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투니사 베굼
Lutfunnisa Begum루투니사 베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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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트후니사 베굼의 호스백 무덤 | |
벵골·비하르·오리사 나왑의 군주 | |
테뉴어 | 1756년 4월 9일 – 1757년 6월 23일 |
태어난 | 1740 |
죽은 | 1790년 11월 10일 인도 무르시다바드 | 49-50세)
매장 | |
배우자 | 시라이우드둘라 |
이슈 | 쿠즈시아베굼사히바 |
루트후니사 베굼은 벵골의 마지막 독립 나왑인 나와브 시라즈 ud-daulah의 세 번째 부인이자 일차적인 왕비였다.[1]
초년기
원래 이름은 라즈쿤와리(Rajkunwari)로, 시라즈 ud-daulah의 외할머니인 베굼 샤리푼 니사를 섬기는 힌두교 소녀였다.[2] 시라지는 라즈쿤와리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할머니에게 그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Begum Sharifun nissa가 따랐고 그는 그녀의 이름을 Lutfunnisa Begum으로 바꾸었다. 이쯤 되자 시라지는 이미 베굼 지부니사와 엄다투니사 바후 베굼이라는 다른 두 부인과 결혼했다.[3]
결혼 후의 삶
루트후니사는 시라지의 맏딸인 엄메 조하라 베굼을 낳았다. 1748년 시라즈의 아버지 자인 ud-딘 아흐메드 칸이 무스타파 칸을 지휘하는 아프간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시라지는 아버지의 전 직책인 비하르의 나이브 나짐에도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루후니사 베굼은 그의 일차적인 조부가 되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시라지와 그의 프랑스 동맹국들을 격파하는 것을 본 플라시 전투가 끝난 후, 루트후니사는 그와 그들의 딸과 함께 궁전을 탈출했다. 그들과 동행한 것은 믿을 만한 내시였다. 1757년 6월 24일, 그들은 탈출했다. 그들은 곧 붙잡혀 영국과 연합한 새로운 나워브인 미르 자파르에 의해 무르시다바드로 다시 끌려왔다. 미르 자파르의 사위 미르 카심(Mir Qasim)은 루투니사(Lutfunnisa)를 고문하여 가족 보석들의 위치를 알아냈다.[3]
1758년 루투니사와 딸은 다카로 유배되어 진지라궁에 투옥되었다. 그녀는 7년 동안 그곳에 갇혀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미르 자파르와 그의 아들이 그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녀는 둘 다 거절했다. 그녀는 1765년 진지라궁에서 풀려나 무르시다바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그녀와 그녀의 딸을 위한 연금 조성을 허용했다. 후자인 움메 조하라 베굼은 시라지의 조카인 미르 아사드 알리 칸 무라드 우드둘라와 결혼했으며, 미르자 메헤디 에크람 우드둘라의 아들이며, 후에 다카의 나왓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 움메 조하라 베굼은 퀘시야 베굼 사히바로 개명되었다. 그들은 루후니사에게 사위와 딸이 죽은 후 기른 네 명의 손자와 딸들을 주곤 했다. 1787년 3월, 그녀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4명의 손자 손녀들의 추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연금을 늘려달라고 청원했다. 회사는 인상안을 거부했다. 벵골 나왑의 재산은 여전히 루후니사의 장인의 무덤을 유지하는 데 돈을 지불했는데, 루후니사는 그녀가 관리했다.[3][4]
죽음
루후니사는 1790년 11월 10일에 죽었다. 그녀는 남편의 곁으로 후슈바그에 묻혔다.[3]
대중문화에서
- 2018–19: 아미 시라제르 베굼, 스타 잘샤에서 방송되며, 그녀는 팔라비 데이가 연기한다.
참조
- ^ "The women in Siraj ud-Daulah's life". The Daily Star. 4 October 2012. Retrieved 6 November 2017.
- ^ Markovits, Claude (2004). A History of Modern India, 1480-1950. Anthem Press. ISBN 9781843310044.
- ^ a b c d Iqbal, Shahryar ZR. "Lutfunnisa Begum". Banglapedia. Retrieved 6 November 2017.
- ^ "Jinjira Palace: A tale lost in time". Prothom Alo.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7 November 2017. Retrieved 6 November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