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닐라이와 아시나이

Anilai and Asinai

아닐라이아시나이는 파르티아 제국의 두 명의 바빌로니아-유위시인 강도 족속이었는데, 요셉푸스에 의해 공적이 보고되었다.

그들은 미망인 어머니에 의해 비버에게 견습생으로 보내졌다. 주인으로부터 게으름으로 벌을 받은 그들은 도망쳐 유프라테스습지대의 프리부츠가 되었다. 거기에 그들은 불만을 품은 유대인들이 대거 모여, 군대를 조직하고, 목동들에게 강제적인 기부를 하고, 마침내 유프라테스의 포크에 작은 강도국가를 세웠다.

어느 안식일에 그들은 바빌로니아파르티아 통치자에게 놀랐지만, 쉬는 날과 상관없이 싸우기로 결심하고, 바로 그때 반란을 진압하는 데 종사하던 파르티아아르타바누스 3세(10~40CE)는 포탑을 견제하기 위해 그런 용감한 유대인들을 이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들과 동맹을 맺어, 그들이 이미 점령한 바빌로니아의 그 부분의 통제를 맡겼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요새를 건설했고, 그 작은 주(州)는 15년 동안 (c. 18-33) 그 몰락은 아닐라이가 파르티아 장군의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초래되었는데, 파르티아 장군은 전투에서 공격하여 전사하였다. 그는 외국인 아내의 종교를 용인했고, 자기 민족의 종교적 편협함을 엄격하게 만났고, 따라서 그의 추종자 중 일부를 배척하고 그들 사이에 불화를 뿌렸다.

아시나이가 편협한 언변으로 형의 부인에게 독살당한 후, 아닐라이는 자기 부대의 지휘권을 쥐게 되었다. 그는 전쟁으로 그들을 회유하려 했고, 파르티엔 총독이자 왕의 사위인 미트리다테스를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아르타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우려하여 미트리다테스를 풀어주었다. 이후 미트리다테스에 의해 서명적으로 패배한 그는 숲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네하르데아에 대한 바빌로니아 마을들을 약탈하며 살았으며, 그의 자원이 고갈되고 작은 강도 국가가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아닐라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까지 억제되어 있던 유대인에 대한 바빌로니아인들의 불만이 다시 분출되어 유대인들은 박해에서 셀레우치아로 피신하게 되었으나, 망명에서도 원하는 평화를 찾지 못했다.

아닐라이라는 이름은 탈무드 문학의 "ḥanilai"와 동일하다. 예를 들어, 이것은 유명한 흥정가 타닌첨 b. ḥamilas (Bacher, Ag. Pal)의 아버지 이름이었다. 아모르. 3.627).

원천

참조

  • 이 글에는 현재 공개 도메인에 있는 출판물의 텍스트가 통합되어 있다. Singer, Isidore; et al., eds. (1901–1906). "Anilai". The Jewish Encyclopedia. New York: Funk & Wagnal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