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나리아키

Tokugawa Nariaki
도쿠가와 나리아키
Tokugawa Nariaki.jpg
도쿠가와 나리아키
미토 9대 군주
재직중
1829–1844
선행자도쿠가와 나리노부
성공자도쿠가와 요시아츠
개인내역
태어난(1800-04-04)1800년 4월 4일
죽은1860년 9월 29일 (1860-09-29) (60)
국적일본인입니다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家 nari, 1800년 4월 4일 ~ 1860년 9월 29일)는 일본의 저명한 다이묘로 미토 (현 이바라키 현)을 다스리며 민족주의의 발흥과 메이지 유신에 공헌하였다.

전기

"Flower"
"Moon"
"Snow"
(L-to-R)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꽃」 「달」 「눈」의 서예

클랜 리더

나리아키는 미토의 7대 다이묘도쿠가와 하루토시(川家川하루토시)의 3남이다. 가문의 우두머리는 먼저 하루토시의 장남 나리노부에게 넘어갔다가 1829년 나리아키에게 넘어갔다.[1] 나리아키도 조이(야만인을 제명) 당수를 지냈고, 바쿠후 국방 고문을 만들었다.[2] 어릴 적 이름은 토라사부로(虎虎郎)로, 후에 게이사부로(敬敬uro)로 바뀌었다.

바쿠후 관원

나리아키는 외국인 침탈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바쿠푸의 노력을 담당하게 되었다. 바쿠푸가 군사력을 강화하고 외국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독자적인 견해였고, 이이 나오스케와 이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다. 그는 친제국주의자였고 제국주의 복원을 선호했다. 나리아키도 도쿠가와 미쓰쿠니에 의해 설립된 미토가쿠 학파를 크게 확장했다. 그는 1853년 '일본, 서양인을 배척하라'는 제목의 문서를 작성했다. 그는 이 문서에서 일본이 세계로부터 고립되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일본 국민은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서양인들이 일본의 일에 개입하지 않도록 전쟁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나리아키는 서구화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쿠가쿠 학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 히라타 아쓰타네의 제자 오쿠니 다카마사는 일본의 국경을 보호하고 제국으로 일본을 확장하기 위해 의례와 기술을 결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이는 일본의 '국민정신'[3]을 되살리는 데 달렸다. 따라서 오쿠니와 나리아키는 메이지 유신은 물론 국가 신토의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3]

나리아키와 나오스케는 아들 요시노부에게 나리아키와 함께 쇼군 이에사다의 뒤를 누가 계승할 것인가를 놓고 싸웠다. 결국 승리한 나오스케는 와카야마다이묘 도쿠가와 요시토미를 총애했다.

레거시

1841년, 나리아키는 오늘날까지 명성이 지속되는 정원인 가이라쿠엔을 지었다.

나리아키는 1844년 아들 요시아쓰에게 유리하게 은퇴하였고, 1860년 6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860년대의 주요 인물 중 세 명은 사실 자연형제였으며, 모두 나리아키의 아들이었다. 1866년 도쿠가와 요시노부로 15번째이자 마지막 쇼군이 된 히토슈바시 요시노부, 미토의 도쿠가와 요시아쓰, 이나바(돗토리)의 이케다 요시노리.[4]

가족

  • 아버지 : 도쿠가와 하루토시
  • 어머니:도야마도노
  • 아내 : 아리수가와요시코(1804–1893)
    • 첫째 아들: 도쿠가와 요시아쓰(1832–1868)
    • 둘째 아들: 지로마로(1833–1834)
    • 5번째 딸: 미히메 (1835–1835)
    • 7대손: 도쿠가와 요시노부
  • 첩: 하리가와도노
    • 첫째 딸:마사히메(1822–1839)
    • 둘째 딸: 이로모토히메(1825–1826)
    • 셋째 딸: 이와히메(1827–1853)는 야마노베 요시마사와 결혼했다.
  • 첩: 오나오노카타
    • 넷째 딸: 히로히메(1834–1835) b
    • 넷째 아들: 시로마로(1835–1836)
    • 7번째 딸: 요히메(1837–1843)
    • 7대손: 마쓰다이라 나오요시(1839~1862)
    • 8번째 딸: 이치요히메(1840–1843)
    • 손=하마다 번 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1842~1882)
    • 13대 아들: 요시아만노(1844–1844)
  • 첩: 사다코
    • 셋째 아들: 사부로마로마(1835–1837)
    • 6번째 딸: 마츠히메(1836~1903)는 난부 도시히사와 결혼했다.
    • 5번째 아들: 돗토리 번 이케다 요시나리(1837~1877)
    • 9번째 아들: 오카야마 번 이케다 모치마사(1839-1899)
    • 9번째 딸: 다카코(1841년 ~ 1869년)는 다테 요시쿠니와 결혼했다.
    • 제12대 아들 요니마로(1844-1844)
  • 첩: 야나기하라도노
    • 6번째 아들: 로쿠로마로(1837-1838)
  • 첩: 토시코
  • 첩: 무츠코
  • 첩: 토쿠코
    • 15대 아들: 요고마로(1849~1849)
    • 16대손: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 12번째 딸: 아이히메(1852~1914)는 이노우에 마사요리와 결혼했다.
    • 21대손 : 이치마루(1856~1856)
  • 첩: 미치코
    • 13번째 딸: 히사히메 (1853년 ~ 1853년)
  • 첩: 에츠코

작동하다

도쿠가와 나리아키 작사

사후 발행:

  • Kōdōkan ki 弘道館記 (1937). 《메이지 세이토쿠 키넨 가카이》의 에드. 도쿄: 메이지 세이토쿠 키넨 가카이 明治德念會會會會會會會.
  • Meikun ippanshō 明君一斑抄 (1910–1911). 에드는 쿠로카와 마미치 黒真道의 작품이다. 도쿄:도분칸 同文館.

명예

메모들

  1. ^ 徳川斉昭
  2. ^ 맥오미, 윌리엄 더 오프닝, 1853–1855 (Folkstone, Global Oriental, 2006), 페이지 138
  3. ^ a b c Josephson, Jason Ā. (2012). The Invention of Religion in Japa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125, 128. ISBN 9780226412351.
  4. ^ 비즐리, 윌리엄 (1955). 일본 외교 정책에 관한 문서, 1853–1868. 페이지 11n3을 선택하십시오.

참고 항목

참조

이 글에는 OpenHistory의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다.

추가 읽기

  • 코바야시 겐지 小健二(1998년). 도쿠가와 나리아키부터 한샤로 徳斉と to to까지. 도쿄: 소에이 슈판 創栄版版.
  • 람베티, 매튜 5세(1968년). 1800–1860년 미토의 도쿠가와 나리아키에 대한 정치 연구. 뉴욕: 컬럼비아 대학. (마이크로필름)
  • Ōniwa Kunihiko 大庭邦彦 (1997). Chichi yori Yoshinobu dono e: Mito Nariaki Hitotsubashi Yoshinobu ate shokanshū 父より慶喜殿へ: 水戶斉昭一橋慶喜宛書簡集. 도쿄: 슈에이샤 集社社.

외부 링크

왕실의 직함
선행자 미토 다이묘
1829–1844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