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웨이어해이저 납치 사건
George Weyerhaeuser kidnapping조지 웨이어해이저 9세 납치는 1935년 워싱턴 타코마에서 발생했다.저명한 목공 J.P.의 아들. 웨이어해이저, 조지는 몸값을 받고 풀려났고 결국 아버지의 뒤를 이어 웨이어해이저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null
납치와 몸값
1935년 5월 24일 당시 9세였던 조지 웨이어해이저가 평소보다 일찍 점심을 먹기 위해 학교에서 풀려났다.그는 여동생 앤을 만나기 위해 가까운 애니 라이트 신학교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가족 운전기사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만나 점심을 먹기 위해 아이들을 집으로 태워다 주었다.10분이나 15분 일찍 신학교에 도착한 조지는 기다리기보다 걸어서 집으로 가기로 한 모양이다.그는 도중에 어딘가에서 납치되었다.null
조지가 실종된 것을 알고 가족들은 경찰에 신고했다.그날 저녁, 특별한 배달 편지가 와이어해유저 집에 도착했는데, 봉투 뒷면에 서명이 적혀 있는 조지의 대가로 20만 달러, 10달러, 5달러짜리 무표지 지폐로 20만 달러(약 4백만 달러 2021년)를 요구했다.연방 수사국은 곧 통지를 받았다.납치범들의 지시에 따라 시애틀 포스트 인텔리전스에는[when?] 위어해 사용자들이 납치범들의 요구에 응할 것임을 알리는 개인 광고 '퍼시 미니(Percy Minnie)'가 게재됐다.지난달 27일과 29일에도 비슷한 광고가 게재됐다.null
1935년 5월 29일 받은 편지는 조지 부친에게 워싱턴 시애틀의 앰배서더 호텔에 등록하고 더 이상의 연락을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렸다.또한 안전하다는 조지의 메모도 동봉되어 있었다.그날 밤 10시에 택시 운전사가 호텔에서 웨이어해이저에게 또 다른 편지를 배달했다.이 편지는 웨이어해이저에게 지정된 지점으로 운전하라고 지시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하얀 천이 부착된 채 땅속으로 내몰린 막대기를 발견했고, 그를 더 멀리 떨어진 다른 신호 천으로 안내하는 메시지를 발견했다.그러나, 이 두 번째 장소에 도달했을 때, 그는 어떠한 메시지도 발견하지 못했다.두 시간을 기다린 후 그는 호텔로 돌아왔다.5월 30일 오전 익명의 발신자가 웨이어해이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했다.와이어해저는 협력하고 싶었지만 마지막 노트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null
그날 밤 9시 45분, 유럽 억양을 가진 남자가 전화를 걸어 와이어해유저에게 양철 통에 있는 쪽지를 찾을 수 있는 주소로 가라고 지시했다.그 후, 그는 각 장소에서 찾은 방향을 따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나아갔다.고속도로에서 떨어진 흙길에서 그는 차가 타는 돔 불빛을 받으며 5분 동안 기다렸다가 같은 도로의 다른 하얀 표지판으로 가라는 쪽지를 발견했다.거기서 그는 차를 버리고 시애틀로 돌아가라는 메모를 발견했다; 만약 돈이 정상이라면, 조지는 30시간 이내에 풀려날 것이다.바이어해이저는 덤불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 100야드쯤 걸었었다.한 남자가 달려나와 차에 올라타고 몸값을 챙겨 달아났다.null
피해자계정
1935년 6월 1일 아침, 젊은 조지 웨이어해이저(George Weyerhaeuser)는 워싱턴 이사콰(Issaquah) 근처의 판잣집에서 석방되었다.null
조지는 1935년 5월 24일 애니 라이트 신학교를 떠날 때 몇몇 테니스 코트를 통해 지름길을 택했다고 밝혔다.그는 테니스 코트를 떠나면서 갈색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40여 명의 남자를 만나 길을 물었다.조지가 응대하자 그 남자는 그를 들어 길 건너에 주차되어 있는 세단차로 옮겼다.아이는 차 앞자리에 두 번째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조지는 뒷좌석에 앉았고 담요가 그에게 던져졌다.그는 한 시간 넘게 차를 몰고 돌아다녔고, 그 동안 그는 남자들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null
