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쓰나

Tokugawa Ietsuna
도쿠가와 이에쓰나
Tokugawa Ietsuna.jpg
도쿠가와 이에쓰나
쇼군
재직중
1651–1680
모나크
선행자도쿠가와 이에미쓰
성공자도쿠가와 쓰나요시
개인내역
태어난(1641-09-07)7. 1641년 9월
죽은1680년 6월 4일 (1680-06-04) (38세)
상위 항목
서명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義una, 1641년 9월 7일 ~ 1680년 6월 4일)일본 도쿠가와 왕조의 네 번째 쇼군으로서 1651년부터 1680년까지 재임하였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손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증손자가 되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남으로 꼽힌다.

조생 (1641–1651)

도쿠가와 이에쓰나는 1641년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장남으로 후궁 오라쿠노 가타후후후후후후후인(後後仁)과 함께 태어났다고 한다. 후에 이에쓰나는 이에미쓰의 첩인 오만노카타(가운데 에이코인)와 후에 혼리인 다카쓰카사에 의해 여동생 치요히메(오푸리 출생)와 함께 양육되었다. 에이코인이 은퇴한 후 센히메(텐주인이라고도 함)는 혼리인과 함께 그를 키웠다.[1] 당시 그의 아버지는 스스로 쇼군이었으며 1637년의 피비린내 나는 시마바라 반란 이후 여러 차례 반 기독교적 조치를 제정했었다. 비록 이 반란의 진압이 도쿠가와 통치에 대한 모든 심각한 위협을 진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확실치 않은 시대였다. 이에쓰나는 연약한 아이였고, 이것은 그의 성년으로 이어졌다. 그밖에 그의 젊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릴 적 이름은 다케치요(太治yo)이다.

가족

  • 아버지 : 도쿠가와 이에미쓰
  • 어머니: 호주인 (1621–1653)
  • 양어머니 : 에이코인 (1624–1711)
  • 아내: 아사노 미야 아키코(1640~1676) 후기 코게인
  • 첩:
    • 오요노카타 (d. 1657년)
    • 오푸리노카타(1649~1667) 후기 요순인
    • 오시마노카타(d. 1660년)
    • 미쓰루노카타(1660~1690) 후기 엔묘인
    • 오나쓰노카타(1680년) 후기 혼주인
    • 오키쿠노카타
    • 오후지노카타나후요코인
    • 오코토노카타나후 젬요인
    • 오란노카타
    • 오미노카타 (d. 1679년)
    • 오스미노카타
    • 요시노노카타 (1680년경)
  • 어린이:
    • 아들 (1667년 자궁에서 죽음)에 의해 오푸리에 의해
    • 1660년 오시마의 딸
    • 요시노가 낳은 아들 (1680년 자궁에서 죽었다)
  • 양녀: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딸 나오히메

쇼군 섭정 (1651년–1663년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1651년 초,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도쿠가와 왕조는 중대한 위기에 처했다. 후계자인 이에쓰나는 겨우 열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나모토노 이에쓰나는 게이안 4호(1651)에서 쇼군이 되었다.[2] 그가 성년이 될 때까지 5명의 섭정이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통치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쇼군 이에쓰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쿠후 관료의 정식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섭정들은 쇼군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했다.[1] 이들은 사카이 다다카쓰, 사카이 다다키요, 이나바 마사노리, 마쓰다이라 노부쓰나(도쿠가와 먼 사람) 등이었다. 이 섭정 외에도 이에미쓰가 이복동생 호시나 마사유키를 손으로 뽑았다.

쇼군 이에쓰나와 섭정이 제일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은 로닌(마스터리스 사무라이)이었다. 쇼군 이에미쓰 때 두 사무라이인 유이 쇼제츠마루바시 주야는 에도 성을 불태우고 혼란 속에서 에도 성을 급습하여 쇼군, 도쿠가와 일원과 고위 관리들을 처형하는 봉기를 계획해 왔다. 교토오사카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쇼세쓰 자신도 미천한 태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우상처럼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이에미쓰가 죽은 후 밝혀졌고, 이에쓰나의 섭정들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잔혹했는데, 는 게이안 봉기 또는 '토사 음모'[3]로 알려지게 되었다. 추야는 그의 가족, 쇼시쓰의 가족과 함께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쇼세츠는 붙잡히기보다는 세푸쿠를 택했다.

1652년 약 800로닌사도섬에서 작은 소동을 일으켰고, 이 또한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에쓰나 통치의 나머지 부분은 정부가 좀더 민간인 지향적이 되어감에 따라 로닌에 의해 더 이상 방해받지 않았다.

