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바체비치
Ivatsevichy이바체비치 Івацэвіч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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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52°43˚N 25°20°E / 52.717°N 25.333°E | |
나라 | ![]() |
보블라스 | 브레스트 보블라스 |
라이온 | 이바체비치 라이온 |
언급된. | 1508 |
표고 | 148m(486ft) |
인구 (2009)[1] | |
• 합계 | 22,958 |
시간대 | UTC+2(EET) |
• 여름(DST) | UTC+3(EEST) |
우편번호 | 225295 |
지역 번호 | +375 1645 |
번호판 | 1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러시아어) |
Ivacevičy (Belarusian: Івацэ́вічы, Russian: Ивацевичи, Polish: 이와세위체, 리투아니아어: 이바세비차이)는 이바세비치 지구의 행정 중심지인 벨라루스의 브레스트 성에 있는 시이다.
스포츠
벨라루스의 축구 클럽 FC 이바체비치는 2018년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리투아니아의 그랜드 뒤치 안에서 이바트세비치는 노오그로데크 보이보데쉬의 일부였다. 1795년 폴란드 제3차 분할 과정에서 러시아 제국에 의해 마을이 인수되었다.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이바체비치(Ivatsevicze)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지방도시로 인구가 약 1,500명인 코소프 군의 소재지였다. 그것은 주목할 만한 유대인 인구를 가진 동부 크레시의 폴란드인 보이보다이프 지역에 속해 있었다.[2]
1939년 9월, 이바체비치는 홍군에 점령되었고, 1939년 11월 14일, 벨로루시안 SSR에 편입되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서부 지역에서 난민들이 유입되면서 이바체비치의 유대인이 크게 늘었다.
이바체비치는 1941년 6월 24일부터 1944년 7월 12일까지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고, 라이히스코미사리아 오스틀란드의 장군 베지르크 웨이하루테니엔의 일부로 관리되었다. 나치는 근처에 있는 wi위로니아 자갈 구덩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 사형을 실시했다. 강력한 독일군 호위 아래 유대인들은 시내를 벗어나 행군하여 소규모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이미 파낸 구덩이 위로 파도에 맞아 죽었다. 1944년 이전에 나치는 전쟁 포로를 포함한 천명 이상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처형했다.[3] 나치가 이바체비치를 인수한 직후인 1941년 약 600명의 유대인을 위한 게토가 설치되었다. 그들은 기아 배급을 받고 노예 노동을 강요당했다. 1942년 3월 14일 게토는 청산되었다. 모든 수감자들은 스워님 게토까지 도보로 행진했고, 그곳에서 몇 달 동안 살해되었다.[4]
해방 후 소련 벨로루시에서는 이바체비치의 집단 무덤이 모래를 채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채굴하는 동안, 죽은 사람들의 뼈는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었고, 마침내 1960년대까지 구덩이에 석조비가 세워져 이미 채굴된 무덤을 표시했다.[3]
참조
- ^ "World Gazetteer".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January 11, 2013.
- ^ "Weissruthenien region. "Iwacewicze"". The 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Encyclopedia. Indiana University Press. 2009. p. 1200. ISBN 9780253355997. Retrieved April 11, 2012.
- ^ a b "Iwacewicze. Ul. Czartkowa - miejsce egzekucji i zbiorowa mogiła ofiar Zagłady". Virtual Shtetl. Museum of the History of Polish Jews. Retrieved April 11, 2012.
- ^ "Getto w Iwacewiczach". Virtual Shtetl. Museum of the History of Polish Jew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March 4, 2016. Retrieved April 11,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