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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전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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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통 당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성내 주민들 역시도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운전수는 교토시전의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하였다. 승차권은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하였으며, 특별히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한다.
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통 당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성내 주민들 역시도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운전수는 교토시전의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하였다. 승차권은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하였으며, 특별히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통 후 10일째 되는 날 종로2가쯤에서 다섯 살된 아이가 전차가 치어 죽는 일이 벌어졌다.<ref>{{뉴스 인용
그러나 개통 후 10일째 되는 날 종로2가쯤에서 다섯 살된 아이를 전차가 치어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아이의 아버지가 이를 보고 도끼를 빼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차량에 달려들었다. 당시 시내에 전차로 인해 가뭄이 일어난다는 둥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반응이 과격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장과 운전수는 요행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전차는 파괴, 전소되었다. 이후 다른 전차 역시 수난을 당하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동은 곧 진정되고, 이러한 폭동 발생에 대해 조야에서는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전차 종업원은 운행 자체를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의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그리고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겪어, 일본인 종업원은 전원 철수하였으며, 이로 인해 5개월간 운휴하게 되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측은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급거 모집하여 9월 말 경에 운행을 재개하였다.
|제목 = AMERICAN WORK IN KOREA.; The United States Minister to the Hermit Nation Talks -- Bad Start of a Trolley Road.
|url = http://query.nytimes.com/mem/archive-free/pdf?res=9A06E4DD173DE433A2575BC1A9619C94689ED7CF
|출판사 = [[뉴욕타임즈]]
|작성일자 = 1899-07-18
|확인일자 = 2007-10-10
|언어 = {{언어고리|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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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아이의 아버지가 이를 보고 도끼를 빼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차량에 달려들었다. 당시 시내에 전차로 인해 가뭄이 일어난다는 둥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반응이 과격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장과 운전수는 요행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전차는 파괴, 전소되었다. 이후 다른 전차 역시 수난을 당하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동은 곧 진정되고, 이러한 폭동 발생에 대해 조야에서는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전차 종업원은 운행 자체를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의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그리고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겪어, 일본인 종업원은 전원 철수하였으며, 이로 인해 5개월간 운휴하게 되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측은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급거 모집하여 9월 말 경에 운행을 재개하였다.
이후 전차사업은 그 추위와 비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고 의자 역시 나무의자로 불편했으나,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선로 연장 요구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개통 당해에 운행 계통을 [[남대문]]까지 연장하였고, 그 이듬해(1900)에 남대문에서 구 용산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여, 공사를 실시, 운행을 개시하였다. 특히 구 용산까지 연장하면서, 용산의 포구로부터 성내까지 화물 수송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서대문까지의 연장, 그리고 남대문에서 서소문 간을 의주로를 따라 운행하는 루트가 추가되었으나, 승객이 많지 않아 2~3년 뒤에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노선 연장 과정중 특히 서대문 연장 시에는 당시 부설된 경인철도주식회사의 [[경인선|경인철도]]와의 평면 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측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외교적 노력에 의해서 무마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 광무8년(1904)에 그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이후 전차사업은 그 추위와 비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고 의자 역시 나무의자로 불편했으나,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선로 연장 요구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개통 당해에 운행 계통을 [[남대문]]까지 연장하였고, 그 이듬해([[1900년]])에 남대문에서 구 용산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여, 공사를 실시, 운행을 개시하였다. 특히 구 용산까지 연장하면서, 용산의 포구로부터 성내까지 화물 수송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서대문까지의 연장, 그리고 남대문에서 서소문 간을 의주로를 따라 운행하는 루트가 추가되었으나, 승객이 많지 않아 2~3년 뒤에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노선 연장 과정중 특히 서대문 연장 시에는 당시 부설된 경인철도주식회사의 [[경인선|경인철도]]와의 평면 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측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외교적 노력에 의해서 무마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 광무8년([[1904년]])에 그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2007년 10월 10일 (수) 11:38 판

서울전차(서울電車)는 1899년부터 1968년까지 서울 시내에서 운행하던 노면전차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해방 이후 운영을 담당한 경성전기주식회사(현재의 한전) 전차사업임을 밝혀 경전(京電)또는 경전전차(京電電車)로도 부르기도 한다. 경성궤도(京城軌道)와는 다른 궤도 노선으로, 경성궤도와 관련된 사항은 해당 항목에 다루도록 한다.