남자들은 길가에 차를 세우고 조오지를 덮은 담요를 걷어냈다.그는 봉투를 받고 그 뒷면에 연필로 자신의 이름을 쓰라고 했다.그 후 그는 눈을 가리고 열 두 발짝이나 열두 발짝을 나르는데, 그는 그 남자가 흐르는 물을 들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개울을 건넜다고 말했다.개울 건너편에는 땅바닥에 내려놓고 손에 이끌려 농촌을 넘어 약 1/2마일이나 3/4마일쯤 갔다.소년은 그 일대가 자주 스치는 덤불이나 나무로 뒤덮여 있고, 땅이 매우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들은 큰 통나무로 어느 지점에 도착했고, 조오지를 인도하던 사람이 그를 땅에 파놓은 구멍에 집어넣었다.눈가리개가 벗겨진 조지는 그 구멍을 약 4평방피트로 추정했다.소년의 오른쪽 손목과 다리를 체인으로 묶은 후, 두 명의 포로가 구멍 위에 판자를 놓아 완전히 덮었다.그 남자들은 그날 밤 10시쯤까지 교대로 그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경찰이 그 구멍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null
소년은 다시 차로 옮겨져 트렁크에 넣어졌고, 그곳에서 그는 한 시간 정도 탔다.그는 차에서 내려 다시 숲 속을 안내받았다.목적지에 도달한 그의 납치범들은 조지가 나무 옆에서 기다리는 동안 또 다른 구멍을 팠다.조오지는 이 구멍에 자동차에서 떨어진 좌석과 담요 두 개와 함께 넣어졌고, 구멍은 타르 종이로 덮여 있었다.null
이후 수사관들은 1935년 5월 26일, 한 여자를 동반한 두 남자가 조지를 포드의 트렁크에 넣고 워싱턴을 거쳐 아이다호로 차를 몰았다고 판단했다.아이다호 주 블랜차드를 통과한 그들은 고속도로를 따라 산의 한 지점에서 방향을 틀 때까지 계속 달렸다.이른 아침 동안 소년은 차에서 내려 나무로 수갑을 채웠고, 그곳에서 해질녘까지 경호를 받았다.그 후 납치범들은 그를 한 집으로 데리고 가서 매트리스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작은 하얀 테이블이 있는 커다란 옷장에 넣었다.1935년 5월 31일 금요일 저녁, 조지는 그들이 이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들었다.그는 탁자 위에 있는 시계가 5시 55분임을 알리는 것을 알아차렸다.서로 '빌'과 '해리'라고 주소를 쓴 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갔다.조지는 남자들이 곧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null
다시 조지는 차 트렁크에 실려 워싱턴 이사콰 근처의 작은 판잣집으로 끌려갔다.다음날 새벽 3시 30분쯤, 그의 납치범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온다고 말하면서 떠났다.조지는 농가에 들어가 신분을 발표했다.가족들은 그를 데리고 들어가 세수를 하고 깨끗한 옷을 선물한 뒤 차를 타고 워싱턴 타코마로 차를 몰았다.null
FBI 수사
FBI가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피해자의 안전한 귀환을 위해 모든 예방 조치를 취했다.협상 기간 동안 특수부 요원들이 조용히 수사를 진행했다.몸값 청구서의 일련번호는 몸값 명단이 작성된 워싱턴의 FBI 본부로 보내졌다.납치범들이 돈을 받은 직후, 이들 명단은 은행, 호텔, 철도 회사 등 상업적 기업들에 배포하기 위해 FBI의 모든 현장 사무소에 보내졌다.1935년 6월 2일 오리건주 헌팅턴에서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가는 기차표를 지불하기 위해 20달러의 몸값 청구서가 입찰되었다.FBI 요원의 조사 결과 구매자는 하몬 메츠 왈리인 것으로 밝혀졌다.null
얼마 지나지 않아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할인점에는 몸값 청구서가 많이 등장했다.그곳에는 한정된 수의 특수요원들로 인해 각 시내 할인점에 경찰관들이 배치되었고, 각 상점에는 몸값 명부 사본들이 비치되어 있었다.그 결과 1935년 6월 8일 울워스 매장에 배치된 경찰 형사가 출납원으로부터 한 여성이 몸값 계산서 중 하나를 제시했다는 통보를 받았다.그 형사는 마가렛 E로 판명된 그 여자를 데려갔다.FBI 솔트레이크시티 현장 사무소에 하몬 월리의 아내 왈리.그녀가 현장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몸값 청구서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다.그녀는 여러 가지 상반된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의 정확한 집 주소를 얻었다.null
