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친 전투(1504)

Battle of Cochin (1504)
코친 전투
인도양에서 포르투갈 전투의 일부
날짜1504년 3월 16일 – 1504년 7월 3일
위치
인도 고치
결과

코치-포르투갈어 결정전 승리

  • 자모린 제국주의 시도는 중단되었고 코친 왕국의 독립은 보존되었다.
  • 인도에서 포르투갈인의 계속적인 존재 확보
호전성

Flag Portugal (1495).svg포르투갈 제국

Cochin flag.svg코친 왕국

캘리컷

바살 말라바리 주(에다팔리, 크랑가노레, 코탁칼, 타누르 왕국, 비에포레, 찰리얌, 파리야푸람 등)[1]
지휘관과 지도자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
코친의 후계자 칸다고라

트리맘파라라자

자모린 라자
나우베이다림, 칼리컷의 후계자

에다팔리의 카이말, 엘란콜
포르투갈어 130명
코차이나 9500
선박 5척(갤런 2척, 캐러벨 1척, 소형 보트 2척)
70,000–84,000
선박 260척
사상자 및 손실
무시해도 좋거나 죽어도 안 함 19,000명 사망
(c. 활동 중인 5,000명, 질병에 걸리는 13,000명)

때때로 제2차 코친 포위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코친 전투는 1504년 3월과 7월 사이에 육지와 바다에서, 주로 트리맘파라 라자와 연합한 코친포르투갈 수비대와 칼리쿠트 주의 자모린과 바살 말라바리 주의 군대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대결이었다.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가 이끄는 작은 포르투갈 수비대의 유명한 영웅들은 수백배 더 큰 침략군을 물리쳤다. 칼리코트의 자모린에게는 굴욕적인 패배가 증명되었다. 그는 코친을 정복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반대파를 분쇄할 수 없는 그의 무능은 그의 신하와 우방들의 믿음을 훼손시켰다. 자모린은 그 여파로 인도 말라바르 주에 대한 전통적인 권위를 많이 잃었다. 코친의 보존은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서 계속 주둔하는 것을 보장했다.

배경

10세기에 체라 주가 분열된 이후, 도시국가인 칼리코트(포트)의 통치자였다.자모린(Samoothiri Raja, '바다의 군주')으로 알려진 갈레쿠테; 지금, 코지코데(Kozhikode)는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대부분의 작은 주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오버로드로 인식되어 왔다. 자모린의 지배하에 캘리컷은 상업도시로 성장하여 케랄라 고추 무역의 주요 엔트레포트와 더 동쪽에서 출하된 다른 향신료의 주요 엠포리움으로 부상하였다(향신료 무역 참조).

1498년 포르투갈인의 인도행 첫 여행에서 바스코가마는 즉시 칼리코트로 진출하여 자모린과의 상업 조약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가마의 영향을 받지 않은 늙은 자모린은 포르투갈인들이 칼리코트의 시장에서 향신료를 사는 것을 허락했지만, 그들에게 더 큰 특권을 주려 하지 않았다.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제2의 인도 무적함대, 1500년)의 후속 원정대가 더 잘 준비되었다. 그 사이에 늙은 자모린이 죽었고, 카브랄은 새로운 자모린과 조약을 협상했고, 칼리코트에 포르투갈 공장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몇 달도 되지 않아 포르투갈 요원들과 자모린이 개입하기를 거부한 이 도시에 아랍 무역업자들을 세운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1500년 12월, 폭동이 일어나 칼리코트의 공장이 오버런되고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학살되었다. 카브랄은 이 사건에 대해 자모린을 비난하면서 자모린이 그들의 손실을 보상하고 모든 아랍 무역상들을 도시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자모린이 거절하자 카브랄은 칼리코트 시를 폭격했다.

인도 말라바르 해안 c. 1500

이리하여 포르투갈과 캘리컷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칼리코트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말라바르 해안의 몇몇 도시국가들 사이에서 재빨리 지역 동맹국들을 찾았다. 코친(코침, 코치), 칸나노르(카노르, 칸누르)와 퀼론(쿨랑, 콜람)이 포구를 열고 포르투갈인을 초청했다.

그 뒤를 이어 인도에 온 포르투갈의 아르마다들은 칼리코트를 일상적으로 폭격하고, 그녀의 배에 미리 태우며, 상업적인 교통을 인도에서 멀어지게 했다. 자모린은 해상의[4] 포르투갈 함대에 도전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알게 되었다 – 배와 대포의 기술적 차이는 너무 컸다 – 그러나 육지에서는 그 차이가 거의 편향되지 않았다. 인도에 포르투갈인이 주둔한 것은 결국 소수의 상업적 요원으로만 구성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를 받으러 왔었다. 자모린은 그가 말라바르 주에 대한 전통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향신료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면 포르투갈인들은 떠나거나 조건을 협상하고 분별 있는 평화를 이루도록 강요받을 것이라고 계산했다.[5] 그것은 그의 적국 코친, 칸나노어, 퀼론에게 그들의 시장을 포르투갈인들에게 폐쇄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을 의미했다.[6]

원칙적으로 자모린의 계획은 건전했다. 포르투갈인들은 말라바르 해안의 주민들 중 일부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들의 함대는 소름끼치는 호출 카드를 남겼고, 통치자들에게 터무니없는 요구를 했고, 해안 전역의 무역과 일상 생활에 지장을 주었다.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포르투갈 무역에 대한 전반적인 불매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말라바리 도시들을 설득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나 코친은 자모린의 불합리한 요구를 거절했다.[7]

제1차 코친 포위전(1503)

코친 시(코침, 고치)는 펨바나드 석호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성장하는 상업 도시였다. 집권 힌두교 왕자인 운니 고다 바르마, 코친의 트리맘파라 라자는 자신의 입장이 안전하지 않았다. 형식적으로, 그는 석호의 공식적인 지배층인 에다팔리(Repelim)에서 석호 건너의 선후배 가족들에게 자회사인 마이너 왕자였다. 사실, 트리뭄파라는 가족간의 다툼 중에 있었고, 원래 그의 친척들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포르투갈의 동맹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꽤 있다.[8]

코차이나 인구의 정서는 포르투갈인에 대한 반감이 컸다. 코친은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고, 사람들은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무역이 전반적으로 중단되어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게다가, 코친은 상당한 이슬람교도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 아랍인과 현지 마필라스인 –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을 향한 그들의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도시의 생존이 의존하는 바로 그 상인이었다. Cochines 인구는 현 상황의 요점을 알 수 없었다.

분노를 느낀 트리맘파라 라자는 포르투갈의 요인 디오고 페르난데스 코레아와 의 조수인 루렌소 모레노와 알바로 바즈에게 자신의 궁전을 지키게 하고, 도시의 시장을 걸어 다닐 때 항상 충실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케랄라 후미트랜드에 대한 자모린의 영향으로 코친의 후추 공급의 상당 부분이 말라붙어 있었다. 포르투갈의 요인들은 코친의 향신료 시장에 대한 예비 조사 결과에 실망했고, 트리름파라 라자는 더 유망한 다른 도시들, 특히 퀼론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뼈아프게 알고 있었다. 만약 포르투갈인이 코친을 버린다면 트리맘파라는 그의 진통에 대해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을 것이다.

16세기 포르투갈의 말라바레스 네어 전사 묘사

트리맘파라의 자문위원들은 포르투갈 동맹에 반대하며 자모린과의 화해를 추진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그에게 전쟁이 일어나도 코차이나 네어스의 지속적인 충성심을 당연하게 여길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리맘파라 라자는 포르투갈인들을 버리기를 거부했다.

1503년 3월 포르투갈 함대(4무적함대)가 리스본으로 다시 출항하자마자 자모린은 적을 위협하여 순응하기로 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코친을 방어하기 위해 작은 해안 순찰대를 남겨두었다. 그러나 순찰대 지휘관인 비센테 소드레는 자모린의 군사 준비설을 일축하고 순찰을 받아 홍해 입구를 순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여름이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4월에 자모린은 코친에 대항하여 5만여 명의 대규모 칼리코트 군대를 이끌었다. 도중에 그는 동맹인 말라바리 영주들, 특히 에다팔리의 통치자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트리맘파라의 아들 나라얀은 에다팔리(레펠림) 인근 포드를 넘어 칼리쿠트군의 통행을 저지하기 위해 코차이나 병력 5,500명을 이끌고 달려왔다. 나라얀은 용감하게 두 차례의 칼리코트 공격을 격퇴했지만 결국 자모린의 요원들은 뇌물과 압류로 코차이나 네어스의 상당수를 전선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다음 공격에서 나라얀은 남은 병력과 함께 제압되어 전사했다.

나라얀의 용감한 스탠드는 아버지와 포르투갈 손님들에게 코친을 물 건너 비핀 섬(바이핌)으로 피신시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자모린은 코친 시를 점령하고 트리름파라에게 포르투갈 요원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비핀의 자연방어와 악천후로 인해 섬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지 못했다. 좌절한 자모린은 코친 성을 불태우는 데만 국한하고 날씨가 좋아진 후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코친을 불태우기 전에, 칼리쿠트의 사모린은 고대 신성한 돌을 제거했는데, 그 위에 전통적으로 말라바르의 옛 체라 왕들은 바다의 영주들과 모든 말라바리 주의 지배자로 여겨졌다. 이 신성한 돌은 원래 고대 말라바리의 수도 크랭가노레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그 후 코친으로 옮겨졌다. 자모린은 이제 그것을 다시 한 번, 에다팔리로 옮겼다.][9]

주 칼리컷군은 같은 8월에 귀환했고, 다시 한번 트리름파라 라자와 포르투갈 요원들은 비핀에 은신해 있었다. 자모린과 말라바리 동맹국들은 이 섬에 대한 공격선을 준비하던 중 도착하는 제5 무적함대의 선봉장인 프란시스코알부커키 휘하의 무장한 포르투갈 함정 6척이 코친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목격했다. 연합군 말라바리 군대는 즉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모린은 마지못해 포위를 해체하고 칼리코트로 돌아왔다.

