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족

Joachimites

요아힘 자손은 밀레나리아 집단인 요아치 족이라고도 하며, 13세기에 프랑시스 족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피오르의 요아힘(1135년 – 1202년)의 이전 저작에 근거하여 그들의 사상을 근거로 삼았지만, 그 당시의 교회는 피오레보다 더 강하게 거부하였다. 요아치미트 신앙[1] 라테란 제4차 평의회에 의해 비난받았고 요아치미트 해석은 개신교 개혁에서 유행하게 되었고,[2] 일부 개신교 해석에도 영향을 주었다.[3] 그는 또한 역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시대로 나누었다.[4]

요아힘의 신앙

피오레의 요아힘은 종말론에 대한 역사주의적 해석과 신비주의를 믿었다.[5] [6]요아힘의 작품은 역사를 세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 나이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나이는 구약령 시대였다. 두 번째 나이는 손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의 세계였다. 세 번째와 마지막 나이는 성령의 나이일 것이다. 이 새로운 시대에 '영원한 복음서'는 조직화된 교회를 대체하며 '성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 후 사회는 평등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수도원적 기반 위에 재정립될 것이다. 초년은 마흔두 세대였다고 한다. 두 번째 나이 또한 42세대가 될 것이다. 요아힘은 기독교의 시대가 1260년에 반기독교인의 도래로 끝날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 후에는 유토피아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7] 요아힘은 어느 순간이라도 종말이 올 수 있다고 믿었고, 요아힘은 종말의 임종을 강조하는 신약성서를 믿었다.[8]

요아힘의 주된 이유는 역사가 창조자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창조자가 세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역사는 세 시대에 걸쳐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9] 요아힘은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라는 두 가지 훌륭한 조약이 있었다고 말했다.[4]

요아힘은 구약성경 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믿었고, 구약성경 '첫 번째 봉인' 동안 유대인들이 이집트인들의 탄압을 견뎌냈으며, '두 번째 봉인'에서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예루살렘에서 왕권과 사제직을 세웠다고 믿었다. 세 번째 봉인 동안 히브리 왕국은 여러 부족들로 나뉘었고, 네 번째 봉인에서는 이스라엘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아시리아인들에게 정복당했으며, 다섯 번째 봉인에서는 칼데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여섯 번째 봉인 아래에서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포로로 고통받았고 일곱 번째 봉인에서는 신전이 재건되고 유대인들은 시간을 가졌다. 그리스인들이 올 때까지 평화로움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구약조약이 종식되었고, 아버지의 시대는 종식되었다.[7]

피오르의 요아힘은 그의 서재에 있다.

요아힘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대신하게 되었는데, 요아힘은 토빗의 맹목(Tob 2:7-10)이 히브리인들의 맹목성을 나타낸다고 믿었고, 히브리인들이 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너무 '수건적'이며 '내부적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아 '예수의 빛'을 보지 못했다. 요아힘은 또 자하리와 엘리자베스(루케 1:5-7)의 이야기를 비슷한 방식으로 보았고, 자하리가 유대인과 엘리자베스의 관계를 '레위인의 교회'로 나타낸다고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임신은 유대교 성직자가 예수를 낳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는데, 자커리는 원래 엘리자베스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천사 가브리엘의 포고를 믿지 않았고 유대교 사제관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벙어리가 되었다. 요아힘은 토빗이나 자차리와 같은 사람들이 경건한 사람들이며, 여전히 그들의 시력을 빼앗기고, 마찬가지로 히브리 사람들도 삼위일체를 부정함으로써,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그들의 성직과 충성스런 힘을 잃었다고 믿었다.[7]

요아힘은 특히 필리오케에 대한 정교회의 거부를 이단으로 비판하면서 이슬람의 발흥과 그리스 교회의 오류 사이에 연관성을 끌어냈다. 요아힘에 따르면, 구약성서에서 히스기야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신은 비잔틴 제국이 사실상 멸망한 후, 프랑크 족의 통치하에 있던 서양 교회를 이슬람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유사했다. 프랑크족과 교황과의 결합의 발흥은 요아힘에게는 매혹적인 일이었고, 첫째는 비잔틴족의 권력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었지만, 둘째로 '제5의 봉인'을 취임시켰는데, 그의 해석으로는 서양교회의 평화와 안정의 시대였다. 히사키야에게 준 보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7]

피오레의 요아힘(오른쪽)

요아힘은 '이스라엘'의 시대, 그리스도에서 콘스탄티누스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시대, 콘스탄티누스에서 샤를에 이르는 '이집트'의 시대, 샤를에서 요아힘의 '바빌론'의 시대 등 세 가지로 교회의 역사를 나누었다.[7]

요아힘은 라틴교회가 예레미야가 예언한 한탄의 시대로 들어설 기미가 뚜렷하다는 것을 본다고 믿었다. 요아힘은 교황 레오 9세가 자신의 왕국에서 종교생활을 개혁한 유다의 요시야 왕과 동조하였지만, 요아힘의 전투에서 레오가 실패한 후 바로에 의해 멸망한 것을 보고, 요아힘은 교황이 영적인 무기가 아닌 '물질적 무기'를 믿음으로써 잘못을 저질렀다고 선언했다. 요아힘은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바빌로니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었던 것처럼 교회 개혁을 위한 노력이 로마교회를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믿었다.[7]

요아힘은 적그리스도가 언젠가 교황이 될 것을 보고, 로마가 바빌론을 대표하고, 요아힘이 교황직을 절대악과 천사의 선으로 결부시키는 것을 보았다.[7] 피오레의 요아힘도 이스라엘이 종말 전에 교회에 가입해 개종하고 동서교회가 '한 마리 떼'[7]로 통일할 것으로 믿었다.

