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
장 칼뱅 Jean Calv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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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피카르디 |
사망 | 1564년 5월 27일(55세) 스위스 제네바 |
성별 | 남성 |
직업 | 목사 |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 출신의 개혁교회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이다. 영어식으로 존 칼빈(영어: John Calvin) 또는 요한 칼빈으로 불리기도 한다. 기독교 사상 중 하나인 칼뱅주의(개혁주의)의 개창자로, 마르틴 루터·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하였으며, 저서 《기독교 강요》(1536)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역사와 문학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2009년 그의 탄생을 기념하여 여러 국가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요한칼빈탄생500주년기념사업회 주최로 학자들이 대규모 학술대회를 열었다.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64년)
칼뱅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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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신학 |
주요 문서 |
교파 |
주요 인물 |
출생과 교육의 시작
칼뱅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피카르디(Picardy) 도시의 누아용(프랑스어: Noyon)에서 4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아용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고향교회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칼뱅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갈등속에서 아들에게 법학으로 진로를 바꾸길 권했다.
마르슈
1523년 8월에 칼뱅과 몽모르 가문의 소년 몇이 공부를 더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칼뱅이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삼촌인 리샤르의 집에 머물렀으나 두 달 후에 마르슈 학교[1] 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마뚜랭 꼬르디에르가 라틴어 문법을 가르쳤다.[2] 꼬르디에르는 근대식 교수법으로 유명한데, 그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를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칼뱅은 이 학교에 몇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꼬르디에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1562년 꼬르디에르는 칼뱅의 요청으로 제네바로 옮겨와 가르쳤다.
몽테귀 컬리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칼뱅은 자신의 이름을 요아니스 칼비누스(라틴어: Ioanis Calvinus)로 개명했는데, 이로 인해 이후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523년 말 즈음에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컬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이자 종교개혁에 많은 영향을 준 에라스무스와 라블레 등에게 배울 수 있었다. 칼뱅이 재학하였던 1514년부터 1528년까지 몽떼귀 컬리지의 교장은 피에르 탕페트였다. 그는 보수적인 학자 노엘 베다의 계승자였다.[3] 칼뱅은 여기서 수사학 등을 배웠다. 당시 프랑스는 공동생활형제단의 근대적 경건 운동과 유명론 등이 신학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칼뱅은 콥(Cop) 가문의 몇 사람과 친분을 가졌다. 프랑수아 1세의 왕실 의사였던 기욤 콥(Guillaume Cop)은 당대의 다양한 인문주의와 종교 개혁 사상을 가진 그룹들과 친분이 있었다. 그의 아들 사형제는 칼뱅의 친구였다. 칼뱅은 콥 가문을 드나들면서 이러한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 칼뱅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그의 사촌인 피에르 로베르 올리베탕 등이 있다.[출처 필요] 1528년 파리에서 학업을 시작한 로욜라[4] 도 역시 장 칼뱅과 비슷한 시기에 이 몽떼귀 학교에 다녔는데, 그 두 사람이 만났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법학 공부
1527년 9월 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트빌(Martheville)의 생 마르탱(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아 다니엘, 프랑수아 드 코낭, 니콜라 뒤쉐맹등이 있다. .[5]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아 다니엘, 니콜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주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6]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파리 대학교 학장에 취임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선생님들의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이 연설문은 프랑스 종교개혁의 관건이 되었으며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가미되어 있었는데 이 연설문을 칼뱅이 작성했다. 콥의 학장 취임 연설은 칼뱅이 종교개혁가로 나선 출발점이 된다.[7] 파리 국회는 연설 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티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ques Lefèvre d'É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é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왈도파 교인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라 포르쥬는 루터의 글을 탐독하였고, 종교개혁사상을 전파하였으며 성경과 복음적인 팸플릿을 보급하였고, 네덜란드로부터 온 종교적 피난민들에게 항상 집을 개방하곤 하던 인물이었다. 칼뱅은 이러한 라 포르쥬를 통해 종교개혁에 눈뜨고 회심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 곳에서 칼뱅은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아티에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아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일-18일 밤 성만찬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투안 마르꾸르였다. 그는 리옹에서 추방된 후 뇌샤텔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의 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티엔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뒤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그의 동료로는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8]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9] 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망명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 칼뱅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그는 개혁정신을 가진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Renée) 공작 부인[10] 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물렀다.