개요

  • 노선 연장 : 총 40.6km[1]
  • 운영 기관 : 한국전력(폐지시점 기준)
  • 궤간 : 1067mm(협궤)
  • 통행 방식 : 좌측통행
  • 역 수 : 72(폐지시점 기준)
  • 복선 구간 : 불명
  • 전철화 구간 : 전 구간, 600V DC

역사

서울전차의 역사는 크게 초창기인 대한제국기(1899~1909), 일본회사 인수 후 부터 일제강점기 기간(1909~1945), 그리고 해방 이후부터 폐선까지의 기간(1946~1968)으로 구분할 수 있다.[2]

대한제국기

서울전차의 부설은 한국에 전기도입 사업의 부대사업으로서 이루어졌다. 1898년에 경성(지금의 서울) 일대의 전력공급권 사업권을 취득하고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개업한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위크(H.R. Bostwick)가 전력의 주요 소요처로서 전차 부설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전차의 도입 과정에서 콜브란 등은 고종황제의 홍릉 행차시에 신하를 다수 동행해야 함으로 인한 재정 낭비와 불편함을 전차로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하여 그 허가를 얻고, 황실로부터의 투자를 획득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계약이 체결되자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들여 공사를 시작,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5마일(약 8km) 길이의 단선궤도전차선을 1898년에 착공, 부설하였다.

이후 75kW급 직류 600V 발전기 및 100마력 증기기관을 동대문 안쪽에 설치를 마치고, 차량의 조립도 순조로워 1899년 5월 17일, 음력 4월 초파일에 개통식을 가지고 운행을 개시하였다. 서울전차의 개통은 당시 아시아 지역에서는 교토에 이은 두번째였으며, 수도에 부설된 것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당시 전차는 40인승 차량 8대와 황실전용 귀빈차 1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개통 당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성내 주민들 역시도 매우 반응이 좋아서 개통 당일 운행에 지장이 발생할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생업을 잊고 전차만 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방에서 전차를 타기 위해 상경하는 사람도 많아 파산자가 속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당시 운전수는 교토시전의 일본인 경력자 중에서 선발하였으며, 차장은 한국인을 채용하였다. 승차권은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하였으며, 특별히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승객이 요구하면 차를 세우고 여객을 취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통 후 10일째 되는 날 종로2가쯤에서 다섯 살된 아이가 전차가 치어 죽는 일이 벌어졌다.[3] 아이의 아버지가 이를 보고 도끼를 빼들고 전차에 달려들자,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여 차량에 달려들었다. 당시 시내에 전차로 인해 가뭄이 일어난다는 둥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는데, 이로 인해 시민들의 반응이 과격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차장과 운전수는 요행이 빠져나올 수 있었으나, 전차는 파괴, 전소되었다. 이후 다른 전차 역시 수난을 당하고, 발전소까지 위협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소동은 곧 진정되고, 이러한 폭동 발생에 대해 조야에서는 책임자를 문책하고 사상자에 대한 배상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전차 종업원은 운행 자체를 거부하고, 호신용 권총의 소지, 경찰 1인의 첨승, 그리고 유족 보호를 위한 공탁금 제도 실시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협상은 난항을 겪어, 일본인 종업원은 전원 철수하였으며, 이로 인해 5개월간 운휴하게 되었다. 이에 한성전기회사측은 미국인 운전수 8명과 기계공 2명을 급거 모집하여 9월 말 경에 운행을 재개하였다.

이후 전차사업은 그 추위와 비를 제대로 막아주지 못하고 의자 역시 나무의자로 불편했으나, 빠르고 편리했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를 끌어서 선로 연장 요구가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개통 당해에 운행 계통을 남대문까지 연장하였고, 그 이듬해(1900년)에 남대문에서 구 용산까지 연장할 것을 결정하여, 공사를 실시, 운행을 개시하였다. 특히 구 용산까지 연장하면서, 용산의 포구로부터 성내까지 화물 수송을 실시한 바 있다. 이후 서대문까지의 연장, 그리고 남대문에서 서소문 간을 의주로를 따라 운행하는 루트가 추가되었으나, 승객이 많지 않아 2~3년 뒤에는 폐지되었다. 이러한 노선 연장 과정중 특히 서대문 연장 시에는 당시 부설된 경인철도주식회사의 경인철도와의 평면 교차 문제가 발생하여, 일본측과 상당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외교적 노력에 의해서 무마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한성전기회사는 자금난에 빠져 미국의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합자, 광무8년(1904년)에 그 명칭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꾸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한미전기회사는 합자 등의 조처에도 불구하고 경영상황이 개선되지 않자, 당시 여러 조약을 배경으로 한국에 진출하여 일한가스주식회사를 설립한 일본의 재벌 시부사와 에이치(渋沢栄一)와 매각 교섭을 벌였다. 일한가스주식회사 중역회의에서 한미전기회사의 매입은 특별한 이견 없이 가결되어, 1909년 6월 23일에 그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시점에 한미전기회사는 귀빈차를 포함한 객차 37량, 화차 13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일 승객수는 370명 정도였다.

