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탄 비행장
Bataan Airfield바탄 비행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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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공군의 일부 | |
필리핀 루손 | |
![]() 1942년 바탄 필드 근처의 피난처 | |
좌표 | 14°27′14.81″N 120°34′06.63″E / 14.4541139°N 120.5685083°E/ (대략) |
유형 | 밀리터리 비행장 |
사이트 정보 | |
제어 대상 | 미국 육군 공군 |
사이트 기록 | |
빌드됨 | 1941 |
사용중 | 1941-1942 |
전투/와이어 | 필리핀 전투(1942) |
바탄 비행장은 필리핀 루손에 있는 전시 미군 공군 비행장이었다. 필리핀 전투(1942년) 중 일본 제국군이 점령했다. 비행장은 바탄 성 남 라마노 루카닌 마을 근처에 있었다.
역사
이 비행장은 극동 미군(USAFFE)이 예비전투 진지(RBP)로 철수한 뒤 바탄에 남아 있는 3개 비행장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바탄 반도의 남쪽 끝에서 수 마일 떨어진 주앙팅 강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필드의 건설은 아마 1941년 9월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바탄 필드는 하나의 활주로(NW-SE)로 구성되었고, 육군 기술자들에 의해 정글 밖으로 해킹되었다. C사의 요소들, 803 엔지니어 (Aviation) (Separate)는 1941년 크리스마스 날에 현장에 도착하여 활주로를 확장하고 보수하고 극동 공군(FEAF)의 인력과 함께 항공기에 대한 경사를 건설했다. 밭은 잘 위장되어 있었다. FEAF는 일본의 수많은 폭격과 스트래핑 공습으로 인해 항공기를 잃지 않았다.
출처: 메모 [Col.] H[엔리] H. S[틱니]에서 G-4, [필리핀 부서], 1941년 10월 14일, 제목: Weekly Report of Department Engineers Construction, Casey Files; Office of the Department Engineer (ODE), Construction Progress Report for Semi-Monthly Period Ending November 15, 1941; CMSGT Clarence Kinser, Interviews, March 26 and May 4, 1999; Letter, Blair Robinette to William Bartsch, February 24, 1983; Statement (draft), Maj. Gen. 휴 J. 케이시, N.D. 피험자: 필리핀의 에어드롬 건설[1941년 10월 8일 – 1942년 5월 6일] 페이지 5, 케이시 파일, 폴더 1; 페르티그, 게릴레로, 73; 윌리엄 바츠흐, 시작부터 망함, 222, 257페이지.
바탄으로 후퇴
12월 24일, 제24추구단, 그 후 클라크 필드에서 루손의 바탄 반도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2년 1월 24일과 10일 사이에 이 대피가 이루어졌다. 본부는 클라크 필드에서 발랑가로 먼저 옮겨졌고, 거기서 마리블레스 컷오프에 있는 마리블레스 강으로 옮겨졌다. 24일 사령부가 설치됐다.[1]
24, 18대의 P-40Es와 P-40B 워호크의 나머지 항공기는 루바노와 오라니필즈에 있었다. 전선이 다시 바탄 반도로 떨어지면서 이들 항공기는 다시 이동돼 바탄 필드에 집중됐다. 그곳에서는 편대가 한 부대로 접혀져 있었기 때문에 사병들이 정비하고 그룹 전체에서 선발된 조종사들이 비행했다.[1]
운영