페라라에서 칼뱅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11] 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뒤 띠예는 아오스타를 거쳐서 바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는 임시 특별 사면과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이 포고되자 칼뱅은 프랑스로 곧장 떠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일을 정리했다.
동생 앙뚜완느와 마리가 그와 동행했다.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우회로인 제네바에 들렀다.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년-1538년)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주교 피에르 들 라 봄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뱅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뱅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 |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 ” |
— 칼뱅, <시편 주석>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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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은 바젤로 가서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난 후, 1536년 9월 5일 이전 어느 시점부터 제네바의 생 피에르 성당에서 바울 서신들을 강해하는 성서 교사로서의 임무를 시작했다. 1537년 이전에 이미 그는 제네바에서 목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10월에 파렐과 삐에르 비레는 칼뱅과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칼뱅은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북아프리카 히포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책 페이지와 줄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1537년 1월 16일에 제네바의 목사들은 시의회에 일련의 규정들을 제출했는데, 이것은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필요한 주요 규정들을 기술하고 있었다. 이 규정들이 받아들여지자 모든 제네바 시민들은 교회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만 했다. 시민들에게 제시된 교리교육서와 신앙고백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순탄하지 못했다. 재세례파와 같은 다른 종교 개혁 세력과도 충돌이 있었다. 시의회가 베른의 요청에 따라 베른에서 행해지고 있던 몇 가지 교회의 관례를 제네바에 도입하려 하자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목사들이 이러한 변화에 기꺼이 순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38년 4월 25일에 이들은 제네바로부터 추방되었다. 칼뱅과 파렐은 베른과 취리히를 통과하여 바젤로 갔다.
바젤에서 몇 주일을 지낸 후 파렐은 뇌샤텔로 옮겨 갔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었다. 칼뱅은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을 준비하기 위해 바젤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뱅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새로이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539년 칼뱅은 또 그 지역의 김나지움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신약성서 해석을 가르쳤다.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칼뱅은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해냈다. 1539년에는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536년 초판의 3배 분량이었다. 1540년 그의 많은 주석 가운데 최초의 것인 <로마서 주석>이 나왔다. 이 기간에 칼뱅은 여러 사람들의 요청에 부합하고자 평신도들에게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도 썼다. 이 <성만찬 소고>는 1541년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뱅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1540년 8월 6일에 칼뱅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이미 1539년 5월 19일에 칼뱅은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고 이 일은 여러 번 성사될 뻔하기도 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이 가능성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칼뱅과 이델레뜨의 결혼은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정식 혼인으로 서약되었으며 아마도 그것은 파렐에 의해 예배 시간에 승인되었을 것이다.
1542년 7월 28일 칼뱅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자크(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크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뱅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살아생전에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하게라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 ” |
— 칼뱅, 삐에르 비레에게 보낸 4월 7일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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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임종시에 그녀가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서 생긴 아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뱅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에게 그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돌보겠노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칼뱅이 슈트라스부르크에 머물던 시기에 제네바와 가졌던 접촉들에 대해 살펴보자. 파렐에게 보낸 1538년 10월 24일자 편지에서[12] 칼뱅은 혼란이 지배하는 제네바의 상황들에 대해 논하고 있다.
파렐과 칼뱅의 후원자들은 파렐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을 기에르멩(Guillermin)[13] 이라고 불렀다. 이들 중에는 시의회 의원 아미 페렝(Ami Perrin)과 1536년 5월에 설립된 라 리브(La Rive) 학교의 학장인 앙투안 소니에르, 그리고 라 리브 학교와 1537년부터 관련을 맺고 있던 마뚜랭 꼬르디에르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들[14] 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파렐에게 보낸 1540년 3월 29일자 편지에서[15] 칼뱅은 제네바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편지를 기다려 왔노라고 썼다. 2월에 아르띠뀔랑 파(Articulants)[16] 와 기에르멩 파들은 서로간의 의견 차이를 극복했다. 또한 칼뱅은 제네바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그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하루에도 천 번씩 죽었던 그 십자가(제네바의 1차 체류) 위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식으로 백 번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오게 하려는 사람들을 말려달라고 파렐에게 호소했다.
