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데 아타이에데
António de Ataíde안토니오 데 아타이에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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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탄헤이라 제1백작 | |
카스탄헤이라 백작 | |
테뉴어 | 1532–1563 |
후계자 | 안토니오 데 아타에데, 카스타네히라 제2대 백작 |
태어난 | 1500 포르투갈 왕국 |
죽은 | 1563년 10월 7일 포르투갈 왕국 |
파묻힌 | 산토 안토니오 다 카스타네히라의 수도원 |
가족 | 아타이드 |
배우자 | 안나 데 타보라 |
아버지 | D. 알바로 데 아타에데, 카스탄헤이라 영주 |
직업 | 외교관, 정치가 |
카스타네히라의 첫 번째 백작인 돔 안토니오 데 아타데(C. 1500년 ~ 1563년)는 어린 시절 친구였으며 포르투갈의 존 3세(D. 주앙 3세. 그는 몇몇 유럽 국가들에서 외교관으로 일했고, 왕의 장관을 지냈으며 포르투갈의 식민지인 브라질을 향한 정책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기
그는 1500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돔 알바로 데 아타에데, 센호르(주) 다 카스타헤이라(주)는 비세우 공작이 요하네스 2세를 상대로 한 음모에 가담했고, 1484년부터 1496년까지 스페인에서 유배되었다. 그는 요한의 후계자 마누엘 왕에 의해 포르투갈 왕국으로 다시 초대되었다. 그는 포르투갈로 돌아온 후 두 번째로 결혼했다. Antonio de Ataide는 이번 두 번째 결혼에서 유일한 아들이었다.[1]
그는 동갑내기인 마누엘 1세의 후계자 인판테 돔 주앙(보다 늦게 존 3세가 됨)과 함께 법정에서 양육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요한 3세는 20대 때 여러 유럽 국가에 공관에 그를 파견하여 1525년 그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한 뒤 1530년 베도르 다파젠다(재정부 장관 또는 재상)를 임명하였는데,[2] 이는 1557년 왕이 사망할 때까지 유지하게 될 직책이다. 그는 1532년에 그를 카스탄헤이라 제1백작(Castanheira)으로 만들었다.[1]
아타이에드는 브라질의 주장체제가 수립되고 이후 1549년 살바도르 다바야 시에 브라질의 일반정부가 수립된 것을 주요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왕의 측근으로서 그는 그의 1촌 중 두 명인 마르팀 아폰소 데 소사와 토메 데 소사를 브라질 식민지 정부 1순위로 임명한 핵심 인물이었다.
J D[3] M 포드가 존 3세의 레터즈 오브 레터즈라는 제목으로 조립하여 간행한 킹 요한 3세의 편지 모음은 아타이드에 대한 참고문헌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가 왕의 고문과 장관으로서 맡은 역할에 대한 상당히 명확한 그림을 제공한다.
1557년 주앙 3세가 죽은 후 궁정을 떠났다. 1563년 10월 7일 사망하여 산토 안토니오 다 카스타네히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4]
결혼과 아이
그는 모가두로 4대 노호(주)의 딸인 아나 데 타보라(Ana de Mogadouro 그들은 7명의 아이를 가졌다. 그 아이들 중 장남인 돔 안토니오 데 아타에데는 카스타네히라 2대 백작이었다.
참조
- ^ a b Freire, Anselmo Braamcamp (1921). Brasões da Sala de Sintra - Livro Primeiro. Coimbra, Portugal: Imprensa da Universidade de Coimbra. pp. 418 - 421.
- ^ Pelúcia, Alexandra (2007). Martim Afonso de Sousa e a sua linhagem: a elite dirigente do Império Português nos reinados de D. João III e D. Sebastião. Lisboa: Faculdade de Ciências Sociais e Humanas, Universidade Nova de Lisboa. p. 159.
- ^ "Letters of John III, King of Portugal, 1521 - 1557". Harvard University Press.
- ^ "Igreja Matriz de Castanheira do Ribatejo". Retrieved 15 October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