준비

코친은 때를 틈타 구원받았지만, 자모린의 군대는 제5군단이 떠나자마자 내년 봄에 반드시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들은 즉시 함대가 없는 상황에서 코친의 방어를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제1차 업무지시에서는 포르투갈 함대가 펨바나드 석호를 순시하며 자모린의 포위작전에 힘을 실어준 현지 왕자들을 응징했다. 이 캠페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에다팔리의 포루투갈인 잔혹한 자루로 도시를 파괴하고 큰 유혈사태를 일으킨 것이었다. 작은 마을과 마을은 비슷한 운명을 맞았거나, 재빨리 그들의 충성을 코친에게 넘겼다. 이런 식으로 코친의 트리름파라 라자(Trimumpara Raja)는 펨바나드 석호의 지배자로서 포르투갈의 무기에 의해 강제 징용되었다.[10]

그 사이 포르투갈 지휘관들은 트리맘파라 라자를 설득하여 코차이나 반도(현재의 고치 요새로 알려진 지역)의 가장자리에 요새를 세울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옛 도시 코친(현재의 마탄체리 주변)의 서쪽(지금의 마탄체리 주변)에 조금 떨어진 곳에 요새를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마누엘 데 코힘 요새는 이름 그대로 아시아 최초의 포르투갈 요새였다. 트리름파라가 직접 공급하는 지역 코코넛 야자나무로 지은 이 요새는 두어 달 만에 완공됐다.

그것이 끝나자마자 포르투갈 함대 사령관 아폰소 알부커키는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갑자기 칼리코트의 자모린과 평화 조약을 맺는데 동의했다. 그것은 아마도 양측에 대한 냉소적인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 아무도 평화가 유지되기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벌어주었다. 몇 주 동안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의 방어를 끝마칠 수 있었고, 자모린은 상대방에게 추행을 당하지 않고 그의 군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크랭가노레에서 향신료 수송을 놓고 곧 다시 교전이 벌어져 평화가 깨졌다.[11]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 코친의 마누엘 요새 초대 사령관

1504년 1월 말, 앨버커키의 5번째 무적함대는 마침내 코친을 떠났다. 그들은 기사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의 지휘 아래 코친의 마누엘 요새에 150여 명의 무장한 포르투갈군의 소규모 수비대(일부에서는 130명 이하밖에 안 된다고 한다)를 남겨두고 떠났다. 또한 파체코에게는 카랙(다이오고 페레이라 휘하의 나우 콘세상) 1척과 캐러벨 2척(페로 라파엘의 가르리다, 디오고 피레스(또는 페레스) 휘하의 또 다른 무명함) 등 3척의 배가 주어졌다.

[주: 이 '디오고 페레이라'는 다름아닌 소코트라를 발견하고 그곳에서 윈터치를 한 제5군단 제3대대대의 잃어버린 선장 디오고 페르난데스 페레이라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무렵 인도양을 단독 횡단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우 콘센상호가 그의 배가 될지도 모른다.][13]

인도 남부의 정보망은 자모린과 트리름파라 모두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을 정도로(놀람의 요소는 말라바르 해안에서 실제로 착취할 수 있는 전술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곧 캘리컷에 대규모 침략군이 집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전과 달리 이 군대는 장비가 더 잘 갖춰져 있었다. 자모린은 터키인으로부터 대규모의 화기 부대(아르쿠스 및/또는 머스크에트)를 받았었다. 제4 무적함과 함께 비밀리에 인도에 온 베네치아 요원 두 명은 칼리코트가 더 나은 포병을 양성하는 것을 돕느라 바빴다. 최소 5개의 유럽 대형 대포와 200개의 소형 보트포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에다팔리, 크랑가노레, 코탁칼, 타누르 왕국(베타트나드의 벳타트 라자), 비포레, 찰리얌, 파리야푸람 등의 자모린의 동맹국들에게 통지가 발송되었다. – 보조 병력을 준비한다.[14]

자모린이 경고한 코친의 크기와 팔의 뉴스가 전해졌다. 코친은 전년도 포위전에서 패한 적이 있었다. 비록, 펨바나드 백워터들의 영주로서 그의 새로운 위치에서, 트리맘파라 라자는, 개념적으로, 석호 주변으로부터 3만 명의 군대를 호출할 수 있지만, 최대 8천 명의 병력이 그의 부름에 응할 수도 있고, 나머지는 "적극적으로 또는 수동적으로 적대적"일 수도 있다.[15]

포르투갈 수비대는 머지않아 코친을 통해 머물 생각이 없었고, 자모린의 군대가 도착하는 순간 배들이 포르투갈인들을 칸나노레나 퀼론으로 대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곧 퍼졌고, 코차이나를 떠나 공격의 맹렬한 공격을 견뎌내고 있었다. 코친의 인구가 도시를 피난시키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자모린과의 화해를 모색하라고 조언하는 그의 조언자들인 트리맘파라 라자 자신도 망설이기 시작했다.

두아르테 파체코의 첫 번째 업무지시는 트리맘파라 라자의 결심을 굳히는 것으로, 포르투갈인들이 그곳에 머물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지난해 포위 공격 당시 포르투갈 해안 경비대 비센테 소드레가 그들을 어떻게 버렸던가를 기억한 트리뭄파라는 파체코의 말을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운명이 포르투갈인에게 치명적으로 얽매여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심을 털어내고, 도시 방어를 그들의 손에 맡겼다. 트리맘파라는 죽음의 형벌로 코친을 떠나는 사람을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자신의 신하와 병사들에게 두아르테 파체코의 명령을 마치 자신의 명령처럼 다루라고 명령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코친의 무슬림 상인 공동체였다. 포르투갈인들은 그들의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자모린을 위한 '제5열'로 의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친은 그들의 식량 공급을 무역에 의존하고 있었고 만약 포위 공격이 길어지면 도시의 운명은 그들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그들의 협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의 방식에서 벗어났다. 그는 코친의 대표적인 무슬림 상인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집회에 연설을 했다. 그는 그들의 지도자들 중 몇 명을 (분명히, 특정 무함마드 마라카르인)을 공동 선택했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몇몇 주요 이슬람 가정들을 인질로 잡고, 그들을 전쟁 기간 동안 비핀 섬으로 감시하에 배출시켰다.[16] 자모린의 요원들이 도시에 불을 지르거나 대피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비핀에도 대규모 식료품점(, 설탕 등)이 비축됐다.[17]

전주곡에서 두아르테 파체코는 자모린 편을 든 에다팔리 주변의 몇몇 작은 정착촌에 몇 차례 소규모 습격을 가했다. 그들의 전략적 가치는 미미했다. 즉, 포르투갈인들이 싸움을 갈망하고 있다는 코친족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더 많은 힘과 허세를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습격으로 인해 두 개의 포르투갈의 캐러벨 중 한 곳이 손상되어 다가오는 대결에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캄발랑의 고개

정보망으로부터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자모린의 군대와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이동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받았다. 자모린 자신은 57,000명의 강력한 칼리컷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일부는 8만4,000명을 인용하며, 이는 보조군을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18] 물론 이들 대부분은 기껏해야 아주 가볍게 무장하고 있었다.)[19] 자모린의 군대는 두 명의 베네치아 기술자가 주조하는 5개의 유럽식 대형 총기와 거의 300개의 작은 인도식 총기를 가지고 오고 있었다. 군대는 크랭가노레 부근에 집결하여, 펨바나드 석호의 동쪽 둑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고, 쿰발람(캄발랑)의 밀림 통로를 건널 예정이었다. 그 포드는 폭이 겨우 100m에 불과하고 허리 깊이가 있으며, 조수간만의 조수에도 통행할 수 있다고 했으므로, 광활한 칼리코트 군대는 여객선 하역하는 복잡하고 난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캘리컷 함대는 160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약 76척은 파라우스[20](항해와 동력으로 움직이는 말라바리 군함, 흔히 유럽 작가들에 의해 푸스타갈리어트[21] 비유된다)였다.파루는 2개의 폭탄주, 5개의 머스크와 25개의 궁수로 무장되어 있었다.[22] 나머지 배들은 더 작고, 54개의 별자리[what language is this?] 30개의 음색(카노)이 각각 대포와 16명의 병사들이 있었다.[23] 함대는 사모린의 조카(그리고 칼리쿠트의 후계자) 나우베아 다링(나우베아다림)의 지휘하에 있었고, 에다팔리의 영주(카이말)[what language is this?] 엘카놀을 2인자로 두고 있었다. 함대는 크랭가노레 근처의 콘센트를 통해 펨바나드 석호로 미끄러져 들어간 다음, 보병과 동행하고 보호하면서 석호를 따라 항해할 예정이었다.

