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듀안 도티

James Duane Doty
제임스 듀안 도티
James Duane Doty daguerreotype by Mathew Brady.jpg
1850년 경
유타 준주의 5대 주지사
재직중
1863년 6월 22일 – 1865년 6월 13일
임명자에이브러햄 링컨
선행자스티븐 S. 하딩
성공자찰스 더키
미 하원 의원
위스콘신 제3지구 출신
재직중
1849년 3월 4일 – 1853년 3월 3일
선행자포지션 설정됨
성공자존 B. 메이시
위스콘신 준주 제2대 주지사
재직중
1841년 9월 30일 – 1844년 6월 21일
임명자존 타일러
선행자헨리 닷지
성공자나다니엘 P. 탈마지
미 하원 의원
위스콘신 준주 지역 출신
재직중
1839년 1월 14일 – 1841년 3월 3일
선행자조지 월리스 존스
성공자헨리 닷지
개인내역
태어난(1799-11-05)1799년 11월 5일
미국 뉴욕 살렘
죽은1865년 6월 13일 (1865-06-13) (65세)
미국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휴게소포트 더글러스 묘지
솔트레이크시티
정당
배우자사라 도티
아이들.
  • 찰스 도티
  • (1824년, 1918년 사망)
  • 제임스 도티
  • (b. 1829; 1857년 사망)
직업변호사, 정치인
서명

제임스 듀안 도티(James Duane Doty, 1799년 11월 5일 ~ 1865년 6월 13일)는 위스콘신 유타영토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미국의 토지 투기자 겸 정치가였다.

조생과 법조계 경력

메이플라워 이민자 에드워드 도티의 후손인 [1]도티는 1799년 뉴욕 살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동생 월터 마틴 장군이 세운 뉴욕 마틴스버그로 가족이 이주했을 때 그는 3살도 채 되지 않았다. 도티는 뉴욕 로빌의 마틴스버그에서 북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로빌 아카데미에 다녔다.[2]: pp.35–36

1818년 도티는 미시간 준주의 수도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그곳에서 법무장관 찰스 라레드의 견습생이 되었다. 1818년 11월 20일 웨인 카운티와 미시건 준주()[2]: p.6 의 술집에 입회했다. 그는 1819년 9월 29일 미시간 준주 법원 서기로 임명될 때까지 법률을 실천했다. 1820년 6월 그는 미시시피강 서쪽에 위치한 미시건 준주의 서쪽에 위치한 미시건 준주의 일부를 여름 동안 탐사하는 루이스 캐스 원정의 비서로 일하기 위해 사무원직을 사임했다. 디트로이트로 돌아오자마자 도티는 그의 법적 관행을 재개했다.[2]: p.21 1822년 겨울 도티는 워싱턴 D.C.로 여행을 떠났고, 헨리 휘튼의 후원을 받아 3월 13일 미국 연방대법원에 출정했다.[2]: p.25

1823년, 현재 위스콘신 주와 미시간 상층 반도를 포괄하는 미시간 주 북부와 서부 지역을 위한 연방 사법 구역이 신설되었다. 도티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에 의해 그 지역의 연방 판사로 임명되었다.[2]: pp.30–31 도티는 1823년 4월 14일 뉴욕 화이트스보로에서 사라 콜린스와 결혼했다.[2]: p.39 그가 그의 지역 내에 살도록 요구되었기 때문에, 도티와 그의 새 아내는 1823년 디트로이트에서 프레리치엔으로 이사했다. 도티는 정기적으로 프레리뒤치엔, 그린베이, 맥키낙에서 법정을 열었다.[2]: p.48 또한 1823년부터 1824년까지 프레리뒤치엔의 초대 우체국장을 지냈다.[2]: p.54 1824년 도티는 그린베이로 이사하여 1841년까지 살았다. 도티는 1832년 데이비드 어빈에 의해 교체될 때까지 지방 판사로 남아 있었다.[3]

영토 정치

도티는 판사 경력을 이어 1834년부터 1835년까지 미시간주영토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영토의 서부를 대표했다. 이 자격으로 도티는 위스콘신 주에게 새로운 영토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하면서 미시간 주 영토를 미시간 호수 동쪽과 서쪽 두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에 찬성하는 청원서를 의회에 보냈다. 도티는 1824년 초 이 아이디어를 지지했으며, 점점 더 많은 위스콘신 거주자들이 위스콘신 정착지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디트로이트의 영토 정부에 의해 적절히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티는 미시건 호수 서쪽 주민들이 보낸 투표는 계수에 맞춰 디트로이트로 보내질 수 없으며, 로어 미시간 주민들은 호수 서쪽 정세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35년 미시건주 주지사가 미시간주(州)가 주(州)를 준비함에 따라 미시간주(州)의 서부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별도의 입법부를 만들면서 그의 소원은 부분적으로 허여되었다.