1540년 9월 2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열렬한 기에르멩 파의 한 사람인 아미 페렝에게 칼뱅을 제네바에 돌아오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10월 13일에 귀환을 요청하는 편지를 칼뱅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간단한 공식 서한이 10월 22일에 보내졌다. 이 편지 때문에 이틀 동안 칼뱅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칼뱅은 10월 23일에 답장을 보내서 제네바 교회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정말 딜레마에 빠졌다. 한편으로는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요구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정말 순종하고 싶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을 간단하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 | 언제나 목사는 부르심을 받은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리고 내적인 확신과 신자들의 동의 없이는 그곳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 ” |
다음날인 10월 24일에 칼뱅은 파렐에게 편지를 보내어 만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면 파렐이 원하는 일(즉, 제네바로 돌아가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 | 그러나 제 자신의 주인이 제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심장을 도살된 것 같은 희생 제물로 주님께 바칩니다. | ” |
칼뱅의 좌우명이 된 이 말은 그의 기념주화에 그림으로 새겨지게 되었다. 그 기념주화에서는 심장을 들고 있는 그의 두 손이 그려져 있고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prompte et sincere)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다.
1541년 5월 1일에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에게 내려졌던 금지령을 폐지하고 만장일치로 칼뱅을 다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칼뱅, 파렐, 소니에르, 그리고 다른 몇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들어졌다. 칼뱅은 마침내 1541년 9월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당초 칼뱅은 제네바에 임시로 머물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언제나 제네바의 종이 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시의회와 칼뱅, 그리고 또 다른 네 명의 제네바 목사들은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월 26일 새로운 안을 시의회에 제출했다. 비록 칼뱅의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1541년의 교회법은 제네바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 교회법은 1547년에 증보되었으며 1561년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
그동안에 칼뱅의 부인이 제네바로 오는 일정과 짐을 옮기는 일정이 잡혔다. 그리고 칼뱅은 다시 제네바의 목사직을 맡기로 했다.
자신이 돌아온 후 첫 예배 시간에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많은 기대와 관심을 모았지만 칼뱅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단지 직분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리고 1538년에 중단되었던 성경 본문에서부터 다시 강해 설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은 단지 직무상의 중단이었음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교회법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승인된 다음날인 1541년 11월 21일에 시민법을 제정하기 위해 시의회는 세 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위원을 임명했다. 칼뱅도 이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1543년 1월 28일에 제네바 총회는 재판에 관한 사항을 제외하고는 시민법을 채택하였으며 그 제외된 부분도 1544년 초에 채택되었다.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등 칼뱅의 귀환은 시의 여러 가지 행정들을 처리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이어지기는 했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시의회와 교회의 역할을 정의해야 하는 문제, 또 그 도시에 새로이 도입된 엄격한 생활방식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들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구 제네바 시민들인 '제네바 출신들'과 점점 하나가 되어 이 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에 반대하는 당을 형성했다.
제네바에 새로 도입된 더욱 엄격한 생활방식에 대해 저항이 있었음을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카드 제조사의 사장을 역임하고 소의회의 일원이었으며 포병대 대위인 삐에르 아모의 아내가 1545년 1월에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인해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혼 생활은 끝이 났고 아모는 재혼을 허가 받았다.
1546년 1월 26일 아모는 칼뱅이 자신의 최근 이혼 소송에서 반대한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칼뱅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모는 체포되었다. 소의회는 온건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아니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해 결국 이 문제를 200인 의회에 상정했다.
1546년에 춤을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문제는 칼뱅이 제네바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 일에 관련된 사람들 중에는 시장관인 앙블라르 꼬르느(Amblard Corne)와 포병대 대장인 아미 페렝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회치리회에서 페렝의 아내는 치리회 회원들을 향해 폭언을 퍼부었는데, 그들이 자기 집안인 파브르 가문(the Favres)에 대해 뭔가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치리회 회원들은 그녀 아버지의 간통 문제에 대해서도 일련의 조처를 취하게 되었다.
1546년 8월에는 페렝-파브르 가문과 더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아벨 뿌뺑(Abel Poupin)이 집례한 아미 페렝의 친척 결혼식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을 듣고 있지 않던 신랑이 “예”라는 대답 대신 머리를 내저어버렸다. 곁에 서 있던 아미 페렝은 웃어버렸고 이 둘은 시의회로부터 처벌을 받았다. 게다가 페렝 부인의 삼촌은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결혼식 전날에 페렝의 어머니는 싸움을 하던 중에 가족 한 사람을 때려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교회치리회 앞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달아나 버렸다.
