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오카야스타케
Matsuoka Yasutake마츠오카야스타케 松岡康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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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
죽은 | 1923년 9월 1일 일본 가나가와시 하야마시 | ) 77)
국적 | 일본인입니다 |
직업 | 법학자, 내각 장관 |
배우자 | 고마로 미쓰코 |
아이들. | 마쓰오카 킨페이 |
상위 항목 | 마쓰오카 가쓰요시 |
마쓰오카 야수타케 남작(松岡山 yas, 1846년 8월 14일 ~ 1923년 9월 1일)은 전후 일본 제국의 법학자·내각부 장관이다.[1]
전기
마쓰오카는 아와 국(현대 도쿠시마 현) 출신으로, 아버지가 도쿠시마 번을 섬기는 사무라이였다.도메인 학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61년 에도로 진학하여 추가 공부를 하였고, 1863년에는 오사카로 진학하였다.메이지 유신에 이어 1870년 본국인 도쿠시마로 돌아와 현청 내의 관료로 자리를 얻었으며, 법률 고문도 겸하고 있다.1871년, 중앙정부에 채용되어, 법무부 내의 직책을 위해 도쿄로 자리를 옮겼다.이어 도쿄와 고베의 법원, 히로시마의 항소법원(1882년)에서 검사와 비서로 일했다.1886년 2월, 해외로 파견되어 프랑스와 독일의 법원 제도를 연구하였고, 1887년 11월 일본으로 귀국하여 야마다 아키요시 법무장관 산하에 모여 일본 민법 개선안을 초안하였다.마쓰오카는 1888년 2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임명되었다.1889년, 니혼 대학 법학전문대학원 설립을 도왔다.[2][3]
1890년 10월 마쓰오카는 도쿄 상고법원장이 되었다.1891년 6월 검찰총장직을 수락받았고, 같은 해 12월 일본 중의원 동료의원에 자리를 내주었다.1894년부터 1898년까지, 제2·3차 이토 정권에서는 마쓰오카가 내무부 차관을 맡아 수많은 위원회와 국에 참여하였다.[2]
사이온지 정부(1906–1908)에 따라 마쓰오카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었다.1917년 8월, 마쓰오카는 카조쿠 피에어 남작(단사쿠)의 칭호를 받았다.1920년 11월 추밀원에 입교하였으며, 1922년 3월 일본대학교 초대 총장에 임명되었다.간토 대지진 때인 1923년 9월 1일 가나가와 하야마의 집이 무너지면서 살해되었다.[3]
가족
마쓰오카는 고마 미쓰코와 결혼하여 1남인 마쓰오카 킨페이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를 두었다.[4]
명예
피어지
- 남작 (1917년 8월 14일)
궁정 순위
- Seventh rank (正七位上) - (1873)
- 주니어 4급(従四位下) - (1886)
- 주니어 3등급(従三位) - (1890)
- 상위 3위(高等 3급) - (1896)
장식
태양 금은별 훈장 (1886년 5월 29일)
성보 제3종 (1889년 12월 27일)
성보 제2종 훈장 (1891년 3월 30일)
성보 제1종 (1902년 6월 30일)
욱일승천장 그랜드 코르돈 (1906년 4월 1일)
파울로니아 꽃 훈장 그랜드 코르돈 (1915년 11월 10일)
참조
- ^ "Matsuoka, Yasutake - Portraits of Modern Japanese Historical Figures". www.ndl.go.jp. Retrieved 2018-12-20.
- ^ a b Matsuoka, Yasutake (1924). 退堂遺稿. 松岡氏. OCLC 36066456.
- ^ a b Takase, Nobuhiko (1998). 松岡康毅日記. 日本大学精神文化研究所. OCLC 674870043.
- ^ Kasumikaikan Compilation Committee (1996).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Yoshikawa Hirobunkan. ISBN 4642036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