자모린의 계획을 충분히 알게 된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포르투갈-코중국의 군대가 쿰발람 포드(파소 캄발랑)에서 군대의 통행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그의 병력을 신중하게 분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디오고 페르난데스 코레아와 그의 두 조수인 루렌소 모레노와 알바로 바즈를 포트 마누엘에 39명의 부하로 배치했다.나우 콘센스상에는 25명의 병력과 포병, 5명의 전문가 포병들이 장전되어 디오고 페레이라(약칭 디오고 페르난데스 페레이라?)의 지휘 아래 배치되어 포트 가까이에 머물면서 코친 시를 방어하도록 지시했다(베바나드 아웃렛을 동시에 경비하고 칼리쿠트 배가 그곳을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것이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페로 라파엘의 지휘 아래 캐러벨 중 하나에 26명을 배치했다. 아직 수리 중인 다른 캐러벨은 파체코가 두 개의 말라바레 바테이스(정점에 비견될 만한 것)를 명령하고, 한 명은 디오고 피레스 밑에, 다른 한 명은 22명의 부하를 자기 밑에 두었다.[24] 각각의 바텔4개의 회전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 세 척의 선박은 금발람 포드를 잡으려 할 것이다.

중국 동족 노동자들은 미사일 발사로부터 승무원을 보호하기 위해 캐러벨과 바테리스의 양옆에 설치된 두꺼운 나무판자, 두 손가락 두께의 탑 방패(paves)를 제작했다. 돛대에 밧줄 그물을 걸었고, 배의 갑판 곳곳에 솜을 가득 채운 자루들이 놓여 있었으며, 포탄으로부터 배를 보호하기 위해 사방을 걸어두었다.[25] 안제디바 섬에서 좋은 단단한 돌덩어리가 보트에 실려 내려와 코차이나 인부들에 의해 포르투갈 포탄으로 조각되었다.[26] 코차이나 근로자들은 또한 한쪽 끝에서 불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진 3.5m(12ft)짜리 기둥을 조용히 대량 생산해 왔으며, 다른 쪽 끝에서 불에 의해 단단해졌으며, 십자형 기둥으로 단단히 고정될 수 있도록 미리 깎은 홈을 가지고 있었다.[27]

코친의 트리맘파라 라자는 그의 군대 대부분이 5천명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남겨졌다. 그는 약 500명의 네어스를 콤발람 고갯길에서 두아르테 파체코의 작은 함대에 합류시켰고, 나머지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남겨두었다.

펨바나드 호수의 얇은 고사리 협곡과 해협을 조심스럽게 항해하면서 두아르테 파체코의 세 척(그리고 동반한 코차이나 배)은 얕은 물 100m에 불과한 쿰발람 포드에 도착했다. 파체코는 길게 갈고 있는 기둥들이 깊은 해협 중간과 포드의 길이에 걸쳐 구멍을 뚫도록 명령했는데, 이것은 보병의 통행을 막기 위한 임시 스타케이드였다. 그는 이어서 서로 묶인 배들과 둑에 (철줄을 달고 있어서) 쉽게 잘라서 표류할 수 없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그 배들은 넓은 면적이 해안을 향하도록 정해졌다.

고갯길 위치

1504년 4월 포르투갈인이 보유하고 있는 '캄발랑의 패스'의 여러 위치를 보여주는 추측지도. 참고: 이 지도는 대략 16세기 이후 실질적으로 변화한 고치펨바나드 호수의 현대 지리에 기초하여 매우 추측적인 것이다. 녹색 점 = 포르투갈어 포지션의 가능한 위치, 직선 = 가장 가능성이 높은 캘리컷 군대의 경로, 점선 = 캘리컷 군대의 대체 더 긴 경로.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가 그의 입장을 밝힌 요충지인 파스 캄발랑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고 여러 출처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캄발랑은 아마도 코친 시 아래펨바나드 석호의 중남부에 있는 길쭉한 섬에 있는 현대적인 쿰발람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예: 로건 (1887), 화이트웨이 (1894), 몬테이로 (1989)는 포르투갈인들이 훨씬 더 북쪽의 에다팔리 (포르투갈어 Repylim)의 포드에서 그들의 입장을 주장하는데, 이 패스는 나라얀이 전년도 성과 없이 열려고 했던 것과 같다.[28] 어느 한 곳을 정당화하고 다른 곳을 의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만약 금발람이 정말 그 통로였다면, 그것은 자모린의 군대가 아무런 도전도 받지 않고 석호의 동쪽 해안을 모두 진군했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것이 반드시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금발람 섬들을 가로지르는 통로는 확실히 부대가 코차이나 반도로 건너가 코친시 뒤로 차분하게 진군하기에 좁은 통로가 된다. 문제는 또한 자모린의 함대가 크랭가노레 주변으로부터 컴발람까지 석호의 전체 길이를 항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함대는 코친을 향해 돌진하거나 도전을 받지 않고 항해했다. 그리고 특히 포르투갈인들이 도시 앞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들이 에다팔리 포드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지켰다는 대체 이론이 더욱 일리가 있다.[citation needed] 그 이름은 단순히 오해되었다. 그들은 금발람에서가 아니라 금발람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에다팔리 패스는 또 다른 모순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선거운동 후반에 자모린은 그의 군대의 일부를 팔루르테로 보내 다른 패스를 시도했다. 팔루루티는 코친에서 다시 남쪽으로 거의 확실하다. 만약 그들이 컴발람에 의해 진을 친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타당하다 – 자모린은 단지 몇 걸음만 돌아가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에다팔리 포드에서 붙잡혔다면, 그 분견대는 포르투갈인들이 들고 있는 바로 그 고갯길을 건너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회피한다면, 그들은 그들 아래로 올라올 것이다. 그러면 왜 포르투갈 패스를 양쪽에서 공격하지 않고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는가? 팔루르테가 잘못 식별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팔루르시가 아니라 다른 곳일 가능성이 있다(로건 외에서는 '발란자카'를 제안하지만, 그 역시 불확실한 곳) 만약 자모린이 에다팔리 포드에서 열렸더라면, 석호를 건너 비핀 섬에만 도착했을 텐데, 그렇게 되면 코친의 행군 범위 안에 그들을 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에게 반드시 중대한 관심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캄발랑가 코친 바로 남쪽의 반도인 컴발람이 아니라 실제로 컴발랑가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칼리컷군은 훨씬 더 남쪽으로 진군하여 펨바나드 석호의 남쪽 끝을 아주 남쪽의 '포르콰(Purakkad)'(또는 페럼발람에서 절단되었을 가능성이 있음)를 통과하여 긴 고리를 돌다가 쿰발랑이를 거쳐 북쪽으로 진군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남쪽 입장을 고려하는 주요 이유는 (1) 실질적으로 계속되는 육지 행군이다 – 만일 자모린이 거대한 군대를 위해 페리 보트를 피하고자 한다면, 펨바나드 호수 의 긴 루프를 취하는 것이 최소한의 물때문이었다 (2) 포르투갈의 위치를 코친에 더 가깝게 한다 –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모린이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코차이나 땅 덩어리에서 멀리 떨어져서, 따라서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한 지점이 되고, (3)쿰발랑이는 동쪽으로 아로르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포르투갈인들이 아로울 섬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고, 팔루티를 어느 정도 지나가고 있는 코친으로 가는 대체 통로일 수도 있고, (4) 컴발랑기로 가는 남쪽 루프가 지나거나 가까운 곳을 지나간다.전투 전에 영주들이 코친에서 칼리코트로 망명했다고 알려진 우다얀페루어(다이암페르), 페럼발람(프림발랑) 및/또는 바로 남부의 푸라크카드(포르콰)의 e땅.[29]

컴발랑이의 단점은 캘리컷 함대가 코친을 이전보다 더 가깝게 지나간다는 것이다; 아로르는 실제로 팔루루티를 가리키지 않으며, 팔리냐드 포드가 비교했을 때 어디에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약간의 변화로 인해 그 포드는 현재 콤발랑이와 코치 사이의 좁은 반도를 따라 어딘가에 있게 되었다. 즉, 그 곳 어딘가에 아주 작은 해협과 포드가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렇게 되면 캘리컷 함대가 실제로 펨바나드 석호로 항해한 것이 아니라 아라비아해를 통해서만 그 바깥쪽으로 항해했을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첫 공격

두아르테 파체코는 칼리쿠트의 자모린의 거대한 군대가 컴발람 포드에 나타나기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군대는 3월 31일(금요일) 새벽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야간에 이동 배치해 둑에 진지를 배치했다고 한다.[30]

새벽 빛에 이미 정렬된 사모린의 대규모 병력 8만 4천 명이 깃발이 펄럭이고, 총이 제자리에 놓인 그들의 장엄한 팔에 안겨 있는 갑작스런 광경은 수비수들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런 엄청난 군대의 트럼펫과 전쟁 외침의 위협적인 블레이드는 일부 수비수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 무시무시한 전주곡에서의 마지막 행동은 해협 굽이 뒤쪽에 160척의 무장함인 칼리코트 함대의 갑작스런 출현이었다.[31]

이 전시회가 열리기 전에 신경에 금이 갔다. 몇몇 코차이나 배들은 몰래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배들은 따라왔고, 곧 대규모 공황이 시작되었다. 500네르를 거느린 코차이나 보트는 곧 모두 코친으로 다시 도망치고 있었다. 정박해 있는 세 척의 배만, 90여 척의 포르투갈인(더해서 두 명의 코차이나 관리[32])이 남아 자모린의 군대와 함대를 대적했다.