1547년 9월 20일에 시의회 회의석상에서 아미 페렝은 자기 아내와 장인의 수감과 관련하여 시의회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페렝 역시 체포되었고 10월 9일에는 그의 의장으로서의 직분이 박탈되었다. 그에 대한 소송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다음과 같은 고발이 접수되었다. 5월에 베른 대표로 파리에서 열린 앙리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페렝은 그곳에서 황제 칼 5세의 공격에 대비하여 베른과 제네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수백의 기마병 지휘권을 페렝에게 주겠다는 추기경 뒤 벨레(Du Bellay)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베른은 페렝을 지지했으며 페렝을 고발했던 로랑 메그레(Laurent Maigret) 역시 페렝이 파리에 있던 바로 그 시기에 프랑스 왕실의 도움을 얻고자 했음을 폭로했다. 메그레도 체포되었다. 시의회 내에서의 토론은 격렬해졌다. 11월 29일에 페렝은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으나 메그레는 감옥에 남겨졌다.
1548년 가을에 칼뱅은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칼뱅은 로잔느에서 카인(Cain)이라 불리고 있었고 곧 제네바에서 축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11월 선거에서 칼뱅의 대적들이 승리했다. 이제 그들은 사법부와 관련된 주요 관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칼뱅은 다가오는 시 장관 선거가 시 정부 내에서 완전한 개혁을 창출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1549년 1월 18일에 시의회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시 전체에 복음을 따라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법을 지키도록 요구했다[18].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인 생활을 준수하며 교회 예배에 충실히 출석하라고 간곡히 권고했다. 규정 준수 여부를 감독하던 사람들은 임무를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만 했다.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모범을 보이도록 요구되었다. 목사들의 직위 해제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신중히 처리하도록 했다. 포고문은 그 다음 예배 전에 공포되어야 했다.
칼뱅이 염려한 대로 1549년 2월에 아미 페렝은 수석 시 장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555년 2월에 거행된 선거는 칼뱅의 추종자들에게 완전한 승리를 안겨다 주었다. 4명의 시 장관 모두 칼뱅을 지지하였으며 페렝의 추종자들인 제네바 출신들은 모든 정치 일선에서 영향력을 잃어 버렸다. 그 다음 달에 다수의 프랑스 망명객들(약 50명)이 제네바 시민권을 취득했다. 페렝 가문을 포함한 오랜 제네바 가문들은 많은 프랑스 망명객들이 자신들의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수용할 수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1555년 5월 6일 시의회는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 망명객들에게 10년 동안 선거권을 허락 하지 말고 무기 소지를 금하자는 페렝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요구안을 지지하기 위해 500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5월 16일에 시위 집회를 가졌으며 이 시위를 마칠 때 다수의 시위대가 제네바 출신들의 지도자들로부터 식사를 제공받았다. 그날 밤 거리에서는 폭동이 일어났으며 시 장관 오베르가 누군가를 체포하려 하자 페렝이 자기 수하의 간부를 낚아채 갔다. 다음 날 조사가 진행되어 5월 23일에는 주동자 몇 명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소의회와 대의회는 페렝의 사건에 착수하였지만 그는 체포되기 전에 다른 세 명과 함께 도시를 빠져나갔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 중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들 중 세 명에게는 형이 집행되었으며 나머지는 망명했다. 베른 시의회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나섰으며 부재중에 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 중 한 명인 프랑수와-다니엘 베르뗄리에르 제네바로 돌아왔는데,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9월 2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페렝 파의 종말을 초래했다.
1555년 5월에 페렝 파의 패배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로 칼뱅은 편지에 제네바의 상황들을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이로써 제네바 도시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건 칼뱅의 기나긴 투쟁은 결국 칼뱅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제네바에서의 투쟁이 끝나자 칼뱅은 또한 주변국가의 교회 일에 좀 더 깊이 연루되었다.