이들은 곧이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그 즉시 대대적인 투자를 벌여, 종로~남대문~동자동 간의 노선을 복선화하고, 종로~동대문 간 역시 복선화하였다. 차량 역시 새롭게 밀폐형 차량을 대거 도입하였다. 사업이 팽창하는 가운데 1915년에는 일한가스주식회사는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정하였으며, 루트 역시 빠르게 증가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조는 지역사회에 제대로 환원되지 못하였는데, 특히 한국인이 밀집거주하는 서대문과 마포 계통은 운임을 비싸게 부르고, 일본인이 밀집한 용산 계통은 운임을 낮게 부르는 식으로 운영하여 운임인하 운동이나 부영(시영) 운동 등 공영화 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서울의 인구는 1920년까지의 정체기를 거쳐 급격히 팽창하였고, 이로 인해 주택이 없어 움집을 집고 사는 토막민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등 서울의 과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으나, 전차는 여기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해 교통난이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부영 버스 및 경성버스의 버스 운행이 실시되면서 경쟁도 발생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반강제(半鋼製) 보기(Bogie) 차량의 도입, 시내 정거장의 무정차 통과 등의 대책을 세웠으나, 큰 효과를 거두진 못하였다. 다만, 무정차 통과를 통해 시내에 난립한 정거장의 정리 등이 이루어지는 일부 개선은 이루어졌다.

이후 중일전쟁, 2차대전의 발발로 인해 전차사업은 점차 파행으로 치닫게 된다. 검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차량의 개량 또는 교체 역시 극도로 정체되었다. 선로와 전기시설 역시 심각할 정도로 혹사당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폐선까지

일제 패망과 함께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사업 역시 다른 사업과 함께 한국인의 손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시동원기의 혹사와 광복의 기쁨에 환호하는 시민들의 난동으로 인해 전차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해방 후 보름 동안 차량의 가동상태는 101대에서 59대까지 급감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서울시는 귀국동포와 북한으로부터의 월남자 증가로 크게 밀도가 증가해서, 전차운행은 가일층 가혹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좌우익의 대립에 따른 혼란으로 노동조합의 파업, 태업, 사보타지 등이 속출하여 1947년에 이르러서는 하루 27대만 운행할 정도로 혼란의 극에 달했다. 이후, 단체협약등을 통해 상황이 호전되면서 27대를 기점으로 다시 가동률이 회복되어, 1948년에 이르러서는 133대가 운행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정상화의 노력은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서 무참히 훼손되기에 이른다. 전쟁의 피해는 심각하여, 궤도 총 연장 46,204m 중 5,128m가 손실을 입었고, 차량 227대 중 104대가 소실되었으며, 전차선은 모조리 파괴되었다고 한다. 이후 복구에 착수하여 1952년 6월 2일에 67대를 투입하여 한강대교 구간을 제외하고 전 노선의 운행이 재개될 수 있었으나, 이는 응급 복구에 가까운 상황이며 각종 부품과 자재의 부족으로 노후화 경향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전쟁 복구 과정에서 미국은 1952년 6월 19일에 전차 40량을 지원하였다. 이 중 20량을 부산전차가 사용하고, 나머지 20량을 서울시가 인수하여 각 노선에 배차하였다. 1953년에는 추가적으로 부속품 구매 자금을 부산전차와 함께 지원받아 1957년까지 31대를 추가 복구 투입하였으며, 1956년에는 추가로 53대의 전차를 지원받아 이 중 36대를 경성전기가 인수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서, 전차사업은 난항에 빠지게 되는데, 차량의 노후화가 점차 진행되고 투자 소요가 발생하고 있는데 비해 전차요금은 동결 일로를 걷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전차사업의 적자는 크게 누적되기에 이른다. 또한, 시설 역시 응급복구와 수리에 치중하고 신차 도입이 미미한 수준으로 머물러서, 차량의 경우 213대의 전 차량 중 196대가 내구연한인 20년을 초과한 상태였다. 레일 역시 평균 사용연수가 38년으로 내구연한 20년을 초과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인건비, 도로점용료의 증가는 사업의 적자폭을 증가시켰으며, 또한 차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게 되면서, 노면전차는 그 느린 속도와 잦은 고장으로 도로 체증을 유발한다는 비난까지 듣게 되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경성전기는 전차사업의 서울시 인수를 추진하나, 번번히 거절당하였고, 민간 매각을 추진하나 역시 매수할 사람이 없어 이 역시 실패하였다.