1835년 도티는 미시간 주 서부 지역을 대표하여 의회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했으나 조지 월리스 존스에게 3파전에서 패배하였다. 도티와 존스 모두 민주당원으로 출마하고 있었지만 도티는 어느 정당에도 진정한 충성심이 거의 없었다. 그는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대개 어느 특정 시간에 가장 인기 있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선거에서 패배한 후 도티는 토지 투기로 돌아서 주 전역에 걸쳐 수천 에이커의 땅을 샀고, 그 중 일부는 위스콘신 매디슨 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836년 위스콘신 영토가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도티 전 총리는 영토수주를 희망했지만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도티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헨리 도지를 총리직에 임명했다. 공식 직함이 없는 도티는 매디슨 시가 될 토지 소유권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도티는 이 땅을 조사하여 평지하게 하고 멘도타 호와 모노나 호 사이에 있는 이스트무스에 도시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된 도시를 인정받기 위해 도티는 자신이 제안한 도시를 위스콘신 주의 수도로 선정하기 위해 새로운 영토 입법부에 로비를 벌였다. 위스콘신 벨몬트에 임시 수도가 이미 세워져 있었지만, 밀워키와 그린베이와의 거리가 벨몬트 시설에 대한 많은 의원들의 불만과 맞물려 수도 이전 가능성이 높아졌다. 도티 의원은 매디슨이 수도가 될 수 있도록 수많은 전술을 사용했으며, 입법자들에게 운하와 철도를 위한 계획을 설득하고, 매디슨을 수도의 선택지로 만들기 위해 투표한 의원들을 제공했다. 매디슨은 1836년 11월에 영구 수도로 선언되었고, 1837년에 신도시 건설이 시작되었다.

1838년 도티는 1835년 선거의 재대결에서 조지 W. 존스를 물리치고 위스콘신 준주의 의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도티는 민주당원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클레이를 포함한 워싱턴 D.C.의 여러 Whigs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었다. 1840년 휘그당 후보 윌리엄 헨리 해리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도티의 민주당 지위에도 불구하고 도티를 위스콘신 주지사에 임명할 계획을 세웠다. 해리슨은 임명되기 전에 죽었지만, 존 타일러 부통령은 1841년 대통령직에 오른 후 해리슨의 소망을 충족시켰다. 도티는 영토 주지사, 영토 의회의 닷지 지지자들이 도티가 지지한 법안의 대부분을 거부하면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고, 도티는 위스콘신 주의 지위를 위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실패했다. 도티의 임기는 1844년에 끝났고, 대신 나타니엘 P를 선택한 타일러에 의해 연임되지 않았다. 탈리매지는 기둥에 붙었다. 이로써 도티는 다시 한 번 사생활을 되찾게 되었다.

위스콘신 주의 성년

위스콘신주 네나에 있는 도티네 집

1846년 도티는 제1차 위스콘신 헌법 협약의 대표로서 정계에 복귀했다. 도티는 무소속으로 전당대회에 나왔지만 대부분의 쟁점에서 휘그족 편을 들었고 민주당 다수가 확실한 전당대회에서 야당 지도자로 부상했다. 많은 논쟁 끝에, 이 협약은 헌법을 만들어냈지만, 도티와 다른 대의원들이 주도한 헌법을 위한 공공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주 주민들은 이 문서를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국민투표에서 부결시켰다. 1847년 말에 소집된 두 번째 협약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헌법을 만들었고, 이는 위스콘신주가 1848년에 국가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했다. 도티는 위스콘신 주가 된 직후 미국 하원에 당선되었으며, 1849년부터 1853년까지 위스콘신에서 새로 만들어진 제3의회 선거구의 대표로 활동하며 제31대, 제32대 의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John B로 대체되었다. 메이시. 의회를 떠난 뒤 도티는 공적인 생활을 떠나 위스콘신주 네나메나샤 사이의 섬(지금의 도티 섬이라는 이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은퇴했다.[4] 섬의 동쪽 끝에서 이전한 그의 로그캐빈 집은 도티 섬의 남동쪽 강변에 있는 도티 공원(섬의 네나 쪽)에 있다.[5] 그것은 국가 사적지에 등재되어 있다.

유타 주의 경력

1861년 공화당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를 유타 영토의 인도 담당 감독관에 임명하면서 도티는 공직에 복귀했다. 도티는 이 위치에서 성공했다. 1863년, 유타주의 영토 총독인 스티븐 셀윈 하딩은 LDS 교회에 대한 비판과 일부다처제의 관행에 대한 대중의 반발로 공직에서 해임되었다.[6] 링컨은 그 직후 도티를 주지사에 임명했다. 주지사로서 도티는 연방정부와 그 지역의 모르몬교도들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6] 도티는 또한 학교 건설과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과의 협상을 촉진했다.

가족

죽음

도티는 유타주의 블랙호크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865년 6월 13일 65세의 나이로 공직에서 사망했다. 그는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포트 더글러스 묘지에 묻혔다.[7]

참조

  1. ^ "Neenah Teacher Completes Genealogical Table of Doty Family after Long Research". The Post-Crescent. July 26, 1939. p. 8. Retrieved March 18, 2015 – via Newspapers.com. open access
  2. ^ a b c d e f g h Smith, Alice Elizabeth (1954). James Duane Doty, Frontier Promoter. Madison: State Historical Society of Wisconsin.
  3. ^ Wisconsin Historical Society. "Topics in Wisconsin History: James Duane Doty". Retrieved March 15, 2008.
  4. ^ 도티 섬
  5. ^ 도티, 제임스 듀안 1799 – 1865
  6. ^ a b Murphy, Miriam B. (1994), "Territorial Governors", in Powell, Allan Kent (ed.), Utah History Encyclopedia, Salt Lake City, Utah: University of Utah Press, ISBN 0874804256, OCLC 30473917
  7. ^ "James Duane Doty". Utah History to Go. State of Utah. Retrieved March 15, 2008.

외부 링크

미국 하원
선행자 미 하원 대표
위스콘신출신

1839–1841
성공자
선행자
신구
미 하원 의원
위스콘신 주의회 제3지구 출신

1849–1853
성공자
정치국
선행자 위스콘신 주의 주지사
1841–1844
성공자
선행자 유타 주의 주지사
1863–1865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