칼뱅의 말년
1555년 5월 칼뱅의 반대파들이 제네바에서 떠나간 후, 종교개혁자들이 그 이전보다 갈등이 훨씬 줄어든 시기에 들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56년부터 그의 건강은 쇠약해져 갔다. 엄청난 노력과 그의 동생 앙뚜완느의 도움으로 <기독교 강요>의 새로운 판을 준비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칼뱅은 1558년~15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59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칼뱅은 제네바 시민권을 얻었다. 1559년 6월 5일 #제네바 아카데미가 개원할 때 그는 어느 정도 회복되어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했지만 1564년 초에 그의 좋지 않은 건강 탓에 그 활동 중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1564년 2월 2일에 에스겔서를 인용하며 칼뱅은 마지막 강의를 했고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했다. 4월 27일에 칼뱅은 시 장관들과 소의회의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칼뱅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칼뱅의 집으로 찾아 갔다. 칼뱅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담소를 나누었다. 칼뱅은 그들의 우정에 감사를 표했으며 비록 자신이 부족한 점이 있기는 했어도 하나님께 봉사하며 이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자신의 결점을 참아 준 그들의 인내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가 실패한 일들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칼뱅은 그들에게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하라고 당부했다. 그런 후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날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된 베자를 추천하면서 칼뱅은 목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 후 칼뱅은 다수의 친구들과 주요 인사들의 방문을 받았다. 5월 2일에 마지막 이별의 짧은 편지를 보낸 연로한 파렐도 칼뱅을 방문했다. 5월 19일에 목사들이 그의 집에서 정기적인 주간 모임을 가졌을 때 칼뱅도 마지막으로 그들과 함께 했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고 다음 날 매장되었다. 칼뱅은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고 숭배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의 무덤조차 알기 어렵다.
제네바 아카데미
제네바 아카데미는 제네바 대학(University of Geneva)의 전신이다. 제네바 아카데미는 1559년 6월 5일 칼뱅을 의장으로 하여 쌩 삐에르 교회(St. Pierre Cathedral)에서 열린 집회를 통해 개교했다. 이미 칼뱅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돌아온 직후인 1541년에 학교를 세울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555년에 제네바에서의 정치적 상황들이 변할 때까지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대학설립을 위해 먼저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1558년 초 부르-드-푸(Bourg-de-Four) 병원 근처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하지만 건축을 할 수 있는 정부의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칼뱅은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모금하는 일을 관장했다.
칼뱅과 다른 목사들은 교육 계획안을 만들었고 승인을 받기 위해 시의회에 제출했다. 새로운 대학에서 기존에 있던 라 리브 학교는 7학급의 사립초등학교가 되었다. 처음 두 학급에서는 아이들이 불어와 라틴어 쓰기 읽기를 배웠다. 그리고 다음 학급에서는 라틴어와 그리스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독해 영역과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로 표현하는 영역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수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아침에 학생들은 교회에 갔으며, 오후에는 휴식 시간을 가졌다. 토요일에는 학습했던 내용을 복습했으며, 다가오는 주일을 위해 교리문답을 공부했다. 학습을 시작하는 날이 되면 교리문답에 있는 기도로 (특히 학교를 위해) 시작했다. 기도와 시편 찬송은 학습 시간표에 고정적으로 들어 있었다. 학생들은 또한 주기도문 암송과 사도신경, 그리고 십계명을 배웠다. 교사들은 목사들과 교수들에 지명되었으며, 시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사립초등학교에 출석하던 학생들은 시립중등학교(schola publica, académie)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이 학교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은 형태의 기관이었다. 등록한 학생은 제네바 신앙고백서에 서명하고 교사들과 같은 방식으로 임명된 5명의 교수가 가르치는 27개의 강의 과정을 수강하였다. 히브리어 교수는 히브리어 주석을 이용한 구약성경 해석으로 학생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쳤다. 그리스어 교수는 그리스 철학자(특별히 윤리학이 주목을 받았다)와 시인의 글을 학생들과 함께 읽었다. 인문학을 담당하던 교수들은 자연과학, 수학, 그리고 웅변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특히 마지막 과목은 목사나 변호사를 준비시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가르쳤다. 토요일 오후에는 실제적인 신학 훈련에 중점을 두었다. 몇몇 목사들의 지도 아래 학생들은 설교를 발표하고 평가를 받았다. 이미 언급한 교수들 외에도 성경해석을 위한 두 명의 교수가 있었다. 대학 초창기에는 칼뱅과 베자가 이 자리를 채웠다. 교수들은 금요일에 있던 목사회에도 참석했다. 포도 수확 철에는 3주간 방학했다.
