouTube
- ^ "Duk Koo Kim, Boxing, - 11.22.82 - SI Vaul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6 July 2012.
- ^ a b "Twenty-five years is a long time to carry a memory". Sports.espn.go.com. November 13, 2007. Retrieved September 24, 2016.
- ^ "'It was a brutal fight' Las Vegas Review-Journal". Lvrj.com. November 13, 2007. Retrieved September 24, 2016.
- ^ "(Yonhap Feature) New documentary about Kim Duk-koo set for release 30 years after his death". Yonhap News. August 17, 2012. Retrieved September 24, 2016.
- ^ "Sports Illustrated's Ultimate Playlist". SI.com. June 28, 2011. Retrieved November 14, 2019.
- ^ Katz, Michael (December 12, 1982). "Referee Defends His Decision". New York Times. No. 1982–12–12. NYT. Retrieved May 7, 2019.
- ^ [1] 2015년 9월 5일 웨이백머신에 보관
- ^ 박스렉의 김덕구 선수 복싱 기록
- ^ Kwak, Kyung-taek (2002-06-28), Chaempieon (Drama), Oh-seong Yu, Min-seo Chae, Seung-won Yun, Doo-hong Jung, C2, Cowell, EnterOne, retrieved 2020-09-01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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