두아르테 파체코에게 가장 시급한 걱정은 해안가에 있는 베네치아 총 다섯 자루였다. 인도군의 총기는 대부분 '팔 던지기 돌의 사정거리와 힘'에 관한 것으로 전해져 면화강조선에 거의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네치아 포는 그들을 멀리 가라앉힐 수 있었다. 파체코는 총기를 향해 즉시 총기를 발사해 배터리 요원들을 흩뜨렸고, 간헐적으로 총기를 집중 사격해 개혁을 막았다. 포드가 막힌 스타케이드를 잘라내기 위해 포드로 뛰어들었던 캘리컷 도끼 나사에도 불이 옮겨붙었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칼리쿠트 함대는 포르투갈의 진지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체코가 선택한 채널의 매우 좁은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큰 칼리코트 함대가 넓은 전선에 펼쳐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매우 좁은 전선으로 정박해 있는 포르투갈인에게 접근해야 했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의 세 척의 배가 한번에 겨우 십여 대 정도의 파아우스에 부딪혔는데, 이것은 포르투갈의 우수한 화력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제1의 물결은 가장 어려웠는데, 20여 척의 보트가 서로 단단히 묶인 채 함께 전진하여 40여 척의 봄바지와 100여 척의 머스크와 무수한 활잡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선박의 탑 방패와 면자루들은 미사일을 완충시키고 포르투갈 석궁병, 머스킷총병, 포병들이 보호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말라바리 보트의 포병, 머스킷총병들을 골라낼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작용을 했다. 몇 번 볼리를 친 후, 네 척의 배가 반쯤 가라앉았고, 나머지는 충분히 손상되거나 충분히 부상당한 상태로 진행되지 못하고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12척 안팎의 두 번째 물결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같은 운명을 만났다. 그리고 3번째, 4번째, 5번째 각각은 더 이상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 포르투갈인들은 이전 파도의 가라앉고, 손상되고, 물러나는 지대가 다음 파도를 위한 강 장애물(그리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광경)을 형성했기 때문에 더 쉬워졌다. 한낮이 되자 칼리쿠트 함대 지휘관들은 이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해안가에 집결된 자모린의 군대는 대체로 무능했었다. 타워 방패와 그물은 그들의 끊임없는 미사일 발사 대부분을 막아냈다. 이탈리아산 포전지가 작동하지 않고 도끼 분대가 포드의 스타케이드에 도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은 때때로 해안으로 향해야 했다.

자모린에게는 굴욕적인 아침이었다. 이 첫 번째 만남에서 칼리컷 군대와 함대는 1,300여 명의 사망자를 냈고 포르투갈군은 단 한 번의 손실도 없었다고 고니틀러스는 전했다.

두 번째 공격

4월 7일(일요일) 컴블람 포드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이 있기까지 일주일이 경과했다.[33] 이 중간중간 수리중이던 디오고 피레스의 캐러벨은 다시 제 모습을 갖추어 쿰발람 포드에서 선수단에 합류했다. 나우 콘체스탕은 코친 시 앞에 보초처럼 남아 있었다.

자모린도 배를 수리하고 병력을 더 모으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그가 교대 전술을 결정했었다. 주요 캘리컷 함대(약 150척)가 컴발람을 향해 가는 동안 70여 척의 캘리컷 파라우스 함대가 코친 시로 향하여 나우 콘세상호와 교전하게 된다. 요점은 두아르테 파체코의 작은 분대를 강제로 쿰발람을 버리고 코친 시를 구출하여 쿰발람 포드를 열어 그의 군대가 건너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평소 첩보 채널을 통해) 이 소식을 듣자마자 코친의 트리름파라 라자는 즉시 두아르테 파체코에게 돌아와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파체코는 처음에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오전 9시경, 조수가 떨어지고 바람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불어 닥뜨린 가운데, 두아르테 파체코는 원소들이 그에게 상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캐러벨 한 개와 바텔 한 개를 데리고, 남은 한 쌍을 남겨두고 포드를 잡으려고 파체코는 코친을 향해 질주했다. 그는 바로 나우 컨셉상 팀이 캘리컷 선수단의 폭행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과정에 있을 때 도착했다. 파체코의 배 두 척이 후방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캘리컷 분대는 그들이 곧 십자포화에 갇힐 것을 깨닫고 재빨리 약혼을 파기하고 물러났다.

파체코는 인사나 문의를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곧바로 배를 돌려 쿰발람 고갯길로 달려갔다. 만조가 들어오고 바람도 바뀌고 있었다. 그는 때마침 컴발람 포드에 도착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닻을 내리고 지금은 포드를 제압하고 있는 캘리컷 함대의 대부분을 만날 준비를 했다.

그 전 주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 칼리코트 파라우스는 작고 좁은 파도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과실이 없었다. 약 19척의 배들을 큰 피해로 잃었고 290여 명이 사망한 후에 칼리컷 제독은 공격을 중단시켰다. 기분전환용 게임빗은 실패했었다.

세 번째 폭행

다음 날, 두아르테 파체코는 휴식을 취하고 요양하기보다는 인근 섬의 일부 작은 마을에 기습 공격을 가했는데, 이 마을들은 칼리쿠트 함대에 은밀히 파고를 공급했다고 한다. 목표 자체의 가치는 크지 않았다. 그 주된 목적은 자모린의 군대를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있었는데, 전날의 모든 끔찍한 전투와 사상자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군은 여전히 무사하고 신선한 전투태세를 유지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4월 9일 화요일) 자모린은 새로운 전술을 결정했다. 더 이상 충동적인 함대 공격은 없을 것이다. 함대는 포르투갈 선박이 해안포 등에 의해 침몰하거나 심하게 파손될 때까지 참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를 위해 칼리쿠트 전지는 베네치아 대포의 위치를 세심하게 잡고 차폐했다.

그 전투는 포르투갈 함정의 육지에서 맹렬한 기세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포병의 사정거리는 배를 명중시킬 수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배터리 승무원들은 조준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 거리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고, 배들이 반격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의 의도는 캘리컷 배터리 승무원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더 나은 목표를 위해 총을 앞으로 옮기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파체코의 계략이 예상보다 잘 작동했다. 포르투갈 함정의 총기가 침묵하고, 그저 조용히 앉아 반격하지 않고 육지에서 발포할 수 있게 되자, 칼리쿠트 함장은 포르투갈 함대의 탄약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재빨리 내렸다. 이때 자모린의 조심스러운 계획이 무너졌다. 대포 배터리가 방패가 된 위치에서 움직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해협 어귀에서 빈둥거리고 있던 칼리코트 함대는 포르투갈군을 경계하며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포르투갈의 총이 탄약에서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파아우스가 포르투갈의 숫자로 서두르고, 분투하고, 승선하고, 압도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강 하류에서 포르투갈 선수단을 향해 성급하게 몸을 던졌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1차 파고가 충분히 근접할 때까지 사격을 가한 뒤 공전거리에서 보를 발사해 1발의 대규모 포탄과 사총 발포로 8파로를 침몰시켜 사상자가 비일비재했다. 제1의 물결은 깨졌지만, 나머지 파아우스는 지금 물러설 수 없을 만큼 앞으로 너무 많이 움직였다. 자모린이 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은 이제 너무 늦었다. - 함대가 교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 포르투갈의 포격에 의해 연속적으로 그리고 침착하게 파도를 일으킨 후 작은 결실도 없는 파도였다. 현재 현명하지 못한 전방으로 노출되어 있는 베네치아 총기 배터리는 때때로 배터리 승무원들에게 직접적인 화재에 의해 침묵되었다.

그러나 정오쯤에는 포르투갈의 바티칸 중 한 곳에서 불이 나 승무원들의 관심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물결의 칼리쿠트 파라우스는 포르투갈의 네 개 플랫폼 중 적어도 하나를 영구히 사용에서 제외시키기를 바라면서 모든 노력을 그것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선원들은 가까스로 불을 끄고 공격을 막았다.

이날까지 캘리컷 함대는 22파운드가 빠지고 600여 명이 숨지는 등 퇴각했다. 승무원들의 탈진에도 불구하고 파체코는 두 개의 바테이스에게 퇴각하는 함대를 간단히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도중에 바테리스는 에다팔리 근처에 있는 몇몇 병사들을 하선하고 두 개의 작은 마을을 불태우고, 한 지방 영주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경비병을 물리쳤다.

이 모든 행동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인들은 다시 단 한 명의 죽음도 겪지 않고 단지 몇 명의 부상만 입었다.

자모린은 이번 폭행사건 이후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자신의 텐트로 물러났다고 한다. 이미 2차 공격 이후 자모린은 금발람 포드에 대한 거듭된 공격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심지어 자신을 더 굴욕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캠페인을 해산하고 평화협상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반쯤 굳혔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고귀한 선장들로부터 다시 한 번 도전해 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명예를 회복하고 신하들의 신념을 지키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바로 이 같은 선장들은, 그들의 성급함으로, 그에게 세 번째 패배를 안겨 주었다.

팔리냐르와 팔루르테의 패스

자모린은 그의 지휘관들의 압박이 아니더라도 캠페인을 중지할 용의가 있었다. 그는 쿰발람을 버리고 더 북쪽인 팔리냐르팔루르테의 두 통로를 통해 코친에 도착하려고 제안했다.