1559년 6월 5일 쌩 삐에르 교회에서 이 도시의 비서관 미쉘 로제(Michel Roset)가 대학의 규정들을 크게 낭독하고 교사들이 그 법률과 신앙고백서에 동의하기로 맹세한 뒤 목사들이 시의회에서 대학 학장으로 추대한 베자가 개막 연설을 했다.
대학이 자리 잡은 건물은 1564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이 때에는 약 1,500명의 학생들이 있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신학이나 법률 중 한 과목을 공부할 수 있었다.
칼뱅과 세르베투스
칼뱅의 생애에서 많은 논란을 야기하는 것은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있어 칼뱅의 역할이다.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라고 적고 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교리이다.)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사람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고 칼뱅 역시 알고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1534년에 칼뱅과 파리에서 만나 토론하자고 제의했고 칼뱅은 수락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세르베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19] 그 당시 이교도들에 대해서 무자비했던 로마교회가 두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1533년에 이미 세르베투스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20]
1546년에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약 2년간 계속된 서신 교환이 계속되었다. 첫 편지에서는 세르베투스는 "Michel de Villeneuve"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논쟁은 뜨거워졌고 세르베투스는 갖은 모독을 하였다. 심지어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변을 보장해 준다면 칼뱅이 있는 제네바에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칼뱅은 거절했다. 한 편지에서 칼뱅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탄압 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 ” |
결국 칼뱅이 편지를 그만 쓰겠다고 전함으로써 서신 교환은 끝나게 된다.[21]
이 당시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다(라틴어 초판은 1536년, 프랑스어 초판은 1541년에 나왔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이에 대한 반론격인 《기독교 회복》을 출간하였다.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반대했는데, 몇 가지 예를 들면 사람이 신성모독을 하지 않는 한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을 중심으로 훗날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뱅에게 보냈다. 그는 책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라고 자신의 이니셜만 적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것임을 알았다.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기욤 드 트리에라는 프랑스인 개신교도가 망명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에 사는 아르니라는 사촌이 있었다. 아르니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트리에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아르니의 편지에 대해 트리에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뜻을 전했다:
“ |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 ” |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빌라노바누스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와 그의 책을 인쇄한 업자가 로마교회 종교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았으나 그들은 《기독교 회복》의 출판을 부인했다. 아르니는 트리에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증명하기에는 칼뱅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트리에는 칼뱅을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트리에는 그것을 아르니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고 있다:
“ | 이 편지들을 칼뱅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 ” |
세르베투스는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의 공석 상태에서 그의 초상만 놓은 채 재판이 진행되었고, "산 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리고 그 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의 성 피에르교회에서 열린 칼뱅의 설교회에 참석했고, 칼뱅은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그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원래 숨어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빈 또는 툴루즈에서 칼뱅이 있던 제네바를 통해 가는 것은 크게 우회하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인데, 로마교회에 적발될 위험 외에도, 앞서 언급했듯이 세르베투스와의 서신 교환 시기에 그가 제네바에 오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고 전한 칼뱅이 바로 제네바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1946년에 칼뱅이 그의 동료 파렐에게 쓴 편지를 보면 이렇게까지 단호한 말을 적고 있다:
“ |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 하여도 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제게 그런 권한이 주어진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게 하는데 동조하지 않겠습니다.[20] | ” |
그런데도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나타난 것은 아마도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자유당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유당은 정치에 신학을 적용하려는 칼뱅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자유당은 세르베투스의 글들을 이용해 칼뱅을 반대하기도 했었다.