결국, 시민의 이동권 문제에 관한 논란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전차도 세계적 전차 폐지 흐름에 따라 철거 방안이 가시화되었다. 1966년 김현옥 서울시장에 의해 교통난 해소 방안이 결정되었는데, 장기적으로 지하철 건설을 통해 해결한다는 구상하에 철거가 결정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정은 급격하게 이루어졌으나 실질적인 준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노조의 반발 등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고 한다. 1966년 6월 1일 부로 전차사업이 한국전력(1961년에 경성전기 등 3사가 합병하여 설립)에서 서울시로 이관되었으며, 이후 1966년 9월 30일에 세종로 지하도 공사 착공과 동시에 남대문~효자동간 및 서대문~종로네거리 간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남대문~효자동간의 노선은 존슨 미국대통령의 방문을 위한 도로 정비로 인해 콘크리트를 바로 궤도에 덧씌워버려 사실상 운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 10월 5일자로 전차요금 100% 인상이 단행하였으나, 일단 나머지 구간의 운행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후 1967년 9월에 발표된 〈전차 현대화 5개년계획〉에서 각 노선을 외곽으로 이설한다는 계획이 나왔으나, 이후 1968년 4월 16일에 발표되었을땐 외곽 이설에 대해서는 얼버무렸으며, 다만 철거 계획만이 크게 강조되었다.

이러한 시측 인수와 폐지 추진 과정에서 전차사업 종사자들은 시영 버스 또는 서울시 산하의 각 사업소 등지로 전보되었으며, 그 외에 택시회사 등으로 재취업이 이루어져 고용 문제는 일단락되었다.[4]

1968년 11월 30일 서울전차의 전 노선이 자정을 기해 운행 정지하였으며, 그 익일 부터는 더 이상 운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1974년 수도권 전철이 개통할 때 까지, 서울시는 시내교통의 절대 다수를 전적으로 버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연표

대한제국기

  • 1898년 2월 19일 - 콜브란과 보스트위크, 대한제국으로부터 전기사업권을 획득하여 한성전기회사 설립.
  • 1898년 12월 25일 - 서대문~청량리 간 단선 신설.
  • 1899년 일자불명 - 종로~남대문 간 단선 신설.
  • 1899년 5월 17일 - 전차 개통식.
  • 1901년 1월 - 남대문~구용산 간 단선 신설.
  • 1901년 7월 - 서대문~남대문 간 단선 신설. 그러나, 수 년 후 폐지됨.
  • 1909년 6월 23일 - 한일가스주식회사에 매각.

일제강점기

해방이후

  • 1945년 8월 15일 - 해방과 동시에 한국인에 의해 전차사업 인수.
  • 1950년 일자 불명 - 한국전쟁 발발로 전차 운행 중지.
  • 1952년 6월 2일 - 전차 운행 재개.
  • 1952년 7월 3일 - 미국제 도입 차량 투입 개시 및 영등포~노량진 선 개통(?).
  • 1958년 일자 불명 - 복구 완료 및 최장 영업거리 달성.
  • 1961년 7월 1일 - 경성전기, 조선전기, 남선전기 등 전력 3사 통합으로 한국전력 출범. 동시에 서울전차 사업의 한국전력 운영 개시.
  • 1963년 5월 30일 - 일본 후지샤료(富士車輛)로 부터 신차 8대 도입, 구형차량 교체.
  • 1963년 일자 불명 - 마포차고 궤도 연장, 서대문, 서울역 앞, 돈암동선 등 보수 공사 실시.
  • 1964년 일자 불명 - 서울 신문로 2가 궤도공사, 을지로 4가 분기점 개수공사, 동대문 앞 궤도 개수공사 실시.
  • 1965년 일자 불명 - 일본으로부터 신차 35량 도입, 구형차량 교체.
  • 1966년 4월 4일 - 김현옥 서울 시장, 〈서울특별시 교통난 완화책〉 공약에서 중기대책으로 전차 철거 천명.
  • 1966년 6월 1일 - 전차사업 한국전력에서 서울시 측으로 이관.
  • 1966년 6월 2일 - 세종로 지하도 공사 관계로 서대문~종로네거리 간 및 남대문~효자동 간 운행 중단.
  • 1966년 9월 30일 - 세종로 지하도 완공으로 서대문~종로네거리 간 운행 재개.
  • 1967년 9월 20일 - 〈전차 현대화 5개년 계획〉발표.
  • 1968년 11월 30일 - 이날 자정부로 전차 운행 정지, 서울전차 폐지.

