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나 테오필로스
Abuna Theophilos테오필로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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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헤도 제2대 총대주교 | |
태어난 | 에티오피아 제국 데브르 엘리아스의 교구 | 1910년 4월 24일
죽은 | 1979년 8월 14일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아스레이트 카사 왕자의 전 궁전 | (69)
아부네 테오필로스(1910년 4월 24일 ~ 1979년 8월 14일)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제2대 총대주교였다. 그는 1970년 아부나 바실리오스가 사망하자 총대주교 역할을 맡은 후 1971년 공식적으로 아부나 바실리오스의 뒤를 이었다.[1][2][3]
초년기
아부네 테오필로스는 1910년 4월 24일 고지잠에 있는 데브레 엘리아스의 교구에서 멜리크투 젠베레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아토 젠베레 우베베와 와이지로 제리투 아델라후였다. 데브르 엘리아스 수도원과 아디스 알렘 세인트에서 봉사하고 공부한 후. 시온 수도원의 메리, 멜리크투 젠베레는 1937년 데브레 리바노스 수도원에서 수도원 명령을 받고, 고잠 대주교 아브루나 아브라함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경력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망명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1942년,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메카네 셀라시에의 멤허("삼위일체 집")라는 칭호를 붙여 압바 멜리크투가 행정 사제가 되었다. 이후 이 수도원에서 성당이 완공되면서 그는 리큐 실타나트("아치히에라치")라는 제목으로 이 새로운 성 삼위일체 성당의 학장이 되었다.
그 후 1947년, 리큐 실타나트 압바 멜리크투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콥트교 교황 유삽에 의해 주교가 되기 위해 다른 고위 성직자들과 함께 카이로로 여행을 떠났다. 아부나 바실리오스가 에티오피아 최초의 토박이 메트로폴리탄 대주교가 된 것과 동시에 아바 멜리크투는 아부네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으로 하라르의 주교로 기름을 부었다. 또한 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헤도 교회의 시노드에 유삽 교황의 개인 대표로 임명되었다. 아부네 바실리오스가 콥트교황 키릴로스에게 에티오피아 총대주교로 추대된 후, 아부네 테오필로스는 에티오피아 초대 총대주교에 의해 하라르 대주교로 격상되었다. 1951년과 1970년 사이에 테오필로스는 병든 총대주교 아부네 바실리오스의 섭정 겸 대리인으로 활동했고, 이 기간이 끝날 무렵에는 총대주교 대행을 수행하고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1968년 7월 우살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s) 회의에 참석했다. 1970년 아부네 바실리오스가 사망하자 아부네 테오필로스는 1971년 4월 7일 선출되었고, 1971년[4] 4월 13일 황제에 의해 확인되었으며, 1971년 5월 9일 아디스아바바에서 에티오피아의 제2대 총대주교로 임명되었다.[5]
에티오피아 제2대 총대주교
테오필로스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 행정 개혁 기간을 주재했다. 신학교와 교회 자체에 현대적인 교육방식을 도입함으로써 교회를 20세기로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다른 동양과 동방 정교회와의 에큐메니컬적 유대관계를 장려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화해 과정을 시작했다. 1971년 10월 테워필로스는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터키를 2주 동안 방문했다. 1973년 초에 그는 미국을 방문했다. 또한 1973년에는 콥트 정교회의 교황 셰누다 3세, 마카리오스 대주교, 키프로스의 대통령과 그리스 정교회 영장류, 전 러시아의 피멘 총대주교 등이 방문하였다. 테오필로스는 여러 차례 성지를 방문했고, 동유럽에서는 정교회가 여러 차례 보였으며, 카리브해 유역의 새로운 에티오피아 정교회 파리를 둘러보기도 했다. 1972년 2월 테오필로스는 성 트리니티 대성당에서 6명의 새 주교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가 짧은 재임 기간 동안 수행한 두 번의 성직 중 첫 번째였다.
1974년 혁명에서 에티오피아의 군주제를 무너뜨렸고, 마르크스-레닌주의 더그 정권은 정부에서 하일 셀라시에 황제를 대신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무신론자였지만 종교의 평등이 선언되었고, 에티오피아 교회는 국교회가 되는 것을 중단했다. 테오필로스는 처음에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지내다가 더그의 이념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1974년 11월 황제 정부의 전직 관료 60명이 학살당해 소름이 끼쳤다. 1975년 8월 불분명한 사정으로 하일레 셀라시에 천황의 유해를 인도받을 수 있는 허가를 거절당했고, 자신의 이름으로 공공 위령제를 실시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교회가 해체되고 교회와 국가 간의 유대가 단절되면서 테오필로스는 교회와 관련된 모든 결정을 당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내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더그와 상의하지 않고 세 명의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고 성결하게 되었다. 이 주교들은 (결국 에티오피아 정교회 테와히도 교회의 제5대 총대주교가 되는) 아부나 파울로스, 아부네 바실리오스 주교, 아부네 페트로스 주교였다. 그 후 더그족은 1976년 5월에 테오필로스를 체포하고 새로 성직된 세 명의 주교들과 함께 체포하였다.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시노드는 더그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교회를 이끌 총대주교 아부나 테클 하이마노트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의 콥트교 총대주교는 테오필로스의 투옥을 비난하고, 새로운 아부나의 선거와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콥트교회는 테오필로스의 철거가 정교회의 시노드가 아닌 정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처럼 정식적인 것도 아니며 테오필로스가 퇴위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콥트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 간의 유대가 단절되었다.
