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마 고노
Kōno Togamaviscount 도가마 고노 河野敏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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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가마 고노 번 | |
태어난 | 일본 도사 번 | 1844년 11월 29일
죽은 | 1895년 4월 20일 | (50세)
국적 | 일본인입니다 |
직업 | 정치인, 내각 장관 |
도가마 고노 번(道家馬, 1844년 11월 29일 ~ 1895년 4월 20일)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정치가였다.
전기
고노는 도사 성 고치 시(현 고치 현)에서 지방 하급 사무라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858년 에도로 파견되어 저명한 유학자 야스이 속켄의 밑에서 (무쓰 무네미쓰와 함께) 공부하였다.[1]1861년 도사로 돌아오면서 다케치 한페이타와 사카모토 료마가 조직한 토사 긴노토 운동에 가담하여 손노죠이 운동에 적극적이 되었다.1862년 59명의 다른 토사 사무라이와 함께,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로 교토와 에도를 행군하였으나, 1863년 도쿠가와 막부의 보안군에 붙잡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감옥에 있는 동안 고문을 당했지만, 그는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그의 형량은 무기징역까지 연장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고노가 해방되어 동료 토사 촌민 고토 쇼지로에 의해 영입되어 오사카 행정의 에토 심페이를 보좌하게 되었다.사무라이 행정국 설치로 1874년 히로시마에 파견되었다.그러나 전사무라이의 불만이 높아져 여러 곳에서 공공연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그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도와 규슈의 중앙 관권을 회복하는 임무를 맡았다.이 자격으로 사가 반란에서 전 스승인 에토 심페이(Eto Shimfei)와 맞섰다.그는 재판 중에 에토에게 매우 거칠게 대했고, 법정에서 그의 행동을 변호할 기회를 거절했고, 조기 사망 판결을 추진했다.[2]
고노는 1875년 겐로인에 임명되어 1878년 부위원장이 되었다.1880년 메이지 정부의 초기 다이조칸 제도로 교육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881년 같은 제도로 농업통상주임이 되었다.정치적으로는 오쿠마 시게노부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릭켄 가이신토 정당에 부의장으로 가입했다.[3]1888년 추밀원에 임명되었다.
1892년, 고노씨는 제1차 마쓰카타 마사요시 내각에 가입하여 농림부 장관, 내무부 장관, 법무부 장관, 교육부 장관 등의 포트폴리오가 겹쳤다.그는 제2차 이토 히로부미 정권에서 교육부 장관직을 계속 맡았다.
1893년 고노는 카조쿠 페어리지 제도에서 시샤쿠(방문)의 계급과 함께 영예롭게 되었다.1895년에 사망하였으며, 묘소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다.
참조
- Keene, Donald (2005). Emperor Of Japan: Meiji And His World, 1852–1912. Tokyo: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2341-9.
- Ozaki, Yukio (2001). The Autobiography of Ozaki Yukio: The Struggle for Constitutional Government in Japan (translated by Fujiko Hara). Princeton University Press. ISBN 978-0-691-050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