패스 위치

1504년 5월~6월에 포르투갈인이 보유하고 있는 '팔리냐르'와 '팔루르테'의 패스의 여러 위치를 보여주는 추측지도. 다시 한번 억측을 많이 했다. 짙은 녹색 = 가능한 위치 가설 중 하나, 밝은 녹색: 또 다른 위치 가설. 또한 '캄발랑'의 원래 위치에서 캘리컷 군대가 재배치되는 암묵적인 경로를 보여준다.

Palurte는 거의 확실히 Cochin의 남쪽 Palluuthy이다. 팔리냐르(대체로 팔린하르, 팔린하르트, 팔리냐드, 팔리냐드, 팔림바나드, 팔림바나드)의 위치는 암바나드 강에 서식하는 에르나쿨람 남쪽에 있는 컴발람 동쪽의 파낭가드 섬이다. 팔리냐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팔루르테(북쪽이나 남쪽, 놀랍게도 연대기에서 불분명한)의 리그나 하프리그라는 것뿐이다. '팔리냐르(또는 비슷한 소리를 내는 상대)'는 케랄라 백워터의 보통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34]

연대기는 이 구절이 아라울 섬(혹은 다라울 또는 아레일)을 거쳐 갔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남부 반도인 아로르에 대한 언급일 수도 있는데, 팔루티 쪽으로 북쪽으로 건너갈 수도 있다. 물론 이렇게 하려면 원래의 '캄발랑'의 위치를 (쿰발람이 아닌)쿰발랑기(Cumbalangy)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 아루아가 실제로 컴발랑이의 뒤에 있고 이러한 공격들 사이에 자모린 군대의 주요 진영이 '포콰의 땅'(아마 푸라카드, 따라서 펨바나드 남단을 지칭하는 것)에 있다는 가끔의 제안(예: 카스타네다, 페이지 228)과 일치한다.

그러나 아로르를 '아로울'로 꼽는다고 해서 실제로 팔리냐르와 팔루르테가 서로 어느 쪽에 상대적일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케랄라 백워터 지리는 '아루어/'가 있는 곳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아료르라는 이름이 이 지역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트리름파라의 직함을 가진 문서에서 그는 아라울의 영주권을 중요도 3위(코친과 비핀에 이어)로 인용하고 있어, 그것이 모호하거나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35] 더구나 전투가 코친 시와 마누엘 요새와 매우 가까웠다는 제안(예: 카스타네다, 페이지 224, 227)도 있다. 마지막으로, 몇몇 연대기들은 아라울을 경유하는 경로가 오히려 코친 시로 가는 직접적인 통로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실제로, 1503년의 첫 번째 포위전에서 자모린의 군대가 택한 바로 그 통로였다.[36]

결과적으로, 한 가지 유력한 가설은 아라울 섬이 고치 항구의 현대적인 윌링돈 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또는 대부분의 윌링던이 1920년대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전에 그곳에 위치한 섬일 수도 있다). 이리하여 '팔리냐르'와 '팔루르테'는 코친 시가 있는 육지로 바로 들어가는 그것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추측에 의한 추측이다. 이 장소들 중 어느 곳에도 연대기, 학자 또는 역사가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라울로 재배치

만성적인 사람들은 아룰(아로르) 섬을 경유하는 팔리냐르(파낭가드)-팔루테(팔루루티) 건널목이 금발람 포드 공격 때 이용가능하고 무방비 상태였지만, 자모린은 한 번 고친 금발람 목적지가 "명예의 지점이 되기" 때문에 결코 시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북쪽 통로는 그의 대군이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울창한 숲과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다.[37] 그러나 가장 큰 단점은 그들이 쉽게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Palignar는 썰물 때 도보로 이동만 가능했던 반면 Palurte는 페리 보트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고려는 이제 제쳐졌다. Arraul 지문의 주된 장점은 두 개의 지문이 있다는 것, 즉 포르투갈인이 Palignar와 Palurte를 동시에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다.

4월 말에 자모린은 컴발람에 있는 그의 캠프를 들어올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 겉보기에는 칼리코트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곧 자모린의 군대가 사실상 팔리냐르팔루르테 패스로 향하고 있다는 통지를 받았고, 500여 명의 네레스인 자모린의 선진 부대는 이미 아라울 섬에 와 있어 군대의 통행을 완화시키기 위해 덤불을 베어내고 있었다. 파체코는 두어 척의 배를 이끌고 아라울로 달려갔고, 트리뭄파라 라자는 코친 시에서 200여 명의 코차이나 네어스의 군대를 파견하여 그와 합류했다.[38] 파체코는 그들을 지휘하여 두 칸으로 나누어, 페로 라파엘 휘하의 다른 칸으로 나누어, 두툼한 자들을 다시 몰아냈다.[39]

두아르테 파체코는 단 하루의 길일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칼리쿠트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의 캐러벨은 Palurte 페리까지만 갈 수 있었다 – 수심이 부족해서 캐러벨이 그 이상으로 전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파체코는 두 개의 캐러벨(페로 라파엘과 디오고 피레스 아래)에게 철줄을 가지고 팔루르테에 정박하라고 명령했고, 그는 두 개의 작은 바티스를 팔리냐르 포드로 옮겼다.

At Palignar, Duarte Pacheco anchored both his bateis on the bank, placing them under the command Simão de Andrade and Cristóvão Jusarte[40] [Note: Correa (p. 402) calls the latter "Jusarte Pacheco" or "Lisuarte Pacheco", and identifies him as the son of Duarte Pacheco]. 포드의 가까운 둑은 그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운니 고다 바르다(칸다고[41])의 지휘 아래 트리맘파라 라자가 파견한 600명의 코차이나 네어스가 장악할 예정이었다. 이 요인의 조수인 루렌소 모레노는 마누엘 요새를 지루하게 여기며 어떤 행동을 원했고, 항구에 나타나서 땅 담장을 맡거나 몇몇 코차이나 카누에 탑승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조치일 것이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적들의 궁수들과 대포를 어떤 형태의 보호 덮개도 박탈할 수 있도록 반대편 둑에 있는 식물들을 제거하라고 군대와 대원에게 명령했다.[42]

두아르테 파체코 방어의 결정적 열쇠는 조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두 구절을 방어해야 했지만, 그는 두 구절을 동시에 방어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팔리냐르 포드는 썰물 때만 걸어서 건널 수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팔루르테의 물은 너무 얕아서 자모린의 배와 나룻배가 움직일 수 없다. 만조 때는 팔루르테에서 배가 움직일 수 있었지만, 보병은 팔리냐르에서 배를 몰 수 없었다. 그래서 두아르테 파체코는 두 패스 사이의 얕은 발사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병력 일부를 왕복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즉, 썰물 때는 팔리냐르의 네어스와 바티스를 보강한 다음, 만조 때 팔루르테의 캐러벨을 돕기 위해 해협을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

네 번째 폭행

나우베아다림 왕자가 이끄는 1만5000여 명의 보병인 자모린 군대의 선봉장은 아라울에서 교전이 있은 지 하루 이틀 만에 팔리냐르 포드에 도착했다. 비슷한 시기에 에다팔리 영주 에르카놀 휘하의 250여 척의 선박인 칼리쿠트 함대는 팔루르테의 근방에 이르렀다. 나우베아드림은 자신의 군대로 포드의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고, 에르카놀은 팔루르테에 있는 두 개의 캐러벨을 탈구시켰다.

공격은 5월 1일 새벽에 시작되었다.[43] 오전 중에 조수가 높았기 때문에 팔리냐르는 나우바다림의 보병들에게 꼼짝할 수 없어 파체코는 안드라드와 주사르테의 지휘를 받아 작은 승무원만 데리고 바티스를 떠나 대부분의 병력을 긴 보트를 타고 팔루르테로 급히 내려갔다. 비록 그 벌크가 Palignar 포드의 가까운 쪽에 있는 왕자 Candagora와 함께 머물렀지만, Cochines Neenes의 사절단이 Pacheco와 동행했다.

파체코는 팔루르테에 도착하자마자 많은 칼리코트 대포들이 정박해 있는 캐러벨을 가라앉히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기 때문에 반대편 둑의 초목들을 치우는 것은 즉시 성과를 거두었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칼리코트 포병 대원을 흩뿌리며 진지에 있는 배들에게 집중 사격을 명령했다. 그 후 그는 포르투갈-코차이나의 공격대를 해변에 상륙시켰고, 그들은 남아 있는 캘리컷 선원을 끝내기 위해 급히 다가가 버려진 캘리컷 대포를 끌고 가거나 스파이크를 날렸다.

대포 위협은 무효화되었고, 부대는 도착하는 칼리컷 함대와 맞서기 위해 캐러벨로 돌아왔다. 팔루르테의 해협은 쿰발람에서 그랬던 것처럼 좁지 않아 에다팔리의 엘카놀 제독이 40파운드의 넓은 전선으로 캐러벨을 가로질러 상당한 제1의 파도를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포병들의 속도는 전진하는 함대를 격멸시켰다. 거의 같은 크기의 제2의 물결이 그 뒤에 보내졌지만, 그것 또한 퇴짜맞았다.

그때쯤에는 조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칼리쿠트 파라우스는 장애물이 많은 팔루르테의 얕은 물속에서 이동하는데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기 때문에 칼리쿠트 제독 에르카놀은 함대에 퇴역 명령을 내렸다. 나우바다림의 칼리쿠트 보병대가 팔리냐르에서 통로를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해졌다. 두아르테 파체코와 그의 부대는 긴 보트를 타고 돌아갔다.

