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크루즈 푸트볼 클럽
Santa Cruz Futebol Clube![]() | |||
풀네임 | 산타크루즈 푸트볼 클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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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 코브라 코랄 (코랄 뱀) 오 마이스 케리도 (가장 사랑하는) 타임 드 게레로스 (전사의 팀) 타임 도 포보 (인민팀) Clube da Multidang (Crowd Club) | ||
설립됨 | 1914년 2월 3일 | 전 )||
그라운드 | 이스타디오 두 아루다 | ||
역량 | 60,044 | ||
대통령 | 호아킴 베제라 | ||
수석 코치 | 로베르토 페르난데스 | ||
리그 | 캄페오나토 브라실리루 세리 D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 | ||
2021 2021 | 세리 C, 20/19 (공개) 페르남부카노, 10/4 | ||
웹사이트 | 클럽 웹사이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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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크루즈 푸테볼 클럽(Santa Cruz Futebol Clube)은 페르남부코 레시페에 본사를 둔 브라질 프로 축구 클럽으로, 브라질 축구 4단인 세리 D와 페르남부코 주립 축구 리그의 최고 비행편인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에 출전한다.
역사
초기 역사
1914년 2월 3일, 14세에서 16세까지의 11명의 젊은이가 축구 협회를 설립하였다. 소년들이 산타크루즈 교회 마당의 거리에서 축구를 하곤 했기 때문에, 이 클럽은 레시페의 산타크루즈 거리에 위치한 그 교회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
회원들의 첫 공식 모임이 망게이라 2번지였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각 회원의 입장, "산타 크루즈 풋볼 클럽"의 이름, 그리고 사회의 색깔을 결정했다.
원래 색깔은 흑백이었다. 얼마 후 다른 지역팀(Sport Club Flamengo)이 이미 그런 색깔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색상 패턴이 바뀌었다. 따라서 클럽은 라크라이아라고도 알려진 테오필로 바티스타 데 카르발호(Teofilo Batista de Carvalho)의 제안으로 붉은색을 포함시켰다. 라크라이아는 산타크루즈 역사상 재단을 제외한 모든 주요 초기 행사에 참여했다.
첫 공은 호세 루이스 비에이라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구입되었고 8,500 리스의 비용이 들었다.
더비 평야에서 첫 경기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왔다. 당시 리오 네그로(블랙리버)를 7-0으로 꺾은 산타크루즈로 불리는 '소년팀'이 소집됐다. 리오 네그로는 또 다른 경기에서 복수를 요구했다. 이상하게도 복수의 조건은 실비오 마차도(1차전에서 5골을 넣은 것)가 뛸 수 없다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타크루즈는 도전을 받아들였다. 실비오 마차도를 대신한 칼린도는 6골을 넣었고 산타크루즈는 9-0으로 다시 이겼다. 그 후, 당시 매우 유명한 웨스턴 텔레그래프 컴퍼니 팀과의 승리는 산타 크루즈의 인기를 더욱 증가시켰다.
그 클럽은 첫해에 거의 폐회되었다. 일부 회원들은 클럽 펀드를 사탕수수 주스 추출기를 사는 데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알렉상드르 카르발호(위 멤버 참조)는 그런 공격적 제안을 격렬하게 못마땅하게 여겨 구단을 살렸다. 그는 "산타 크루즈는 영원히 살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했을 것이다.
20세기 초 레시페에서는 축구가 엘리트 스포츠로 여겨졌다. 주로 상류층 소년들과 레시페에서 운영하던 영국 회사 노동자들이 연주했다. 그 당시에는 인종차별이 흔했고 아프로브라질 사람들은 축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산타크루즈는 페르남부코에서 그들을 받아들인 첫 번째 팀이었다. 라크라이아, 처음이었어. 이 같은 사실은 브라질 인구에서 흑인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팀의 인기에 기여했다.
1915년, 브라질의 축구 경기에서 본 가장 위대한 복귀가 있었다. 아프리토스 경기장에서 산타크루즈는 아메리카(페르남부코)를 상대로 5대 1로 뒤졌지만 마지막 15분 동안 6골을 넣었다.
1917년, 이 클럽은 페르남부칸 축구 연맹의 옛 이름인 페르남부칸 스포츠 리그에 받아들여졌다.
1919년 1월 30일, 산타 크루즈는 말라키아스 필드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보타포고 팀을 3-2로 이겼다. 비행기의 선구자인 알베르토 산토스두몽은 레시페에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산타크루즈의 승리는 모두의 관심을 끌었다. 1월 31일, 조르날 페케노(소신문)는 "보타포고 푸테볼 클럽이 홈 보이들에게 3 대 2로 패한다"라는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북동부 북서부 팀이 브라질 남동부 지역의 팀을 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31년 12월 13일, 토레를 2-0으로 꺾고 산타 크루즈가 첫 주 우승을 차지했다. 타라와 셜록은 가장 중요한 선수였다.