수감
테오필로스는 생스 성당의 경내에 있는 가부장제 궁전에서 체포되었다. 메리의 가부장적 수도원, 1976년 2월 17일 황제의 전 거주지인 주빌리 궁전(Derg 정권에 의해 국궁으로 개칭)으로 끌려갔다.[6] 그는 1974년 11월 전관예우 60명과 함께 처형된 황제의 손자 에스킨더 데스타 제독이 사용하던 방에 독방에 감금되었다.
데이트가 불확실한 어느 날 오후, 테오필로스는 중계 축구 시합으로 궁을 지키는 군인들이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평신도를 가장한 채 궁전을 간신히 탈출했다. 테오필로스는 나중에 동료 수감자들에게 그리스 대사관으로 향할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 후 자신의 예전 교구인 하라르에 있는 아세보트 수도원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교회의 성직자들의 충성을 믿고 아세보트로 가는 여정을 숨고 준비하기 위해 고파 성가브리엘 교회로 향했으나, 그의 위치가 교회의 누군가에 의해 더그에게 보고되어 다시 감금되었다.
테오필로스는 맨발로 메넬리크(그랜드) 궁전으로 호송되어 다시 독방에 감금되어 침대에 사슬로 묶이고 손과 발이 수갑으로 채워졌다. 나흘 후, 그는 제국 정부의 생존 최고위급 관리들이 수감되어 있는 메넬리크궁 교도소 1병동에 입대하게 되었다. Theophilos is believed to have entered into a severe fast (essentially a hunger strike) for 40 days and only broke it on Easter Monday after two imprisoned elder noblemen, Bitwoded Zewde Gebre-Hiwot (former mayor of Addis Ababa and President of the Imperial Senate) and Dejazmach Haregot Abay (former Crown Councilor and noble and parliamentarian of 에리트레아)는 무릎을 꿇고 그에게 간청했다.
테오필로스는 수감 중에 수많은 모욕을 당했다. 황제가 즉위하자마자 받은 금십자는 그가 침대 옆에 보관하고 있던 십자가 모양의 아이콘과 함께 그에게서 빼앗겼다. 그는 또 자신이 항상 '아부네 테워필로스'라는 이름으로 서명하면서 부단히 거절했던, 자신의 이름을 '아부네 멜리크투'로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아스보트 같은 수도원이나 다른 곳에 수감될 것을 거듭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테오필로스는 매일 두 차례 동료 죄수들을 위해 기도회를 열었고, 매주 일요일 악숨의 네브레-아이드 에르미아스의 도움을 받아 미사의 성령 리투르기를 말했다.
1979년 7월, 더그는 황제 정부의 고위 관리 몇 명을 즉시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1979년 7월 10일, 귀족과 황제의 측근인 체아피 태자즈 테페라워크와 전 장관 세이푸 마흐테메 셀라시에가 소환되어 궁중 감옥에서 쫓겨나 돌아오지 않았다. 1979년 7월 12일 요한스 키다네 마리암, 아베베 케베데, 아스파 데페이 전 장관도 마찬가지로 끌려갔다. 다른 죄수들에게 그 남자들이 처형된 것이 분명해졌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수감된 성직자들에게 접근했다.
마침내 1979년 7월 14일 토요일, 성 삼위일체 축제일에 데자즈매치 카사 볼드 마리암과 사무엘 장군이 소환되었다. 레카 켈람의 옛 오로모 왕국의 계승자인 데자즈매치 카사 월데 마리암, 전 하이레 셀라시에 대학 총장, 황제 하일 셀라시에의 손자, 하일 셀라시에의 손자는 테오필로스가 죽기 전에 마지막 용서를 받기 전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이때 테오필로스가 직접 불렀다. 그는 돌아서서 네브레-아이드 에르미아스에게 면죄부를 요청했고, 데자즈매치 카사와 함께 감옥을 떠났다.
죽음
테오필로스와 그의 동료 죄수들은 아스레이트 카사 왕자의 옛 궁전으로 끌려가 처형되어 그곳에 묻혔다.
1979년 7월 14일 테오필로스는 전선에 의해 목이 졸려 죽었다. 그는 깊은 참호 무덤에 엎드려서 묻혔다.[7] 그의 유해는 나중에 검은색의 긴 사무복과 수도사의 모자로 확인될 것이다.
더그 정권이 몰락한 후 테오필로스의 유골은 아스레이트 카사 왕자의 옛 궁전 터에서 분리되었고, 자신이 남부 아디스 아바바에 지었던 고파 성 가브리엘 교회에서 완전한 의식 상태로 재교배되어 시성되었다.
참고 항목
참조
- ^ "A Brief Biographical Sketch of the Late Patriarch His Holiness Patriarch Abune Theophilos".[데드링크]
- ^ Richard Greenfield (1965). "Ethiopia: A New Political History". F. A. Praeger.
In Ethiopia the (Christian) Church and state are one
- ^ Giuseppe Alberigo, Joseph A Komonchak (2005). History of Vatican. Peeters Publishers. ISBN 978-1-57075-155-4.
- ^ "New Patriarch of Ethiopia Is Approved by Emperor". The New York Times. 13 April 1971. Retrieved 11 June 2021.
- ^ The Living Church. Morehouse-Gorham Company. 1976. p. 12.
- ^ "Patriarch Is Deposed By Ethiopian Regime". The New York Times. 19 February 1976. Retrieved 15 June 2021.
- ^ Dictionary of African Biography. OUP USA. 2 February 2012. p. 7. ISBN 97801953820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