세르베투스가 체포된 후, 칼뱅의 비서 니콜라스 드 라 폰타인(Nicholas de la Fontaine)은 그를 고소했다. 이에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고, 칼뱅은 이번 기회에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칼뱅에겐 증인의 자격은 있었지만 재판의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칼뱅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스위스 제네바에 거주하는 외국인이었다. 그에게는 시민권이 없었고 그래서 투표권도 없었으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엔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뱅은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다. 칼뱅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 뿐이었고,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는 없었다.[22]
세르베투스는 재판에 상당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네바에서의 재판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종교재판과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제네바에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영향을 제거하려는 방종주의자들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는 세르베투스에게 승산이 있었다. 재판 관련 기록들을 보면 세르베투스의 어조에서 강한 자신감을 볼 수 있다. 그의 종교적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뱅에게 던진 그의 공격들 중엔 다음과 같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쟁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22]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을 갖고 그를 쉽게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은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칼뱅은 특유의 차분함을 보였는데,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면서 세르베투스의 이설을 지적해 나갔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기독교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를 계속 부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말을 보면 자신이 밟고 있는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제네바와 자매관계를 맺은 네 도시(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에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네 도시 모두 세르베투스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베른은 자기 도시였다면 세르베투스가 화형에 처해졌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제네바 시의회는 최종 단계에서 삼 일에 걸친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가장 고통스런 사형" 곧 화형을 선고하였다. 이때 칼뱅은 의회 쪽에 감형을 요청하면서,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참수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23] 그러나 시의원들은 거절하였다.[19][24]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22][25] 세르베투스의 형집행은 1553년 10월 27일에 이루어졌다. 그 전날 칼뱅이 파렐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이 사건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격론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의 이단자에 대한 사형은 종교적 견해가 다른 상대방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었지만, 루터나 칼빈 역시 로마 카톨릭교회에 붙잡혔다면 후스나 틴데일처럼 화형을 당하였을 것이다. 이단에 대한 사형은 이처럼 당시의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세르베투스가 사형을 선고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삼위일체의 부정 때문이었는데, 위에서 언급 되었듯이 삼위일체의 부정은 신성모독으로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신성로마제국법(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었으며, 여전히 유럽 전역의 사법 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칼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서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가 교회에 미친 훌륭한 영향이 그의 단점을 뛰어 넘는다고 생각한다. 칼뱅은 자신의 설교와 논문뿐만 아니라 주석들 안에서도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가장 간결한 진술은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 책이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자신의 간결한 요약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주석들과 함께 읽어지기를 바랐다. 기독교 강요의 여러판들이 칼뱅의 영성을 확대시켰고, 성공적인 개정판들은 그의 신학이 젊어서부터 죽기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칼뱅의 신학
장 칼뱅의 신학(Theology of Calvin)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의 작품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후대에서 형성한 신학을 말한다.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서 칼빈의 신학의 중심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특징과 강조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국가별로 그리고 신정통주의적인 관점의 차이점으로 인하여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칼빈의 신학의 중요한 점에 대하여 기독교 백과사전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그의 신학적 중요성이란 기독교 교리의 체계화를 시도한 것이다. 예정론에서, 기독론과 성례전에 근거하여 구원의 현재적 사역과 초월적 영원한 사역 사이에서 단순히 종말론적으로 수립한 구별에서, 중생에서(tertius usus legis, 율법의 3번째 용법) 믿음의 순종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 한점에서 그는 개혁신학에 지속적 영향을 주었던 정통주의를 세밀하게 만들었던 점이다. [26]
칼빈의 신학을 지배하는 원리는 인간론적이거나 구원론적이거나 또는 교회론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다. 칼 홀(Karl holl)이 지적한 대로, “칼빈의 신학적 활동의 중요성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그 중심에 놓은 데 있다. 칼빈의 모든 개별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개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기독교강요와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을 검토해 보면, 어디든지 칼빈은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전면에 부각시킨다.[27] 칼빈의 신학은 그의 설교와 논문뿐만 아니라 그의 성경주석에서, 또 자신의 가장 간결한 작품이며 대작인 기독교 강요에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특별히 칼빈은 기독교 강요가 기독교 신학에 관한 그의 주장을 요약한 것으로 사용되기를 의도했으며, 주석과 함께 비교하며 읽혀지기를 바랬다. 1536년도 초판은 6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539년 판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신학 통론》에 나타난 주제들 위에다가 몇 장을 더했기 때문에 3배로 길어졌다. 1543년 판에서는 사도신경에 관한 장에 새로운 자료를 더하고 확장시켰다. 1559년 판은 1권은 창조주 하나님, 2권 구속주 그리스도, 3권에서 성령를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 그리고 4권에서는 국가와 교회를 다룬다.