요아힘은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 바와 같이 천년이 이미 존재한다고 믿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들과는 달리, 요아힘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1000년 미래의 사건으로 보았다.[10]

요아힘은 삼위일체주의자였고, 요아힘은 삼위일체 교리를 의심하곤 했으나, 후에 10개의 현을 가진 시편과 삼각형의 형태로 비젼을 갖게 되어 삼위일체를 분명히 했다. 요아힘은 또한 그의 저서 "십현절의 절정"[11]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피터 롬버드의 견해를 공격했다.

논란

1215년에 그의 사상 중 일부는 라테란 제4차 평의회에서 비난받았다.[1] 게다가, 그의 추종자들은 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프란치스코의 명령으로부터 덕망 있는 교황의 출현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셀레스틴 5세 (1294년 선출)를 이 교황으로 여겼다. 그의 사임, 그리고 1296년 차기 교황의 지하감옥에서 사망한 것은 반 크리스트교가 오는 징조로 여겨졌다. 이 무렵, 아니 어느 정도 전에 요아힘이 쓴 글이 영원한 복음서나 그 길이라고 더욱 단정하였다.

운동도 좀 더 실용적인 접근으로 나아간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을 통해 완벽해질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것으로 미래에 크게 맞춰진 최초의 움직임 중 하나였다. 이 행동은 주로 거대한 초자연적인 사건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진전에 대한 현실적 관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유토피아적 폭로가 어리석거나 이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이 또한 대체로 반대되었다.

중세 페리오이드

프리티첼리는 요아힘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12] 요아힘은 단테의 견해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13]

근대

요아힘의 해석은 17세기와 18세기에 일부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근대에 이르러 쥬르겐 몰트만과 같은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요아힘의 신학에 영향을 받았으나, 그는 가톨릭 신자들에게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14]

참조

  1. ^ a b "Joachim Of Fiore Italian theologian Britannica". www.britannica.com. Retrieved 2021-12-09.
  2. ^ Maas, Korey (2010). The Reformation and Robert Barnes: History, Theology and Polemic in Early Modern England. Boydell & Brewer. ISBN 978-1-84383-534-9.
  3. ^ Lundin, Roger (1993). The Culture of Interpretation: Christian Faith and the Postmodern World. Wm. B. Eerdmans Publishing. ISBN 978-0-8028-0636-9. Joachimite interpretation itself prefigured later developments in Protestant and romantic hermeneutics.
  4. ^ a b "Joachim Of Fiore Italian theologian Britannica". www.britannica.com. Retrieved 2021-12-11.
  5. ^ Smith, John Howard (2021-02-05). A Dream of the Judgment Day: American Millennialism and Apocalypticism, 1620-1890.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753375-8.
  6. ^ "Joachim Of Fiore Italian theologian Britannica". www.britannica.com. Retrieved 2022-01-14.
  7. ^ a b c d e f g h Whalen, Brett Edward (October 2009). Dominion of God: Christendom and Apocalypse in the Middle Ages. Harvard University Press. ISBN 978-0-674-03629-1.
  8. ^ Riedl, Matthias (2017-10-23). A Companion to Joachim of Fiore. BRILL. ISBN 978-90-04-33966-8.
  9. ^ Riedl, Matthias (2017-10-23). A Companion to Joachim of Fiore. BRILL. ISBN 978-90-04-33966-8.
  10. ^ Riedl, Matthias (2017-10-23). A Companion to Joachim of Fiore. BRILL. ISBN 978-90-04-33966-8.
  11. ^ "Joachim Of Fiore Italian theologian Britannica". www.britannica.com. Retrieved 2021-12-11.
  12. ^ Lundahl, Mats; Lundius, Jan (2012-10-02). Peasants and Religion: A Socioeconomic Study of Dios Olivorio and the Palma Sola Religion in the Dominican Republic. Routledge. ISBN 978-1-134-68765-7.
  13. ^ "Joachim Of Fiore Italian theologian Britannica". www.britannica.com. Retrieved 2021-12-13.
  14. ^ Riedl, Matthias (2017-10-23). A Companion to Joachim of Fiore. BRILL. ISBN 978-90-04-33966-8.
  • Lerner, R. E. (2000). The Feast of Saint Abraham: Medieval Millenarians and the Jews.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ISBN 0-8122-3567-3.
  • McGinn, Bernard (1985). The Calabrian Abbot: Joachim of Fiore in the History of Western Thought. New York: MacMillan. ISBN 0-02-919550-0.
  • Reeves, Marjorie (1993). The Influence of Prophecy in the Later Middle Ages: A Study in Joachimism. Notre Dame, IN: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ISBN 0-268-01170-2.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