노선

노선 설명

이하의 계통은 대개만 맞춘 것으로 아직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검증이 필요함. 옆 사진 참조.

  • 본선 : 청량리~동대문~세종로
  • 서대문, 마포선 : 세종로~서대문~마포
  • 을지로선 : 을지로 6가~을지로입구~남대문
  • 효자동선 : 효자동~세종로
  • 왕십리선 : 을지로6가~왕십리
  • 신용산, 구용산선 : 남대문~남영동~신용산, 남영동~원효로
  • 노량진, 영등포선 : 신용산~노량진~영등포
  • 의주로선 : 남대문로5가~서대문~영천(靈川)
  • 창경원, 돈암동선 : 종로4가~창경원~돈암동
  • 종로4가~을지로4가
  • 동대문~을지로6가

차고지는 다음과 같음.

  • 마포 차고
  • 동대문 차고
  • 삼각지 차고
  • 영등포 차고

영업

개업 당시의 서울전차는 별도로 정차장을 설정하지 않고, 타고자 하는 사람이나 내리고자 하는 사람이 기별을 하면 전차를 세우고 승객을 취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서 전용의 기계식 운임 계산기를 차장이 가지고 각 승객의 운임을 따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방식은 그리 오래 사용되지 못한 채, 정차장을 두는 일반적인 노면전차 영업 방식으로 전환되었으며, 운임 역시 승차 전에 매표소에서 미리 표를 사 승차하거나, 차장에 의해서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 방식은 큰 변화 없이 폐지시까지 유지되었다.

전차의 운행은 모든 역에 정차하는 이른바 각역 정차 방식으로 운행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서울의 과밀화와 정차장의 과다 설정으로 표정속도 및 처리 용량이 크게 악화되면서, 도심 구간 일부에서 무정차 통과가 시도된 바 있다. 일정 시간대에는 종로 등지의 몇몇 정차장을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불평 등으로 인해 계속 유지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며, 후에 일부 정차장의 폐지, 조정 정도로 이 문제는 정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이후에는 사회적 혼란과 차량의 노후화 및 대량 손실로 인해 이런 운전방식이 시도되지 못한 채로 각역 정차 방식으로만 운행하였다.

이설 계획

서울 전차는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폐지에 앞서 이설에 대한 계획이 존재하였다. 이설 계획은 도심지의 교통을 지장하는 노면전차를 폐지하고, 이를 시 외곽 지역의 교통난이 심각한 지역에 이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것으로, 1967년에 5개년 계획으로 발표된 것이다. 여기에서 다루어진 노선은 다음과 같다.

  • 영천~불광동~갈현동
  • 왕십리~화양리
  • 청량리~면목동
  • 영등포~화곡동

그러나 이상의 계획은 서울시 측에 대해 전차 폐지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급조된 것이라는 평이 있으며, 실제로 건설비 등의 과다로 인해서 실현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것이었다고 한다

차량

대한제국기

대한제국기의 서울시전에서 사용한 차량은 개방형 차량 8량과 귀빈용의 차량 1량이 있다. 이후 개방형 차량으로만 계속 도입이 이루어졌다. 개방형 차량은 차량 중앙에 칸막이가 쳐져 있는 곳이 상등실이고, 선두부와 후미부는 외벽 등이 일체 없는 곳으로 하등실로 쳤다. 상등실은 여성이 이용하도록 배려했다고도 한다. 현재 잔존한 차량은 없으며, 형상만을 복원한 차량이 존재한다.

귀빈용 차량은 고종의 홍릉 행차시 쓰기 위한 것이다. 다만, 모양이 상여같다는 이유로 그리 활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사진이나 실물에 대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

이외에 화차 등이 존재하나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 당시의 도입된 차량은 벽체 등이 있는 상자형 차량으로, 초기엔 2축차가 사용되었다. 이후 혼잡 대응을 위해 일본 오사카에서 반강제 보기차가 도입되었다. 이 두 차량 모두 해방 후에도 다수가 잔존하여 사용되었다고 한다.