칼뱅의 공헌
개혁 신학의 완성
칼뱅은 《기독교 강요》등을 통해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을뿐 아니라 개혁교회 및 장로교 교리 대부분이 사실 그가 정립한 사상이다. 개혁 교리를 논할때 같이 언급되는 아르미니우스 주의는 독립된 신학이 아니라 칼빈의 사상에서 예정설과 구원론,은혜론만 수정한 사상이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청교도들은 성공회의 온건한 종교개혁에 반대한 칼뱅주의 개혁교도들로서, 그리스도의 새언약 아래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칼뱅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음을 선언한 종교 개혁자이기도 하다.
교회의 일치운동
장 칼뱅은 각 개신교 종파들을 단결시키고자 하였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와 일치를 위해 애썼다.그래서 장로교 신학자인 김영재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국교회가 신학에 대한 생각차이로 분열한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8] 칼뱅은 주로 활동한 제네바에서 시민권이 없었지만, 개신교의 대표적인 신학자로 명성을 떨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사회및 경제와 교육
칼뱅은 학교와 병원 그리고 복지시설을 통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영향을 주었다. 홍성사에서 출판한 《희년, 한국 사회, 하나님 나라》에 따르면, 장 칼뱅은 복지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으며,공동작업장에서 일하도록 하는 공공근로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대안을 주장했다.[29]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스위스편)에서도 스위스가 선진공업국가가 되도록 시계공업과 섬유공업을 대안으로 주장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학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기독교정신으로써 참여하는 학문임을 장 칼뱅은 복지국가와 선진공업국가를 설계함으로써 보여준 것이다.
칼뱅에 대한 평가
-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30]
-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의 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 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이들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바 있다.
- 타임지는 2009년 4월 자본주의는 칼빈의 신학사상으로 새롭게 도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칼뱅과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칼뱅의 전통에 서있는 장로교회가 가장 강한 나라이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거의 장로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오늘날 한국 교회의 60% 이상이 장로교 교인이다. 신학교에 있어서도 장로교 교단 신학교를 비롯한 많은 대학들이 칼뱅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요한 칼뱅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는 칼뱅 50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한국교회는 학문적 발전을 이루면서 대한민국에서의 칼빈 연구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국의 장로교회뿐만 아니라 세계 칼빈학회와 세계 개혁신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더 보기
각주
- ↑ 이 학교는 대학교육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인문주의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교육 과정은 처음에 문법, 수사학 그리고 논리학(소위 3학)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 이후에 수학, 기하학, 천문학 그리고 음악(소위 4과)에 중점을 두었다.
- ↑ Ganoczy 2004, pp. 3–4; Cottret 2000, pp. 12–16; Parker 2006, p. 21. McGrath 1990, pp.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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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인리히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계승자로서 여러 개신교 도시를 대표하는 사절단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 ↑ 그녀는 1527년에 페라라의 공작 에르콜레 1세 데스테와 결혼했다.
- ↑ 마로는 제네바 교회의 시편 찬송가를 위해 시편을 노래 운문에 맞추어 번역한 사람이다.
- ↑ CO 10b:273-76
- ↑ 기욤 파렐의 추종자라는 뜻
- ↑ 앙리 드 라 마레(Henri de la Mared) 외에 자크 베르나르, 장 모랑, 앙투안 마르쿠르 등이 그 목사들이다.
- ↑ CO 11:30-31
- ↑ “매국노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1539년에 제네바에 상당히 불리한 협약을 베른과 맺은 제네바 시의원들을 가리킴
- ↑
“ ... sed quoniam non esse mei iuris memini, cor meum velut mactatum Domino in sacrificium offero. ” — CO 11, 100, Herminjard 4, 339. - ↑ CO 13:158-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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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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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cations by or about 장 칼뱅 at VD 17
- Offizielle Seite des 500. Geburtstages Calvins, Infos und Interaktives zu Leben und Werk
- Offizielle Seite zum Calvinjahr 2009 der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
- Offizielle Seite des Reformierten Bunds in Deutschland zum Calvinjahr 2009
- Johannes Calvin (1509–1564)
- Kompletter Text der Institutio Calvins online
- Mehr als 200 Texte von Calvin in der Glaubensstimme
- Calvins Werke in MP3 und Zusammenfassungen
-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 Berlin: Sonderausstellung Calvinismus. Die Reformierten in Deutschland und Europa
- Digitalisate von Werken Calvins auf E-rar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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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 (영어) 장 칼뱅 -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