1934년 10월 10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1934년 축구 월드컵에서 막 귀국한 브라질 대표팀은 페르남부코의 주요 팀들과 몇 차례 친선경기를 치렀다. 스포츠 레시페는 4-2로, 나우티코는 8-3으로 졌다. 산타크루즈도 3 대 1로 패했다. 선박 지연으로 브라질 팀은 리우데자네이루로 돌아가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산타크루즈는 리턴 매치를 요청했다. 이번에는 산타크루즈가 3 대 2로 이겼다.
2012년 5월 13일 산타크루즈는 스포츠클럽두레시페와의 경기에서 3x2로 승리했으며, 2012년 페르남부코 챔피언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산타크루즈는 더 큰 인기를 얻었다. 그 대부분은 산타크루즈가 우승한 펜타챔피언십 덕분이었다. 더욱이 산타크루즈가 내셔널 챔피언십에서 인상적인 성적을 거둔 이후, 마침내 페남부코 주를 넘어 클럽의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산타크루즈의 전국대회 참가는 1965년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플라멩고를 3-1로 꺾은 뒤 구단의 신뢰를 어느 정도 얻도록 이끌었다. 그 클럽은 내셔널 챔피언십의 첫 번째 무대에서 1위를 차지했다.
1972년 펠레는 산타크루즈와의 1000번째 경기를 치렀다.
1975년 산타크루즈는 북동부 팀으로는 처음으로 브라질 전국선수권대회에서 준결승에 올랐다. 12월 7일 열린 크루제이루와의 준결승은 크루제이로가 3-2로 승리하면서 끝이 났다. 구단은 4위(전국선수권대회 최고 성적)를 달성했다.
1978년과 1979년, 산타크루즈는 전국 대회에서 네 번째로 큰 무패 행진인 브라질 챔피언십에서 48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했다. 같은 해 산타크루즈는 전국선수권대회 2단계 출전권을 따낸 첫 번째 팀으로 승점 20점을 얻었다. 대회가 끝날 무렵에는 산타크루즈가 5위를 차지했다.
산타크루즈는 2011년까지 25번이나 퍼남부칸 챔피언십에서 득점왕에 올랐다.
1980년대 현재까지
1980년대 동안 산타크루즈는 1982년과 1989년 두 차례 전국선수권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이후 구단의 전국대회 성적은 떨어졌다.
1990년대 초 산타크루즈는 1990, 1993, 1995 세 개의 주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러나 내셔널 챔피언십 2부 리그에 있는 것은 종종 그러한 성과를 간과했다.
더구나 이듬해 산타크루즈는 대적과 5회 연속 챔피언의 지위를 나눠야 했다. 산타크루즈는 스포츠레시프가 5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럼에도 1996년 마우리시오는 13골로 2부 리그 브라질 챔피언십 득점왕에 올랐다.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 2006 vs 결승전 이후. 스포츠가 우승을 차지한 스포츠는 새로운 쇠퇴를 경험했다. 2006년 2부 리그로 강등되었다가 2007년 약체 선거운동을 거쳐 3부 리그로 강등되었다. 최근 하락세에는 1라운드에서 약체 팀들에 의한 코파도 브라질 2007년과 2008년 탈락, 7차전에서 강등에서 탈출한 하위 6위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의 육각형 다 모테가 무너졌다.
가을을 이어간 2008년 9월, 또 한 번의 약세운동 끝에 이번에는 산타크루즈가 3부 리그에서 4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3년 만에 처음으로 1부 리그에서 4부 리그로 추락한 클럽이 되었다.
하지만, 2011년에 산타 크루즈는 반응을 시작했다. 이 클럽은 상파울루에 의해 코파도 브라질에서 탈락했다. 산타크루즈는 1차전에서 1-0으로 이겼지만 2차전에서 2-0으로 졌다. 5월 15일, 산타 크루즈는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에서 우승했다. 결승전은 스포츠 레시페를 2-0으로 대파했고, 2011년 브라질 축구에서 아루다는 리우데자네이루 출신의 플라멩고, 상파울루 출신의 코린치안스 같은 팀을 제치고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기호
컬러스
그 클럽의 원래 색깔은 흑백이었다. 그러나 당시 페르남부칸 스포츠 리그는 같은 색깔의 다른 클럽의 참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스포츠 클럽 플라멩고의 컬러 패턴과 차별화하기 위해 레드 컬러가 도입되었다.
산타크루즈는 오 트리콜로르(The Triicolor)로도 알려져 있고, 팬들도 트리콜로레스로 알려져 있다.
배지
원래의 배지(여기에 묘사되지 않음)는 라크라이아로 불리는 테오필로 바티스타 데 카르발호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클럽 패턴에 빨간색이 포함된 것도 라크라이아 덕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배지 디자인이 수정되고 업데이트되었다. 그러나 라크라이아의 원래 개념은 크게 수정되지 않았다.
현재의 배지에는 여러 개의 별이 들어 있다. 상위 3색 별은 산타크루즈가 우승한 3개의 슈퍼챔피언십을 상징한다. 아래쪽 금빛 별은 펜타챔피언십을 상징한다.
마스코트
세 가지 색이 채택되면서 산타 크루즈의 줄무늬 저지대는 코랄 뱀을 닮았다. 이 때문에 이 팀은 팬들에 의해 코랄로 알려져 있다.