밀물이 충분히 적었던 나우베아다림의 보병 기둥이 포드를 얻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바티스의 빠르고 무거운 총성과 둑 위의 코차이나 네어스의 끊임없는 미사일 발사로 제지당하여 별로 진로를 개척하거나 반대편 등받이에 도달할 수 없었다. 두 차례의 중공(重公)을 거쳤으나 결실이 없는 공격 끝에 다시 밀물이 불어나기 시작했고, 나우베아다림(Naubeadarim)은 칼럼에 은퇴를 명령했다.

이 첫 만남에서 캘리컷은 1000여 명의 병력과 몇 척의 배를 잃었다고 한다. 역겨운 자모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머지 군대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고, 나우베아다림과 엘카놀 둘 다 섣부른 퇴각이라고 하는 것이 비겁하다고 믿었던 것을 업신여겼다.

팔리냐르와 팔루르테에서의 그날의 싸움은 아마도 포르투갈인들이 지금까지 직면했던 것 중 가장 무거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방어를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고 운 좋게 빠져나갔다. 포르투갈인들은 기진맥진하여 많은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만약 자모린이 다음날 공격을 재개했다면, 그의 군대는 포드를 탈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 좋게도, 집중호우로 인해 작전 재개가 막혔고, 그 후 칼리쿠트 수용소를 휩쓸었던 파괴적인 콜레라의 전염병이 빠르게 이어졌다. 이로 인해 포르투갈과 코친 동맹국들은 약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고, 요양하고,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섯 번째 폭행

두아르테 파체코는 전투로 인한 콜레라로 인한 단절을 이용하여 그의 배를 수리하고 팔리냐르 포드에서의 위치를 강화했다. 가까운 둑에 튼튼한 목축이 세워져 있었다. 한쪽 끝에서 불에 타서 서로 묶인 날카로운 기둥들이 포드의 깊은 진흙 속에 박혀 보병의 통행을 심각하게 복잡하게 만들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사라바(1849: 페이지 140)는 그것들을 위로 뒤집힌 날카로운 금속 스파이크로 덮인 평평한 판자와 물 건너가는 병사들의 발을 덮기 위해 팔리냐르 포드의 바닥에 깔아놓은 커다란 못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는 두 가지 역할을 할 극을 소개했는데, 판자가 떠내려가거나 벗겨지는 것을 막기 위한 닻으로, 그리고 지탱하기 위한 끈으로 묘사하고 있다. 널빤지를 위로 올려 연한 강 진흙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는다.]

콜레라 전염병은 자모린의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저항군의 성공은 앞서 트리맘파라 라자를 버린 옛 코차이나 신하의 일부도 다시 불러들였다. 코레아(p. 482)에 따르면 이들은 망가테(알렝가드), 프림발랑(Perumbalam), 디아메르(Udayamperoor)의 영주(Kaimals)[what language is this?]들이었다. 그들의 귀환은 그들이 줄 수 있는 어떤 구체적인 도움에도 환영받지 못했고, 더더욱 그들이 자모린에게 가능한 지원군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5월 6일경(날짜 불확실) 자모린은 팔리냐르에서 포드를 잡는 데 전력을 기울이며 아직 최대의 공격을 감행했다.[44] 그것은 30개의 놋쇠 대포를 가진 4000여 명의 부하들이 앞장섰고, 바티스를 침몰시키기 위해 데려왔다. 그 뒤에 선봉기둥, 나우베아다림 왕자 휘하의 1만2000여 명의 부하가 왔다. 에다팔리의 에르카놀은 같은 크기의 기둥을 지휘했고, 자모린 자신도 전문 도끼 제작진(400여 명)을 포함한 1만5000여 명을 이끌고 후방을 일으켜 통로를 치우고 스타케이드를 잘랐다.

당시 포르투갈군은 팔리냐르의 바티스에 불과 40명, 포드 팔리사이드에는 200여 명의 코차이나 병력만 있었다. [분명히, 팰리세이드를 인간에게 배속된 코차이나의 신하인 망가테(알랑가드)의 네케르인들은, 이 적은 숫자만 남기고, 뜻밖에도 밤중에 자리를 버리고 말았다. 파체코는 코친에 있는 칸다고라 왕자에게 긴급 전갈을 보내 증원군을 급히 출동시켰으나, 전갈은 제때 전달되지 않았다.][45]

팔리냐르에 대한 공격은 육지에 있는 칼리쿠트 포병과 바티스의 대포알 결투에서 시작되었다. 포르투갈 포병들이 그것을 더 잘했고, 칼리코트 전지는 분산되었다. 그러나 이때쯤에는 조수가 적고, 지금은 강바닥을 긁어내고 있는 바티스가, 쉽게 최적의 사격 위치로 기동할 수 없었다.

자모린은 진격 명령을 내렸고 칼리쿠트 보병은 다른 둑을 되찾기 위해 팔리냐르 포드로 쏟아져 들어왔다. 뾰족한 널빤지는 의도된 효과를 보였는데, 전선이 속도를 줄여서 그들의 발걸음을 지켜봤고, 후선은 뒤에서 밀어냈으며, 캘리컷군은 집중된 군중으로 모여들었다. 포르투갈의 대포는 이 밀집한 인간 덩어리를 향해 사격을 가했고, 칼리쿠트 대열에서 끔찍한 사상자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장교들의 재촉을 받고 칼리컷 보병은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갔다.

페로 라파엘은 화재의 일부를 자모린을 직접 암살하도록 지시했고, 그의 가까이에 서 있는 귀족들 중 두 명을 산산조각 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 포탄이 떨어졌다.[46] 피범벅이 된 자모린은 경비에 의해 급히 들판을 떠나 나머지 폭행은 나우베이다림과 에르카놀에게 맡겼다. 암살 시도에 격분한 나우베아다림은 칼리쿠트 부대를 집결시키고 맹렬히 앞으로 밀고 나갔다. 고통스럽게 봉인된 스파이크를 극복하며 선봉장은 마침내 코차이나 은행의 팰리세이드에 도달했다. 성벽을 지키는 코차이나 부대는 후퇴하거나 자리를 피했으며,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몇 안 되는 포르투갈군은 실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가 되자 조수가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바테리스는 진흙에서 빠져 나와 다시 한번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바티스는 앞으로 돌진하여 곧장 포드로 들어갔고, 집중된 포화로 팰리세이드에 대한 중폭행을 해산시켰다. 그런 다음 거의 지점이 되는 백포를 가지고 포드를 앞뒤로 건넜고, 캘리컷 부대는 다시 둑으로 올라가 나무줄기로 후퇴하도록 강요했다.

9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만조가 돌아와 폭행이 끝났다. 자모린의 군대는 다시 한번 실패했었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전투의 열기에 팰리세이드 성벽(성곽)을 내버린 코차이나 부대에 격노했고,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자리를 내팽개친 망가테의 신하의 부대에 더욱 격노했다. 그러나 트리맘파라 라자는 슬프게도 모든 신하들의 일반적인 신앙심을 일깨워 주었고, 파체코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고, 그의 후계자인 카당고라 왕자는 영구히 포드로 옮겨, 스타킹의 유지관리를 감독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동안 거의 사용되지 않는 다른 통로(혹은 파라오에 의해 착륙)를 사용하여 약 2,000명의 캘리컷 네어스가 가까스로 포르투갈 선 뒤로 우회하여 착륙했다고 한다. 네어스는 후방에서 포드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내고 있었는데, 그때 논밭에서 일하는 일부 지역 코차이나 농민들이 용기를 내어 다소 빨리 배웅하는 것을 보고 스페이드로 분대를 공격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들이 휘두르고 있는 농기구로 인한 어떤 부상보다도 낮은 카스트 소작농들에 의한 모멸을 더 두려워하고 있다.[47] 파체코는 자신의 코차이나 네어스에 넌더리가 난 자신의 코차이나 네어스에 이 용감한 농민들을 네어스로 승진시켜 팔리사이드에 배정하도록 트리맘파라 라자를 설득했다고 한다. 왕은 그에게 카스트 제도의 복잡성에 대해 장황하게 강의했다.

플롯 및 교전

의기소침한 자모린은 현장에서 또 한번의 실패에 대해 배짱이 없었고, 또 다시 직격탄을 날릴 생각을 일축했다. 콜레라 전염병이 재발하면서 지연도 불가피해졌다. 대신 패스에서 포르투갈의 위치를 약화시키거나 끌어내려는 언더핸드 플롯과 가끔 실랑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늘 그렇듯이 인도 남부의 정보망은 자모린의 음모의 대부분이 유출되도록 보장했다. 이미 앞서 자모린의 요원들은 일부 코차이나 네어스의 음모를 유도해 두아르테 파체코를 암살했다. 음모가 들통났고, 파체코는 그 중 두 명을 채찍질하고 교수형에 처하게 했다. (이것은 코차이나 계급에 약간의 경악을 불러일으켰는데, 사형집행은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나이르를 매질한 것은 고귀한 카스트에 대한 비통한 모욕이었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네르족 사이에 문제를 일으키기를 바라지 않고 나머지 공모자들을 자신의 뜻대로 하도록 트리름파라 라자에게 넘겼다.)[48]

이 막간 동안, 자모린의 고문들은 요원들이 코친에 침투하여 승리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팔리냐 포드의 군대에 보내지는 음식과 물을 독살하도록 하는 새로운 계획을 고안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음모가 누설되었다. 자신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매일 팔리냐르의 해변에 새로운 우물을 파게 되었고, 승리자, 노점상, 운송업자들은 군대에 보급되기 전에 모든 단계에서 그들만의 음식을 맛볼 수 밖에 없었다.