바탄 필드에서 24일 열린 초동작전은 1월 4일 코레기도르에 대한 일본의 폭탄 공격에 대한 요격 임무로 이뤄졌다. 적기가 격추되지 않은 요격 이후 민다나오 델 몬테필드로 P-40 9대가 남하했다. 두 대의 비행기가 도중에 분실되었다. 1월 26일까지, 감소는 바탄에서 P-40의 힘을 7대로 감소시켰고, 그 비행기들은 마닐라 근처의 점령된 니콜스와 닐슨 필드의 공격을 위한 조각 폭탄들을 탑재했다. 한 비행기는 이륙 중 추락했고, 다른 비행기들은 붙잡힌 비행장에서 일제의 비행기에 대한 스트래핑과 폭격을 감행했다. 정보당국은 적어도 37대의 일본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고 휘발유와 기름 드럼통에 불이 붙는 등 이번 공습이 성공적이었다고 전했다. 3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습격자들은 카바카반 비행장으로 돌아와 재장전, 후송, 2차 공격을 위해 출발했지만, 화재로 인해 양쪽 비행장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로 인해 되돌아와야 했다.[1]
1월 한 달 동안, 정찰 비행은 링가이엔 만만큼 북쪽으로 한 두 대 혹은 때로는 세 대의 P-40에 의해 수행되었다. 월말까지 살아남은 모든 비행기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날 수 있었다.[1]
2월 1일, 4대의 P-40이 해변 방어군을 압도했던 아갈로마[2] 포인트에서 일본 상륙기동대를 공격했다. 미국의 해군 행동과 P-40이 합동으로 요원의 공격을 가함으로써 그들의 강화를 막았다. 2월 5일 아침, 탱크로 보강된 미군은 상륙당을 파괴할 수 있었다. 지난 9일에는 나포된 카비테 해군기지 상공에서 P-40 6대로 사진정찰이 이뤄졌다. 바탄으로 돌아가는 귀성길에서, 비행기는 6개의 제로스가 점프했다. Zeros는 모두 파괴되었고, P-40 중 한 대는 소실되었다.[1] 이 공격에 네이비 제로스가 고용된 것 같지는 않다. 더 가능성이 높은 것은, 그들은 나키지마 키-27 네이트 육군이었다.[3]
3월 2일 수빅베이에서 일본 선박에 대한 공격이 실시되었다. 500파운드 폭탄 1개를 실은 P-40 4대가 13시경에 선박의 집중 공격을 했다. 이들 항공기는 선박을 공격한 뒤 나포된 수빅만 해군기지에서 지상 설비를 계속 공격해 물자가 파손되고 파괴된다. 몇 척의 배가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둠이 깔릴 때까지 공격이 계속되었다. P-40 1대는 실종됐고 3대는 바탄필드로 돌아오는 길에 추락했다. 적의 손실은 4만 4천 톤의 선적과 더불어 가솔린 공급 및 기타 장비로 추정되었다.[1]
2월 1일부터 4월 7일까지, 24일은 델 몬테 필드에서 바탄까지 의료용품을 운반하고, 델 몬테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대한 인력과 기록도 함께 했다. 이들 항공편은 세부와 일로일로에 있는 민간인들로부터 명령을 받은 두 명의 민간 비크래프트와 한 명의 와코도 사용된 구식 해군기에 의해 만들어졌다.[1]
바탄필드에서 일부 B-17이 3월 27일 호주에서 델 몬테필드로 날아올라 바탄반도를 포위하고 있는 일본의 봉쇄를 뚫는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룹의 P-40 4대와 필리핀 공군 세베르스키 P-35는 민다나오에 남아 있던 4개 중대의 P-40과 호주에서 선적된 3개 중대의 P-40이 합류하게 된다. 4월 5일 폭격기들에 대한 정찰과 전투기 보호를 위한 최종 준비가 완료되었다.[1]
그러나 4월 7일 일본군은 2d군단 전선을 격파하고 바탄에서 코레기도르로 총퇴각 명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24호는 바탄 필드에서 철수하고 델 몬테 필드에서 재편성할 필요가 있었다. 이 그룹의 마지막 4명의 P-40은 4월 8일 바탄을 떠나 남쪽으로 향했다. 바탄 필드는 1942년 4월 9일 미국 항복의 일환으로 붙잡혔다.
최종작업
4월 10일, 레가즈피, 세부, 일로일로, 다바오에 집중하여 바탄에 대한 일본군에 대한 계획된 폭격 임무가 수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전투기들은 전 지역을 정찰하고 다바오에 대한 스탭 공격을 하여 지상의 적기 몇 대와 공중 두 대를 격파하였다. 미국의 손실은 B-17 1척과 P-40 1척이었다. 일본의 손실은 경 순양함 1척, 수송선 여러 척, 다바오에서의 지상 설비 손상이었다. B-17은 급습 후 호주의 다윈으로 돌아왔다.[1]
24추격대의 나머지 기종들은 일본군이 민다나오 3곳에 상륙해 미군을 포위하는 5월 1일까지 이달 말까지 민다나오 사령부 정찰기를 띄웠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