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R. E. 머피
W. R. E. Murphy윌리엄 리처드 잉글리시 머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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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E Murphy, Wills의 시가렛 카드에 묘사된 것처럼. | |
태어난 | 1890 |
죽은 | 1975 |
서비스/지점 | 영국 육군 아일랜드 공화국군 국민군(아일랜드) |
순위 | 총사령관 |
전투/와이어 | 제1차 세계 대전 |
수상 | 공로훈장 밀리터리 크로스 |
W.R.E. Murphy로 알려진 DSO MC William Richard English-Murphy는 아일랜드의 군인이자 경찰이었다.[1]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 육군의 장교로, 후에 국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남북전쟁에서 그는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국군의 총지휘를 맡았다.그는 1925년 가르다 시오차나와의 합병 전 더블린 경찰 최초의 아일랜드 경찰청장이자 마지막 군청장이었다.그 후 1955년 은퇴할 때까지 가르다이 부청장을 지냈다.
영국 육군
머피는 1890년 1월 26일 웩스포드에서 태어났다.[2]그의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그와 그의 여동생 매는 벨파스트에서 친척들에 의해 길러졌다.그는 퀸즈 대학교 벨파스트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하고 있을 때 존 레드몬드의 부름에 따라 전쟁 노력에 동참하고 아일랜드 독립을 보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Ulster Region은 그가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그를 거절했다.아일랜드 자원 봉사자들을 존중하여 대우하는 연대를 구하여 1915년 벨파스트의 영국 육군에 남스텝퍼드셔 연대의 장교 사관 생도로 입대하였다.[3]
1915년 로스 전투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1916년 7월 솜메 전투의 시작을 위해 다시 전투에 복귀하였다.그는 1918년 8월 제1대대대, 남스태퍼드셔 연대의 지휘관이 되어 임시 중령 계급에 올랐다.1918년 그의 연대는 1918년 11월 4일 휴전 선언 당시 피아베 강에서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되었다.그는 1922년 5월 16일 은퇴자 명단에서 실질적인 중령 계급장을 받았다.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온 후 교사 생활을 재개했다.어느 순간 그는 아일랜드의 영국 통치를 끝내기 위해 싸우는 게릴라 조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에 입대했다.[4]
내전
1921년 12월 영국과 아일랜드 지도자들 사이에 앵글로-이리쉬 조약이 체결되어 아일랜드 자유국이 설립되었다.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조약에 대한 갈등은 결국 1922년 6월에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1922년 머피는 아일랜드 자유주의 새로운 국군에 장군으로 입대했다.남북전쟁이 시작된 후, 그는 리머릭에서 반 토벌군 IRA에 의해 점령된 혐의로 기소된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7월 킬몰록 전투에서1922년 8월, 그는 어인 오더피에 이어 2등이었다.[5]그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리머릭의 킬몰록 주변의 위치에서 반 토벌 IRA를 몰아냈지만 머피는 신속한 공격 행동보다는 '디자인(dig in)'하고 참호전에 의존하는 성향을 보여 비난을 받았다.[6]
이후 1923년 1월까지 케리 카운티에서 자유주군을 총지휘하게 되었다.그는 최고 사령관인 리처드 멀카히에게 250명의 추가 병력을 요청하여 그의 지휘권을 1,500명까지 끌어올리고 게릴라 저항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게릴라전 초기에 그는 서부 코르크와 케리 동부의 공화당의 집중도를 깨기 위해 대규모의 '스위프'를 조직했다.그러나 이들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7]머피는 카운티에서 전반적인 지휘권을 행사했지만 일상적인 작전은 주로 더블린 경비대의 패디 댈리 준장이 맡았다.[8]
10월에, 그의 부대에 대한 게릴라 공격을 계속하는 것에 대응하여, 머피는 매일 밤 10시 30분부터 5시 39분까지 트랄리에 통행금지를 실시하도록 명령했다.[9]
머피는 지난해 12월 멀카히에게 "여기 있는 비정기적인[항치적인] 조직은 거의 해체되어 있다"고 적으며, 이 카운티에서의 전쟁이 종식될 것을 시사했다.그러나 그의 낙관적인 예측은 시기상조였다.[10]
12월 20일 머피는 무기와 탄약을 소지한 혐의로 공공안전법에 따라 붙잡힌 네 명의 공화당 전투기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그러나 현지 게릴라 활동이 중단되면 형량은 취소하기로 했다.IRA 여단장인 험프리 머피는 이들이 처형될 경우 보복으로 8명의 정부 지원자들을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결국 그들의 형량은 형벌로 감형되었다.[11]
1923년 1월, 머피는 케리에서의 지휘에서 "국가 차원의 작전과 조직에 대한 책임"으로 진급되었다.패디 댈리는 케리에서 지휘관으로 취임했다.머피는 이후 달리가 1923년 3월 발리세이드 대학살과 다른 사건에서 반독재 포로 30명이 카운티에서 살해된 것을 볼 때 나쁜 선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12]
경찰 경력
머피는 1923년 5월 남북전쟁이 끝난 뒤 국군을 떠나 아일랜드 최초의 더블린 메트로폴리탄 경찰국장이 되었다.그는 후에 가르다 시오차나의 부청장이 되었는데, 이때 DMP는 1925년 새로운 국가경찰대와 통합되었다.그는 1955년 은퇴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2][13]
머피는 1920년대 초 더블린의 붉은 빛 구역인 몬토를 폐쇄하기 위한 노력의 최전선에 있었다.1923년에서 1925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 조직인 레지오트 오브 메리(Legion of Mary)의 프랭크 더프(Frank Duff)와 드바인(Fr. R.S. Devane)이 이끄는 종교 사절단은 사창가를 폐쇄하기 위해 일했다.이들은 더블린 경찰서장 역할로 머피의 협조를 받았으며, 1925년 3월 12일 경찰의 급습으로 120명이 체포되고 사창가가 폐쇄되는 등 선거운동은 끝났다.[14]
머피는 아일랜드 아마추어 복싱 협회 회장 시절에도 그 직책을 맡았다.[15]
그는 1975년에 죽었다.
참조
- ^ "아일랜드 장군: 윌리엄 리처드 잉글리시 머피, 1890–1975", 칼 머피, 역사 아일랜드, 13권, 6권(2005년 11월 – 2005년 12월), 페이지 10–11
- ^ a b "John P. McMahon Home Page". Jmcm01.home.comcast.net.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3 July 2008. Retrieved 2 August 2010.
- ^ 문스터 공화국 마이클 해링턴 p58
- ^ 니올 C 해링턴, 케리 랜딩, p37
- ^ 마이클 홉킨슨, 그린 어라운드 그린, p151
- ^ 마이클 해링턴, p58
- ^ 홉킨슨 p 204
- ^ 톰 도일, 케리 남북전쟁, p188
- ^ 도일, p201
- ^ 도일 p232
- ^ 도일, p235-236, 240
- ^ 도일 p240-241
- ^ 도일 p240
- ^ Armstrong, Maggie (14 June 2011). "The Bloomsday world tourists never get to hear about". Irish Independent. Retrieved 15 December 2012.
- ^ [1] 2009년 3월 2일 웨이백 머신에 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