애국가
그 클럽의 공식 국가는 팬들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루렌소 다 폰세카 바르보사(카피바)의 오 마이스 퀘리도(The Dearest One)라는 이름의 행진곡은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사실상의 국가다.
스타디움
이 팀의 경기장은 레시페 자치구인 아루다에 있다. 경기장의 공식 명칭은 레시페 전 시장의 이름을 따서 에스타디오 호세 두 레고 마키엘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스타디오 두 아루다(아루다 스타디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팬들은 그것을 Arrudang (Big Arruda) 또는 Mundang do Arruda (Great Land of Arruda)라고 부른다.
1982년 4월 1일 경기장은 개선과 증축으로 다시 개장되었다. 당초 6만4000명 규모에서 최대 수용인원은 11만명으로 추산됐다. 그러나 안전상의 이유로 1994년 3월 23일 브라질 대 아르헨티나의 경기에서 지금까지 최대 관중은 9,200명이다. 이후 공식 경기장은 60,044명으로 줄었다.[1]
이 경기장은 또한 Republicas Independentes do Arruda(아루다의 독립 공화국)로도 알려져 있다.
업적
국제 블루 리본 1979
- 토르네오 육각형 북노르데스트 데 1967년
- 캄페오나토 페르남부카노(페르남부코 주 챔피언십): 29
- 토르네이오 이니시오(페르남부코 스타트 토너먼트): 12
- 1919, 1926, 1937, 1939, 1946, 1947, 1954, 1956, 1969, 1971, 1972, 1976
- 코파 페르남부코(페르남부코컵): 5
- 2008, 2009, 2010, 2012, 2019
슈퍼챔피언십
페르남부칸 축구 선수권 대회는 보통 세 바퀴로 나뉜다. 턴마다 작은 우승 그 자체다. 한 팀이 세 바퀴를 모두 이기면 자동으로 챔피언으로 선언된다. 한 팀이 2바퀴를 돌고 다른 팀이 남은 턴을 이기면 챔피언결정전은 마지막 플레이오프다. 일반적으로 플레이오프는 2경기 또는 3경기로 구성된다. 하지만 세 팀이 한 차례씩 이기면 이 대회에는 슈퍼챔피언십이라는 플레이오프(play-off)가 붙는다. 슈퍼챔피언십은 각 턴의 3명의 우승자 중 플레이오프로 구성된다. 슈퍼챔피언십은 드물고 매우 명성이 높다.
블루 리본. 블루리본은 브라질 축구 연맹(Confederazang Brasileira de Futebol – CBF)이 수여하는 권위 있는 상이다. 패배하지 않고 해외 투어를 떠나는 팀들은 이런 인정을 받을 자연스런 후보들이다.
중동에서는 산타크루즈가 국가대표팀과 경기를 했다.
산타크루즈도 경기를 했다.
- 알아임(0–3)
- 나세르 스포츠 클럽(2–6)
-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힐랄(0–3)
유럽에서는 두 경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루마니아 대표팀(2–4), 두 번째는 파리 생제르맹(2–2)과의 경기였다.
라이벌
산타크루즈는 레시페 시 내에 두 개의 주요 경쟁상대가 있다.
산타크루즈와 스포츠의 경쟁은 클라시코 다스 멀티데스로 알려져 있으며, 산타크루즈와 나우티코의 경쟁은 클라시코 다스 에모세스로 알려져 있다.
현 분대
참고: 국기는 FIFA 자격 규정에 따라 정의된 국가 대표팀을 나타낸다. 선수들은 둘 이상의 비FIFA 국적을 보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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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저명한 코치
리카르도 디에즈 (1959년)
에바리스토 데 마케도(1972년)
파울로 에밀리오(1973), (1975)
에니오 안드라데 (1977년)
에바리스토 데 마케도(1977–79)
파울루 에밀리오 (1980년)
카를로스 알베르토 실바(1983~84)
로리 산드리 (1984)
파울리뉴 데 알메이다 (1987년)
모이스 (1987년)
아벨 브라가 (1987–88)
지바닐도 올리베이라(1989~90)
발미르 루루즈 (1994년)
페리클레스 샤무스카(1996)
지바닐도 올리베이라(1998-99년)
오타실리오 곤살베스(1999-02)
헤론 페레이라(2002)
페리클레스 차무스카(2002-04)
로베르발 다비노(2004)
지바닐도 올리베이라(2004-06), (2006)
발디르 에스피노사(2006)
르네 시메스(2006)
지바(2006)
에바리스토 데 마케도(2007)
마우로 페르난데스(2007)
리카르도 로차(2008)
마르시오 비트코트(2008-09)
다도 카발칸티(2009-10)
로리 산드리(2010년)
지바닐도 올리베이라(2010년)
제 테오도로(2011-12년)
마르셀로 마르텔로트(2013년)
비카(2013-14년)
세르지오 게데스(2014년)
리카르디뉴(2015년)
마르셀로 마르텔로트(2015-16)
밀턴 멘데스(2016년)
도리바(2016년)
비니시우스 에우트로피오(2017년)
지바닐도 올리베이라(2017년)
마르셀로 마르텔로트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