메이레키 3호(1657년)에서는, 이에쓰나가 20세가 다 된 1월 18~19일에 에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시가지를 전소했다. 이에쓰나의 첩 오요가 불에 타 죽었다.[4] 도시를 재건하는 데 2년이 걸렸고 바쿠푸 공무원들은 도시의 재건을 감독했다. 1659년, 이에쓰나가 개회식을 주재하였다. 11개월째에 후시미노 미야 사다키요의 딸 아사노 미야 아키코와 결혼했다. 아이는 없었지만 아사노 미야와의 관계는 꽤 좋았다고 한다. 도쿠가와 미쓰토모의 딸 나오히메를 입양했다.

바쿠후 권력투쟁(1663–1671)

1663년, 쇼군 이에쓰나에 대한 섭정은 끝났지만, 그를 위해 섭정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바쿠후 뒤의 권력이 전 쇼군이 아니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에쓰나의 수석 고문은 이제 호시나 마사유키, 이에쓰나의 삼촌(그는 깊은 배려를 했다) 이타쿠라 시게노리, 쓰치야 카즈나오, 쿠제 히로유키, 이나바 마사노리였다. 비록 이제 이에쓰나가 자신의 권리로 통치하고 있었지만, 이 이전의 섭정들은 이제 그의 공식적인 조언자가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그를 위해 행동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사무라이가 영주를 따라 죽음으로 치닫는 준시를 폐지하자는 생각을 떠올릴 때처럼 이에쓰나(Ietsuna)가 스스로 행동하기도 했다.

센다이 다테 가문이 후계 분쟁에 휘말렸던 1671년에도 이런 예가 있다. 바쿠후가 개입하여 오닌 전쟁이 다시 재연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1671년경에는 이전의 섭정들 중 많은 수가 죽거나 은퇴했으며, 이에쓰나는 자신의 권리로 통치하기 시작했다.

쇼군 (1671년–1680년)

다테의 계승 분쟁에 이어 이에쓰나의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일부 반항적인 다이묘를 제외하고는 거의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1679년 쇼군 이에쓰나가 병에 걸렸다. 사카이 다다키요가 적극적으로 나선 그의 후계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는 후기 가마쿠라 쇼군들의 전례를 따라 고사이 천황의 아들이 다음 쇼군이 될 것을 건의했는데, 실제로는 혈족이었다. 타다키요는 아마 자신을 호조 섭정처럼 강대해지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도쿠가와 혈통의 많은 구성원들은 쇼군 이에미쓰의 아들이기도 한 쇼군 이에쓰나의 동생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선호하여 쇼군이 되었다.

  • 1680년 6월 4일(5월 8일, Enpo 8일): 쇼군 이에쓰나가 죽고, 쓰나요시가 쇼군으로서 계승하고 있다.[5]

타다키요는 당황하여 은퇴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1680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시호는 겐유인(厳ū人)으로 간에이지에 묻혔다.[6] 동생 쓰나요시가 뒤를 이었다.

비록 이에쓰나가 유능한 지도자라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이에쓰나가 자신의 권리로 통치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고 선언된 이후에도, 정세는 그의 아버지가 임명한 섭정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에쓰나 바쿠푸의 에라스

이에쓰나가 쇼군이었던 해는 둘 이상의 연호넨고로 더 구체적으로 확인된다.[7]

조상

메모들

  1. ^ a b c 누스바움, 루이 프레데릭 (2005). 구글북스일본 백과사전 페이지 977, 페이지 977의 "토쿠가와, 이에쓰나"; n.b, 루이스-프레데릭은 루이스-프레데릭 누스바움의 필명으로, 오늘 보관소에 보관된 2012-05-24 도이치 국립비블리오텍 당국 파일참조하라.
  2. ^ Titsingh, I. Annales des empeerurs du Japon, 페이지 412.
  3. ^ 스크리치, T.(2006년). 쇼군 비밀 회고록: 아이작 티싱과 일본, 1779–1822. 페이지 85–89.
  4. ^ Titsingh, 페이지 413.
  5. ^ Titsingh, 페이지 414.
  6. ^ 켐퍼의 일본: 구글 북스에서 관찰한 도쿠가와 문화, 494페이지
  7. ^ Titsingh, 페이지 410-412.
  8. ^ "Genealogy". Reichsarchiv (in Japanese). Retrieved 4 July 2018.

참조

군청
선행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

1651–1680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