자모린의 조언자들은 계속해서 더 많은 음모를 꾸몄다. 코친에서의 반란, 그리고 밤에 덮인 배를 코친에게 보내고 도시에 불을 지른 다음, 포루투갈 배들에 독이 있는 코브라 바구니를 몰래 태우는 계획 등. 그러나 이 모든 음모는 유출된 정보에 의해 순식간에 좌절되었다.

더 악명 높은 예들 중 하나(코레아에서 보고, 페이지 474–75)에서 자모린은 야간 공격에 대해 결정했다. 그 부대는 팰러테 근처 포드를 횡단할 예정이었는데, 포드는 정박해 있는 포르투갈의 캐러벨의 사격장 내에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되면 캐러벨은 그들을 볼 수 없었고 부대는 걸어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두 명의 칼리코트 군대는 먼저 갈 선봉대, 그리고 포드를 건넌 후 진격하라는 횃불 신호를 두 번째 군단에 보냈다. 그러나 여느 때처럼 파체코는 그 계획을 눈치챘다. 그리고 선봉이 진군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체코는 미리 준비한 횃불 신호를 직접 주고 2군을 시켜 조급하게 진격하게 했다. 선봉장은 코차이나 기둥이 뒤에서 매복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서 2군을 공격했다. 밤의 어둠 속에서 칼리코트의 두 군대는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49]

막간 동안 파체코는 캘리컷 진을 괴롭히고 지원 마을을 급습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자신의 소풍을 시작했다. 파체코는 이들 소풍 중 한 곳에서 매복해 54파운드의 칼리코트 함대에 둘러싸여 있었으나 가까스로 물리쳤다고 한다.[50]

여섯 번째 폭행

팰리그나르 포드에 대한 새로운 공격에 대한 준비는 5월 말(또는 아마도 6월)에 시작되었다.[51] 포병대는 미리 준비된 참호선으로 이동했고, 포탄은 포루투갈의 귀환 사격으로부터 배터리를 더 잘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팔루르테에 맞서 에다팔리의 엘라카놀은 함대를 수리하고 새로 준비했다. 110명의 잘 무장하고 잘 가린 파르아우스가 이끄는 선봉대가 함께 묶였고, 이어 100여 척의 보트 수송선이 그물떼를 위한 병사들로 가득했다.[52] 몇 가지 혁신이 있었다. 첫째, 방화 재료가 탑재된 일련의 소방정(Brulote)이 포르투갈의 캐러벨로 보내지기 위해 준비되었다. 그렇다면 가장 특이한 것은 '떠다니는 성들'(특정 '코게일', '에다팔리의 아라브'에 의해 발명됨)의 연속이다. 본질적으로, '떠다니는 성'은 나무로 만든 포위탑으로, 약 18손의 높이에, 40명의 무장한 사람들을 태우고, 두 의 언덕에 함께 올라탈 수 있는, 매우 튼튼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성들은 16척의 배에 올라 하나의 당당한 선을 이루며 서로 묶여 있었다.

여느 때처럼 두아르테 파체코는 이 모든 준비를 알고 있었고, 스스로 대처를 하게 되었다. 소방정에 맞서 그는 해협을 가로질러 단단히 정박해 놓은 넓은 뗏목(마스트 장착)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떠다니는 성들의 소리를 들은 그는 칼리컷 성의 높이에 맞추어 자기 캐러벨의 기둥에 목조 건축물을 세우라고 명령했다.[54]

코친의 왕자가자 후계자인 칸다고라는 팔리냐르 포드에서 최고의 코차이나 네어 1,000개를 선물했다. 팔리냐르의 두 바티스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크리스토방 주사르테시망안드라데의 지휘 아래 있었고, 요인의 조수인 루렌소 모레노가 몇몇 코차이나 보트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다.[55]

공격 당일의 새벽, 자모린의 보병들은 팔리냐르를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바다왕을 조롱하기 위해 파체코는 배를 타고 아라울 섬 끝까지 올라갔으며 작은 분대와 함께 상륙하여 칼리쿠트군의 선발대와 교전을 벌였다. 짜증이 난 자모린은 그의 뒤를 따라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다. 파체코는 그냥 그의 보트에 다시 올라타고 항해했다.[56]

조수가 높은 가운데 캐러벨이 정박해 있는 팔루르테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칼리코트 소방선이 가장 먼저 진수되었지만, 닻을 올린 뗏목에 걸려 무해하게 불탔다. 그리고 나서 떠다니는 성들이 캐러벨을 향해 발사되었다. 이것은 포르투갈인들이 제공해야 할 모든 대포에 그들의 강화된 측면들이 저항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으로 판명되었다. 상황은 암담해 보였고 두아르테 파체코는 가장 가까운 성에 집중된 집중 포화를 집중시키고 마침내 옆구리를 깨기 전에 "주님, 아직 내 죄를 갚지 마십시오"라는 그의 유명한 대사를 필사적으로 내뱉었다고 한다. 곧 1초가 뒤따랐고, 모든 기구가 끌어서 쪼개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파르마우스가 가라앉기 위해서였다. [코레아(p. 487)에 따르면 파체코는 감히 횃불을 들고 헤엄쳐 나와 성 밑 구릉에 불을 지른 선원이라면 누구라도 100크루즈도스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한다.

팔루트의 캐러벨이 이렇게 교전하는 동안 조수가 내려오고 자모린의 보병들이 팔리냐르 포드로 진군했다. 두 바티스의 끊임없는 총성은, 팰리세이드 성벽과 발사에서 코차이나의 연속적인 미사일 발사와 함께, 그들이 포드에 발을 디딜 때, 칼리코트 보병대의 줄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그 공격은 격조가 다시 찾아와서 칼리코트의 군대로 하여금 건널목을 끝내도록 강요할 때까지 격퇴되었다.

오소리오(311쪽)에 따르면 이날 칼리코트의 군대는 다른 어떤 군대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다. 포르투갈인들은 여전히 사망자는 없었고 부상자만 입었다. 자모린의 가장 큰 공격에 대한 승리는 코친에서 큰 축제로 맞이되었다.

일곱 번째 공격과 끝

두아르테 파체코의 7번째이자 자모린(1840석판화)에 대한 마지막 승리.

연대표는 일반적으로 이후의 사건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자모린이 포르투갈의 입장을 두어 번 더 공격하라고 명령한 것 같은데, 그 중 하나는 같은 부동성을 사용(현재 수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러한 공격에서 자모린은 병과 탈영으로 고갈된 병력이 더 적었고, 열정과 에너지가 더 적은 상태에서 공격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지금쯤 장마가 변하기 시작했고, 비와 바람이 자모린의 군대와 맞부딪치고 있었다 – 비 확산 질병과 복잡한 움직임, 통로의 수위가 더 높아져 고지를 항해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더구나 칼리코트의 신하들이 하나둘씩 자모린의 진영을 슬그머니 빠져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포르투갈 함대가 8월에 도착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예상되었다. 그때까지 코친을 사로잡을 희망을 잃은 자모린의 신하들 중 다수는 포르투갈군이 도착하기 전에 트리름파하라 라자와 평화 조건을 협상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영토가 복수적인 징벌적 습격으로 예정되지 않도록 말이다. 코친과 따로 화해한 신하의 마지막은 에다팔리의 엘카놀 영주였다.

마지막으로 1504년 6월 24일(성별) 요한),[57] 칼리코트의 사모린(John)은 그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왕위를 버리고, 조카이자 후계자인 나우베이다라이임(칼리코트 보병을 이끌었던 장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종교생활에 전념하면서 신전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지친 자모린은 자기 어머니의 추격에 이끌려 절에서 나와 마지막 공격을 조직했다.[58] 그러나 그 일이 아무데도 가지 못하고 나자 자모린은 영구히 종교적 은둔으로 돌아갔다. 칼리컷의 군대는 7월 3일경 펨바나드 석호 해안에서 퇴역했다.

여파

자모린이 코친 근처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직후(1504년 8월 초순)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퀼론을 위해 코친에서 캐러벨을 타고 출항했다. 시내의 아랍 무역상들이 음모나 폭동을 일으켜 그곳의 포르투갈 공장을 공격하여 적어도 한 명의 포르투갈 요원이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알메이다는 아랍 상선 한 척을 나포하고 그들에게 복수를 강요했다.

파체코는 1504년 9월 로포 소아레스 알베르가리아의 지휘 아래 제6차 포르투갈의 무적함대코친에 이르렀을 때 여전히 퀼론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두아르테 파체코는 9월 말이나 10월에 코친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10월 파체코는 크랭가노레에 대한 포르투갈-코흐네스의 선제공격에 참여했는데, 이곳에서 (새)자모린이 1월 제6아미다가 떠난 후 코친을 다시 공격하기 위해 그의 군대를 재집결하고 있다고 한다. 크랭가노레 소탕과 그에 따른 자모린의 가장 중요한 신하 중의 하나인 타누르의 통치자의 망명으로 칼리쿠트 전선이 북쪽으로 굴러가며 펨바나드 석호를 자모린의 군대와 함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것은 칼리코트의 자모린이 케랄라 백워터를 통해 다시 코친을 공격한다는 어떤 전망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평가

전반적으로, 코친 전투는 3월부터 7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대부분의 폭행은 4월 초와 5월 초에 집중되었다. 6만 명 이상의 병력으로 시작된 자모린의 군대는 1만 9천 명이 사망하고, 5천 명이 넘는 전투 중, 1만 3천 명이 질병에 걸리는 등 큰 인명피해를 입었다.[59] 부상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배의 손실도 많았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포르투갈 수비수들 중 어느 누구도 사망한 것으로 보고된 것은 없다. 코차이나 동맹국들의 사상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몇 안 되는 숫자로 볼 때, 그들 역시 그렇게 높지 않았을 것이다.

