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K.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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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K. 왓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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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주프랑스 미국 대사 | |
재직중 1970년 5월 6일 – 1972년 10월 30일 | |
대통령 | 리처드 닉슨 |
선행자 | 사르겐트 슈라이버 |
성공자 | 존 N. 어윈 2세 |
개인내역 | |
태어난 | 아서 키트레지 왓슨 )1919년 4월 23일 미국 뉴저지 주 서밋 |
죽은 | 1974년 7월 26일 미국 코네티컷 주 뉴캐넌 | (55세)
친척들. | 토마스 J. 왓슨 (아버지) 토마스 J. 왓슨 주니어 (형) |
교육 | 예일 대학교 |
아서 키트레지 "딕" 왓슨 (Arthur Kitredge "Dick" Watson, 1919년 4월 23일 ~ 1974년 7월 26일)은 미국의 사업가 및 외교관이었다. IBM 세계무역공사 사장과 주프랑스 미국대사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인 토마스 왓슨은 IBM의 창립자였고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IBM이 국제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감독했다. 그의 형 토머스 J. 왓슨 주니어는 1952년부터 1971년까지 IBM의 사장이었고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다.
초년기
아서 K. 친구들과 동료들에 의해 "딕"으로 알려진 왓슨은 뉴저지 주 서밋에서 태어났다.[1] 그는 하치키스 학교와 예일 대학에 다녔다.
경력
1940년대 후반, 왓슨은 그의 아버지인 IBM의 토마스 왓슨 Sr.를 도와 IBM의 미국 밖에서 IBM의 사업을 담당했던 자회사인 IBM World Trade Corporation의 설립과 조직을 도왔다. 딕 왓슨은 IBM World Trade Corporation의 사장과 후에 이사장으로서 전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21년간의 지도자 생활 동안, 그는 그의 시간의 상당 부분을 종종 그의 가족과 함께 해외 여행을 하는 데 보냈다. 그는 수많은 새로운 국가 운영을 확립하고, 경영자를 선발하며, 국제 사업의 확장을 이끌었다.
1947년 2월 IBM에서 시작했을 때 딕 왓슨은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했다. 이후 5년 동안 그는 스페인어와 독일어를 숙달하고 포르투갈어에 대한 실무지식을 함양하기 위해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을 보냈다. 이러한 언어 능력은 왓슨이 국제 생활을 하는 동안 중요한 자산이었다.
왓슨이 1949년 설립과 동시에 IBM 세계무역공사 자회사에 입사했을 당시 미국 외 IBM의 매출은 5000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가 1970년 프랑스 대사로 물러났을 때 IBM 세계무역공사 매출은 25억 달러 이상으로 성장했고 108개국에 사업장을 설립했다. 당시 세계무역사업에서 얻은 순이익은 미국 기업의 순이익과 같았다.
딕 왓슨은 1948년 아버지와 함께한 첫 유럽 출장부터 전후에 결국 서유럽이 통일된 경제공동체로 부상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유럽경제공동체 형성을 지지하고 IBM 세계무역공사가 공동시장 내에서 제조 및 개발 역량을 쌓은 최초의 미국계 기업 중 하나임을 확실히 했다.
그는 또한 미국의 경제계가 세계의 개발도상국을 돕는 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지역 경제를 발전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에 두 개의 미국 정부 임무를 수행했다. 1964년 왓슨은 뉴욕 상원의원 제이콥 하비츠 등과 함께 페루 리마의 투자기관인 ADELA를 결성했다. 전 세계 은행과 기업의 자금 지원을 받아 중남미 지역 기업을 위한 자본을 제공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이바단 대학에 IBM 교육 시설을 설립하여 컴퓨터 기술 교육을 제공하였다.
딕 왓슨은 대통령 존 F의 요청에 따라 재임했다. 케네디와 린든 B. 존슨은 미국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두 개의 패널에 올라섰다. 그가 존슨 대통령을 향했던 14명의 패널은 나중에 미국 국제개발기구가 채택한 많은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넬슨 록펠러 뉴욕 주지사의 미국인을 위한 비판적 선택 위원회의 일원이었다.
딕 왓슨은 1967년과 1968년 국제상공회의소 회장으로서 "프리어" 무역의 국제적인 옹호자가 되었다. 1968년 그는 데이비드 록펠러 미국 무역 비상대책위원회와 함께 미국 내 60개 대기업 총수들이 결국 동참한 무역협회도 설립했다. 그것의 목적은 미국의 보호주의에 대항하여 지지를 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1970년 왓슨은 주프랑스 미국대사가 되기 위해 IBM 세계무역 이사회 의장과 IBM 부회장 겸 이사직을 사임했다. 그는 또한 당시 주프랑스 대사였던 황첸을 통해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의 첫 공식 연락관이기도 했다.
왓슨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후원자로 박물관의 수탁자[2] 및 박물관 100주년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3]
딕 왓슨의 국제 관계에 대한 공헌은 여러 나라들로부터 우등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바티칸의 승마훈장을 받았다. 실베스터 그는 대사관에 앞서 이미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상태였다. 프랑스에서 돌아오기 전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그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 중 하나인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을 수여했다.
1972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왓슨은 IBM의 이사회 및 집행위원회에 재선임되었다. 그는 또한 콘의 스탬포드에 위치한 벤처 캐피털 회사인 당키스트를 설립했다.
아서 K. 왓슨은 1974년 7월 26일 코네티컷주 뉴카나안에서 추락의 결과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예일대의 컴퓨터 과학 빌딩은 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원천
참조
- ^ 참모. "아더 K. 1972년 3월 14일자 뉴욕타임즈 왓슨" 2011년 2월 19일에 접속. "토머스 J. 왓슨의 작은 아들인 아서 키트레지 왓슨은 1919년 4월 23일, N.J. 서밋에서 태어났다."
- ^ 아서 K. 왓슨과 프랜시스 데이 로저스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수탁자를 선출했다. 보도자료,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969년 9월 2일) 2014년 8월 5일 회수
-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Centrenion, 1949, 1960–1971(bulk 1967–1970) 2019년 4월 12일 웨이백 기계에 보관된 조지 트레셔 기록의 지원 찾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014년 8월 5일 검색됨
- ^ 1974년 8월 7일 컴퓨터월드 "아더 왓슨이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