2축차는 차량 길이에 따라 두 가지 형식이 존재한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형식이건 차체는 목재로 제작되었으며, 앞쪽과 뒷쪽에 하나씩 문이 배치되어 있다. 구조상 별도의 운전실이 존재하지 않는 형식이다. 일부 차량은 측판 없이 개방형인 상태로 쓰이는 것도 존재한다. 집전봉으로 급전한다. 현전하는 차량은 전혀 없다.

2축 보기 2개를 갖춘 목재 차량 역시 존재한 바 있다. 이 형식의 차량은 전부와 후부에 문을 갖춘 타입이며, 중간 부분에 별도의 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역시 집전봉으로 급전한다. 현전하는 차량은 전무하다.

반강제 보기차는 일본에서 도입된 차량으로, 2축 보기 2개를 갖춘, 프레임 등에 강재가 사용된 차량이다. 3개의 문을 갖춘 타입으로, 전부, 후부, 중간부에 각각 1개씩의 문이 배치되어 있다. 역시 집전봉에 의한 급전 방식을 갖추고 있다. 이들 차량은 해방 이후에 미국제 부품을 적용받아, 문의 개수, 집전장치 등이 개조되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이후

보존중인 363호차

일제강점기 당시에 사용된 차량이 대개 그대로 사용되었으나, 미국제 부품을 사용하거나, 전쟁 피해로부터의 복구 과정에서 개조가 상당부분 적용된 예가 많다.

당시 차량의 구분은 소형, 중형, 대형으로 차량의 크기를 기준하여 일차적으로 구분하였으며, 여기에 해방 이후에 새로 도입한 차종은 그 도입처, 특징에 따라 구분하였다.

1950년대 미국 애틀란타에서 사용되던 전차가 직도입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들 차량은 집전봉을 사용하고 있으며, 외견상 창문이 프레임이 붙은 통짜로 바뀌어 있다. 이들 차량의 문은 앞과 뒤쪽에 있으며, 이 중 앞쪽 문은 3단으로 나누어져 있어(3단 폴딩식인지는 불명) 미닫이식을 쓰는 다른 차량과 구분된다. 또한, 55년 경에는 미국의 대외원조자금을 배정받아, 추가적으로 전차와 부품을 도입하여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후 60년대에는 일본 후지샤료 사로부터 차량 도입계약을 체결하여 도입한 바 있다. 1963년 5월 30일에는 신차 10대를 도입하여 부산전차에 2대를 배정하고, 8대를 배정받아 노후차를 교체하였다. 또한, 1965년에는 80대 도입 계획을 수립하고, 이 중 35대를 도입하여 소형차와 교체 운행하였다(세부분배내역 불명). 그러나, 1968년에 노면전차 운행이 폐지되면서 이들 차량은 도입 수 년 만에 용도가 없어지게 되었으며, 나머지 계약 수량은 도입이 중지되었다.[5]

이 외에 1962년 기준으로 살수차가 2량, 화차가 1량 재적하였다. 그 외에도 종종 기존의 전차에 단장을 하여 이른바 "꽃전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도색

현재 보존되어 있는 차량의 노란색, 청색 도색 외에, 백색에 청록색, 백색에 청색 도색을 한 차량이 확인된다. 그 외에 특이한 도색을 한 차량이 일부 존재하였다.

보존 차량

  • 서울과학관 : 반강제보기차 363호가 보존중이며, 보존상태는 열악하다. 황색, 녹색 도색.
  • 어린이대공원 : 차호 불명의 차량 1량이 보존중이며, 역시 보존상태는 열악하다. 백색, 청록색 도색.

함께 보기

주석

  1. 교통부(1962), 《한국교통연감》.강생회. 다른 자료에서는 77km 정도로 표기하는 예도 있으나, 이는 복선을 2중 계산한 수치로 생각됨.
  2.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2000), 《서울교통사》, 서울역사총서2. 서울특별시.
  3. “AMERICAN WORK IN KOREA.; The United States Minister to the Hermit Nation Talks -- Bad Start of a Trolley Road.” ((영어)). 뉴욕타임즈. 2007년 10월 10일에 확인함. 
  4. 손정목(2005), 《한국 도시 60년의 이야기》, 제1권. 한울.
  5. 한국전력주식회사(1989). 《한국전기백년사》, 하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