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파리 독립 주민투표

1946 Faroese independence referendum
섬별 결과:
연합을 위해
Secession용

1946년 9월 14일 덴마크의 자치령인 파로 제도에서 독립 주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유효투표의 근소한 과반수가 찬성(50.7%)으로 나왔지만 무효표는 승차를 넘어섰다. 1946년 9월 18일 뢰깅의 의장이 독립선언을 했지만, 덴마크는 독립선언서를 인정하지 않았다.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X는 뢰깅을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소집했는데, 이는 노조주의 정당들이 승리했다. 그 섬들은 이후 더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결과.

선택 투표 %
독립 5,660 50.73
덴마크와 지속적인 연합 5,499 49.27
유효하지 않은/빈 표 481
합계 11,640 100
등록 유권자/수신자 17,216 67.61
출처: 다이렉트 민주주의

섬별

독립 컨티뉴 유니언 유효하지 않음/
공란으로 하다
합계 등록한
유권자들
나타나다
투표 % 투표 %
노르쇼야르 956 70.6 398 29.4 64 1,418 2,220 63.9
에이스투로이 1,052 43.3 1,376 56.7 99 2,527 3,854 65.6
노어스트레이모이 622 53.4 543 46.6 42 1,207 1,679 71.9
바가르 614 58.6 434 41.4 38 1,086 1,485 73.1
수어스트레이모이 1,308 66.0 674 34.0 145 2,127 3,323 64.0
산도이 465 61.9 286 38.1 32 783 1,053 74.4
수부로이 643 26.5 1,788 73.5 61 2,492 3,602 69.2
합계 5,660 50.7 5,499 49.3 481 11,640 17,216 67.6

여파

무효표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 50.73%의 완전한 독립 찬성률과 49.27%의 덴마크 내 국내 통치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

그러나 무효표가 4.1%로 대부분 두 안을 모두 거부한 유권자들이었다. 국민의당의 일부 정치인들은 덴마크와의 연합 내에서 주권자인 파로 제도의 제3의 선택권을 투표용지에 넣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아이슬란드 왕국이 1918~44를 가졌던 상태와 유사함) 이 제안이 투표용지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투표용지에 대신 투표용지에 '아니오'라고 적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찬성하는 일부 사민당은 두 번째 제안에 '아니오'라고 쓰라고 권고했다.[citation needed]

그 후, 그 결과의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 이유는 두 제안 모두 완전한 독립성인 옵션 2의 경우 약간의 복수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citation needed]

뢰깅의 의장은 이후 1946년 9월 18일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뢰깅의 과반수나 덴마크 의회와 정부 둘 중 어느 쪽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X왕은 9월 24일 뢰깅을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2][3] 뢰깅이 해체된 것은 11월 8일에 이어 1946년 페로즈 총선거에서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정당들은 총 5,396표를 얻었고 반대 정당들은 총 7,488표를 받았다.[4] 새로운 협상이 뒤따랐고, 덴마크는 1948년 3월 30일 페로 제도의 본거지를 승인했다.[2]

참고 항목

참조

  1. ^ 패로 제도, 1946년 9월 14일: 직할 민주주의 상태(영어독일어)
  2. ^ a b 페로 제도 세계 정치가
  3. ^ Steining, Jørgen (1953). "Rigsdagen og Færøerne". In Bomholt, Jul.; Fabricius, Knud; Hjelholt, Holger; Mackeprang, M.; Møller Andr. (eds.). Den danske rigsdag 1849-1949 bind VI (in Danish). Copenhagen: J. H. Schultz Forlag. p. 187.
  4. ^ 스티닝, 페이지 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