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마하
Alexander Mach알렉산더 마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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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알렉산더 마하 1902년 10월 11일 |
죽은 | 1980년 10월 15일 | (78세)
국적 | 체코슬로바키아어 |
로 알려져 있다. | 정치인 |
제목 | 흐린카 근위대 대장 |
용어 | 1939–1945 |
전임자 | 카롤 시도르 |
후계자 | 폐지된 우편물 |
정당 | 슬로바키아 인민당 |
알렉산더 마하(Alexander Mach, 1902년 10월 11일 슬로벤스키메데르 (오늘날 팔라리코보) – 1980년 10월 15일 브라티슬라바)는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정치인이다. 마흐는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의 극우파와 결부되어 나치즘과 독일에 대한 강한 지지로 유명해졌다.
초년
마흐는 어린 나이에 슬로바키아 국민당에 입당해 보텍 투카의 보좌관으로 그 운동 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투카의 지도하에 마흐는 당 기관인 슬로바키아크와 슬로벤스카 프라브다의 편집장을 지냈으며 1924년 당 정치위원회에 임명되었다.[1] 그는 슬로바키아 인민당의 비경계층에 속했는데, 이 당은 두 파벌의 친나치주의자로 묘사되어 왔다.[2] 그는 또한 1920년대 중반의 로도브라나의 최고 경영자로 활동했다.[1] 당 정책에 관한 영향력 있는 인물인 그가 1938년 당에 준군사무기를 설치할 것을 촉구하는 사설을 쓴 것이 바로 흐링카 근위대 구성으로 이어졌다.[1] 마흐는 1939년 3월 카롤 시도르의 뒤를 이어 이 단체의 사령관을 맡았고, 카롤 무르가슈는 참모총장을 역임했다.[3]
슬로바키아 공화국
마흐는 1938년 뮌헨 협정과 그에 따른 슬로바키아 민족주의의 고조 이후 보이텍 투카, 페르디난드 슈차르찬스키의 측근으로서 전면에 등장했다.[4] 폭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한 마흐는 슬로바키아 선전국장으로서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의 붕괴에 따른 폭력사태를 조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 그는 처음에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에서 선전부 장관을 지냈으며, 1940년 7월 29일부터 1944년 국가가 붕괴할 때까지 투카 정부에서는 내무부 장관직을 맡았다.[1]
마흐가 수상의 정기적인 병세 기간 동안 자주 대리했던 투카처럼 친나치 정책과 신속한 파시스트 국가 수립을 지지했는데, 이는 이념적으로 덜 생각하는 조제프 티소 대통령과의 잦은 충돌로 이어졌다.[1] 티소는 1940년 5월 마흐의 친독적 입장이 마흐의 고위직을 일관되게 지지하는 것을 의미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흐가 흐린카 근위대에서의 그의 지위를 잠시 박탈하는 데 성공했다. 1941년 마흐는 독일인들을 위해 슬로바키아에 강제수용소를 설립하는 계획까지 세웠다. 비록 그 계획은 폴란드와 동부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을 때 포기되었지만 말이다.[1]
만년
나치 독일의 확고한 지지자였던 마흐는 1944년 괴뢰 정부가 붕괴된 후 슬로바키아를 탈출하여 비엔나로 이주했고, 비엔나로 망명하여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 체포되어 그는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협력한 역할로 3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1] 1968년 출소하여 브라티슬라바에 정착하여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주 연금으로 생활하였다.[1]
참조
외부 링크
- ZB의 20세기 언론기록보관소 알렉산더 마하(Alexander Mach)에 관한 신문 스크랩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