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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쥐박멸전담반/5.18 광주민주화운동 언론보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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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사츄세츠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씨(55.David L.Dolinger.한국명 임대운)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ref>[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1&newsid=20080805163907537&p=newsis "美 돌린거씨 '광주 안장' 긍정적 검토"]</ref>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씨(55.David L.Dolinger.한국명 임대운)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ref>[http://media.daum.net/society/nation/jeolla/view.html?cateid=1001&newsid=20080805163907537&p=newsis "美 돌린거씨 '광주 안장' 긍정적 검토"]</ref>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한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code=100300&news_uid=134653 5.18기자 도널드 커크 “‘화려한휴가’ 잘 표현” 등 김대중대통령 발언]</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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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22일 (목) 10:01 판

한겨레, 경향신문 등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신문은 5.18은 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독일 제1공영방송 ARD-NDR의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서방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또 그 해 9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판결을 받자 항의표시로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45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필름에 담았다.', '내 생애에서 한번도 이런 비슷한 상황을 목격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베트남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할 때도 이렇듯 비참한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고 술회하고 있다.[1]

테리 앤더슨 AP 통신 기자 (당시 LA타임스 일본총국장)은 5.18에 대해 “5·18은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었다. 놀라움과 분노로 가득찬 시민들 앞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곤봉으로 때리고, 최루탄은 물론 총까지 쏘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상점과 시내버스 안까지 쫓아가서 젊은이들을 잡아 끌어냈다. 광주는 분노로 일어섰다.”고 진술했다.[2][3]

뉴욕타임스의 서울 특파원 헨리 스코트 스톡스는 “취재결과 광주의 심각성과 비교해 미 대사관의 식견은 형편없었다”고 회상 하고 있다.[4]

심재훈 뉴욕타임스 서울 주재기자는 "광주항쟁이 없었다면 우리의 민주화운동은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는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다. 광주는 세계현대사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증언을 하였다.[5]

마쓰나가 세이타로 요미우리신문 홍콩 특파원은 "광주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 민주화가 이뤄진 것은 한국민과 한국지도자들 마음속에 광주항쟁정신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은 필리핀 마르코스 정권의 붕괴와 중국 천안문사건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6][7]

샘 제임슨 AP통신 기자는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1980년 광주의 3일간 군대만행으로 빚은 희생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군대의 만행은 이내 7일간의 광주사태로 치달았다.'고 보도하면서 '한국의 거대신문들은 광주 소재 (주)한국화약 창고의 다이너마이트 탈취 같은 시위자들의 과격한 행동을 강조했고, 군대의 잔인한 행동에 대해서는 침묵했다.','수년 동안 많은 남한인과 몇 명의 미국인은 광주항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책임을 들춰냈다. 미국은 사실상 비난 또는 적어도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5.18을 왜곡한 한국의 거대신문을 비판하였다. [8]

블레들리 마틴 미국 볼티모어 선 서울 특파원은 '나는 지난 2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중국의 강청 등 4인방 재판, 그리고 인도의 인디라 간디 수상 암살 이후 폭동과 살인사건 등을 취재해왔다. 그러나 나는'광주'의 참상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건이 나의 기억 속에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느냐고 누가 물어보면, 한 마디로 나는 '광주'라고 대답한다.'고 증언한다 또 '광주항쟁 기간 동안 단 하루밖에 광주에 머물지 않았지만, 1980년 5월 26일 그날 하루만으로도 바로 죽음을 걸고 폭압에 맞서 투쟁했던 용감한 광주시민들의 모습이 나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광주야말로 나의 기자로서의 경력 중 가장 감동적인 경험을 제공해준 곳이었다.' 5.18을 높이 평가하였다. [9][10]

미국 메사츄세츠주의 한 의료관련 연구개발회사 이사인 데이비드 돌린거씨(55.David L.Dolinger.한국명 임대운)는 5.18 광주항쟁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사후 유골이라도 광주에 묻고 싶다'고 밝혔다.[11]

미국의 프리랜서 기자 도널드 커크는 “광주 민주화 항쟁은 한국 사회가 겪었던 정치적인 사건의 전환점이기도 하다”고 말한 뒤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높이 평가했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