하모니 메츠 왈리 체포
그날 늦게 하몬 메츠 왈리는 집에서 체포되었다.몇 차례 거짓 진술을 한 뒤 아이다호주 교도소에서 만난 윌리엄 다이나드와 함께 소년을 납치했다고 털어놨다.그는 그의 아내가 워싱턴주 스포캔에 도착할 때까지 납치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덧붙였다.그녀는 은신처에 있었고 그들이 몸값을 흥정하는 것을 도왔다.null
몸값 약 3700달러가 월리스의 난로에서 불에 탄 것으로 밝혀졌다.유골은 워싱턴 D.C.에 있는 FBI 실험실로 보내졌는데, 그 곳에서 유골들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수의 지폐가 남아 있다고 판단되었다.null
왈리는 자신과 다이나드가 돈을 똑같이 나눌 계획이었지만 다이나드가 5천 달러에서 자신을 속였다고 주장했다.현장 사무소에서 추가 조사를 받은 후, 왈리는 솔트레이크 시티에 도착했을 때 헤르만 폰 메츠라고 등록한 포드 로드스터를 샀다고 말했다.나무나 덤불 밑에 90,790달러를 묻었는데, 1935년 6월 11일 특수요원들이 되찾았다.null
월리가 마가렛 월리의 부모님의 집에서 다이나드를 만나기로 주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요원들은 그 집으로 향했다.그녀의 할아버지는 다이나드의 인상착의를 대답하는 남자가 그 집에 와 월리스 일행을 부탁했다고 충고했다.할아버지는 윌리스 일행이 여행 가방을 가지러 더 일찍 갔지만 솔트레이크 시티로 돌아와 체포되었다고 그에게 말했다.남자는 "맙소사,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얻었느냐"고 외친 뒤 자신의 차로 돌아와 차를 몰고 떠났다.null
지문검사
은신처, 구멍, 납치범들의 집에서 발견된 물적 증거들은 FBI 실험실 인력에 의해 조사되었다.지문 감식은 월리스와 다이나르를 몸값이 나누어져 있던 판잣집과 긍정적으로 연결시켰다.또한 웨이어해이저씨의 지폐가 놓여 있는 깡통에는 하몬 월리의 지문이 나타났고, 은신처에서는 마거릿 월리의 지문이 발견되었다.null
대배심
1935년 6월 19일, 워싱턴 타코마의 연방 대배심은 윌리엄 다이너드, 하몬 메츠 월리, 마가렛 E를 기소한 기소장을 반환했다.납치와 유괴 음모로 왈리.null
하몬 월리는 1935년 6월 21일 유죄를 인정받기 시작했으며, 납치 혐의로 45년, 납치 공모 혐의로 2년의 동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그는 워싱턴 맥닐 아일랜드의 미국 교도소로 보내졌다.Waley는 나중에 캘리포니아 알카트라즈 섬의 미국 교도소로 이송되었다.null
1935년 6월 22일, 마거릿 월리는 두 가지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다.그녀는 1935년 7월 5일 워싱턴 타코마 미국 지방법원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다.4일 후, 그녀는 미시간 주 밀라노의 미국 수용소에서 두 번의 20년 임기의 동시 복역 선고를 받았다.null
다이나르 위치
윌리엄 다이너드가 윌리 부인의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 후 몬태나주 부테로 갔다.1935년 6월 9일, 그를 체포하려고 시도한 경찰관의 인정을 받았다.다이나드는 경관을 피했고, 이후 그의 차는 몸값으로 1만5155달러와 함께 버려진 것으로 밝혀졌다.null
다이나드의 사진과 지문, 필적표본, 배경정보 등이 포함된 신분확인명령이 마련됐고, 사본은 미국 전역으로 배포됐다.다이나드가 멕시코나 호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에 대응하여, 신분증 사본도 양국의 경찰기관에 비치되었다.1936년 초, 일련번호가 변경된 지폐가 서부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FBI 연구소가 이 법안들을 조사한 결과 실제 일련번호가 몸값 청구서와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은행들은 환전용으로 환전된 화폐를 제시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권고받았다.null
다이너드 체포
1936년 5월 6일,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두 곳의 은행 직원들은 한 남자가 각 은행에서 환전했다고 보고했다.두 은행의 직원이 입수한 그의 면허번호는 버트 E에게 발급되었다.콜, 그 번호로 적힌 주소에서 감시가 유지됐어1936년 5월 7일 아침, FBI의 샌프란시스코 현장 사무소에 배속된 특수 요원들에게 그 부근을 수색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두 명의 요원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주차장에서 신고된 면허번호가 적힌 포드를 발견했다.null
나중에 한 남자가 차에 들어가 시동을 걸려고 했다.시동이 걸리지 않자 차에서 내려 후드를 들어올렸다.요원들이 그 남자에게 다가갔는데, 그 남자는 쉽게 다이너드라고 밝혀졌다.그는 저항없이 체포를 신청했고, 45구경 콜트 자동 권총이 그의 사람으로부터 제거되었다.null
질문을 받자 다이너드는 납치 가담 사실을 시인했다.체포 당시 요원들은 다이나드가 몸값을 대가로 받은 것으로 인정한 몸값과 청구서 3만7374.47달러를 회수했다.특수요원들도 다이나드가 유타에 묻었던 100달러짜리 지폐 1만4000달러를 회수했다.게다가, 지폐로 일련번호를 바꿀 때 사용되는 다양한 염료와 다른 주머니곰들이 그의 집인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차고에서 발견되었다.다이나드는 워싱턴의 타코마로 이송되어 1936년 5월 9일 미국 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그는 납치와 유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60년 징역 2년을 동시에 선고받았다.같은 날, 그는 워싱턴의 연방 맥닐 아일랜드 교도소로 보내졌다.이후 그가 캔자스의 연방 레븐워스 교도소로 이감되자 교도소 당국은 다이나드가 미쳤다고 판단하고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고했다.null
공범
FBI의 추가 조사는 다이나드의 동료인 에드워드 플리스가 몸값 환전을 도왔다는 것을 밝혀냈다.플리스는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델마 호텔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FBI 요원에 의해 체포되었다.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이너드가 몸값을 처분하는 것을 도왔다는 것을 인정했다.null
플리스는 시애틀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그는 몸값 지불을 방조한 것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고 10년 징역과 5천 달러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null
형기
이번 납치사건의 참가자들은 총 135년의[further explanation needed] 징역형을 선고받았다.수사 과정에서 FBI 특수요원들은 몸값 대가로 받은 몸값과 현금 등 총 15만7319.47달러를 회수했다.null
월리는 감옥에서 조지 웨이어해이저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써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그가 52세의 나이로 1963년 6월 3일 석방되었을 때, 조지 웨이어해이저는 그의 오리건 공장 중 한 곳에서 월리를 위해 일자리를 찾았다.null
참조
- 던컨, 돈. "워싱턴:첫 백 년 - 1889-1989".시애틀 타임즈, 1989.
이 글은 미국 정부 문서인 "https://www.fbi.gov/about-us/history/famous-cases/the-weyerhaeuser-kidnapping"의 공공 도메인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n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