코친 전투는 케랄라의 정치 지형을 변형시켰다. 칼리코트의 자모린은 굴욕을 당했다. 그의 막강한 군대와 함대는 코친과 동맹을 맺은 150명의 포르투갈 수비대를 격파할 수 없었다. 결국 자모린은 이전에 말라바르 해안 전역에 잡혀 있던 권위와 공포의 대부분을 잃었고, 트리뭄파라 라자는 약한 왕에서 펨바나드 석호의 인정된 왕으로 전락했다.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은 영리한 포지셔닝과 개인 영웅, 그리고 많은 행운의 조합으로 성공했다. 자모린은 두 번의 공격이 동일하지 않은 자신의 지략과 혁신성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다.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차이를 입증한 것은 아마도 코친의 정보 네트워크의 역할이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인들은 적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자모린의 장막 안에서 비밀리에 부화한 전략과 음모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에 비해 포르투갈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지키는 경향이 강했고, 자모린의 간첩들은 포르투갈인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볼 뿐 들을 수는 없었다. 페레이라는 또한 조수와 달의 위상의 관계에 대한[60] 과학적인 연구를 한 최초의 사람이었을지도 모르며, 이것은 그가 각 포드가 언제 통과할 수 있을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었고, 공격 지점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에 따라 그의 몇 개의 병력을 셔틀할 수 있게 해주었다.

포르투갈인에게는 '밀착형'이었다. 만일 코친이 자모린에 함락되었다면 그것은 칸나노레퀼론도 함락되었을 것이다(사실, 그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한 회담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에서 그들의 입지를 잃고 쉽게 회복할 것 같지 않다 – 자모린은 미래의 포르투갈의 아르마다를 막기 위해 마누엘 요새를 사용할 수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자모린의 조건으로 평화를 위해 소송을 제기해야 할 것 같다.

트리맘파라 라자가 대승으로 나왔다.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충고해 주었던 포르투갈 동맹 유지에 대한 그의 고집은, 그리고 연초에는 그의 운명을 봉인하는 듯했던, 결실을 맺었다. 포르투갈인에 대한 그의 빚은 엄청났지만, 그가 가진 두아르테 파체코 자신은 필사적인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애착을 갖게 된다.

두아르테 파체코의 보상

전투의 여파로, 코친 왕으로서의 자격으로, 트리맘파라 라자는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에게 붉은 방패("이 전쟁에서 그가 흘린 칼리코트의 거대한 피를 위해")로 묘사되는 개인 무기 증서를 주었다, 소금관에 금관 5관("그가 패배한 다섯 왕을 위해")이 있고" 푸른 물결이 흐르는 하얀 보두르를 충전했다. 여덟 개의 나무 성을 녹색으로 하고, 각각 두 개의 배에 올라탔다. (두 번 동안 그는 이 여덟 성을 물리쳤다.) 방패 주위에는 7개의 펜넌트, 3개의 빨강, 2개의 흰색, 2개의 청색("칼레컷 왕이 직접 지휘하는 7개의 공격과 그가 압수한 7개의 색깔과 모양의 7개의 깃발")이 있고, 금색과 붉은색으로 테두리를 두른 개방된 은색 조타기, 그리고 꼭대기에는 붉은 펜넌트(코친?)[61]가 얹혀져 있다.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마누엘 텔레스 바스콘셀로스에 의해 코친의 포트 마누엘 사령관으로 직위해제되었고, 1505년 1월 제6의 아르마다와 함께 포르투갈로 귀환할 예정이다. 트리맘파라 라자는 두아르테 파체코의 출발에 눈물을 흘리며 제정신이 아니었고, 로포 소아레스 드 알베르가리아 제독에게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끝없이 간청했다고 한다. 불가피성에 고개를 숙인 트리름파라 라자는 두아르테 파체코에게 그의 서비스에 대한 개인적인 보상으로 상당한 양의 후추 화물을 제공했다. 트리맘파라 라자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위를 알고 있던 두아르테 파체코는 그 제의를 거절했다.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리스본에서 영웅의 환영을 받으며 포르투갈 마누엘 1세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았고 그를 기리기 위해 왕실 연금과 대중 축제가 열렸다.

1505년, 포르투갈 제1부속로이 D. 프란시스코 알메이다포르투갈의 마뉴엘 1세가 보낸 황금 왕관을 들고 인도에 도착하여 그의 포르투갈 동맹에 있어서 코친의 트리맘파라 라자의 변함없는 모습에 보답했다. 그러나 늙은 트리맘파라 라자는 이때까지 퇴위하고 종교적 헌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 알메이다에 의해 '코친의 왕'으로 엄숙한 의식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후계자 칸다고라였다.

에스메랄도 데 시테 오르비스

코친 전투의 소강 기간 동안,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는 우주 관측을 하고 메모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1505년 리스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두아르테 파체코는 이 노트를 1509년에 완성된 그의 유명한 책인 에스메랄도 데 시테 오르비스로 엮었다. 인도 런에서 미래의 항해자들을 위해 정확한 지시와 참조를 제공하는 최초의 로테이로스(Nautical Rutters) 중 하나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두아르테 파체코가 조수의 타이밍에 대해 취한 세심한 노트였는데, 이것은 코친 전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체코는 이들의 과의 연관성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달 관측을 참고해 조수의 진행 상황을 예측하는 규칙을 정립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천문학적인 관측을 수정하고 개선하기 위해 데이터를 훑어보기도 했으며(분명히 태양으로부터 달의 평균 일탈을 보정한다) 미래의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사용할 항해 측정치를 구성했다.[62]

후기 표현

코친 전투의 이야기는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카뮈스가 1572년 쓴 서사시 오스 루시아다스에 나오는 내용이다. 칸토 X의 오프닝에서 바다 님프 테티스바스코가마 제독과 연관되어 코친 전투(칸토 X, 스탠자스 12-21)에 대한 그녀의 예언과 관련이 있다. 카멜레스는 이 전투를 최전방에 두고 있는데, 이는 가마의 항해 이후 인도에서 포르투갈인이 관련된 첫 번째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에게 '강자 중의 최강자' '루시탄 아킬레스'라는 슈퍼러티브를 선사하며, 더 기억에 남는 사건 몇 가지와 전투의 세부사항을 묘사한다.[63] 테이스는 또한 포르투갈 마누엘 1세의 배은망덕함을 홀리며 포르투갈로 돌아온 뒤 두아르테 파체코의 향후 행적을 암암리에 예측하고 있다. 파체코는 비록 부유한 왕국을 얻었지만, 높은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 그 대신 법정에서의 호기심과 고발로 인해 만년에 그가 체포될 것이라고 암시했다.(월 22일-25일)

참조

  1. ^ 바로스 (140 페이지)
  2. ^ Ayyar, K.V. Krishna (1938), The Zamorins of Calicut, p. 176
  3. ^ 댄버스(1894: 페이지 114). 오소리오(313쪽)는 1만9000명, 고이스(123쪽)는 1만8000명, 코레아(489쪽)는 2만 명이라고 한다.
  4. ^ 로페스(1504 페이지 185)는 1501년 주앙다 노바(Joang da Nova)의 작은 함대에 대한 해군 교전에서 어떻게 캘리컷 해군이 "그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으며, 따라서 다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자모린에서 그의 신하들에게 보낸 1502통의 편지를 말한다.
  5. ^ 로건(1887: 페이지 310).
  6. ^ Thomé Lopes (1504: p. 185) refers to the 1502 letters sent out by the Zamorin of Calicut to Cochin and other Malabari lords urging them join in a general anti-Portuguese boycott, to make sure the Portuguese found "no spices in all of India at any price" ("não lhes darem especiarias em toda an India por preço alguem").
  7. ^ Thomé Lopes (1504: p. 185) refers to the Trimumpara Raja of Cochin's reply to the Zamorin's letter, that he "had already negotiated a peace and very advantageous trade with the Portuguese, and for that reason would do nothing contrary to it." ("ja tinha ajustado paz e commercio mui vantajosamente com os Portuguezes, e por isso nada podia fazer em c트라리오에")
  8. ^ 트리맘파라 라자의 상태는 아직 조금 불명확하다. 다메스(1918: p. 86n)에 따르면, 코친의 정식 통치자는 본토에 있는 석호 건너편 에다팔리 왕으로, 코차이나 반도(Perumpadappu에 수도가 있는 곳)가 어느 시점에 아들을 위한 아패니지로 분리되었고, 코친 시는 다른 아들을 위해 북쪽 끝, 코친 시를 적절히 분리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맹장들은 영구적인 피고가 아니라, 그들이 연속해서 올라오기 전에 왕위 계승자들에게 일시적인 '훈련'의 근거지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코친의 지배자는 에다팔리의 두 번째 후계자였다. 에다팔리의 통치자가 죽자 제1차 후계자는 반도를 떠나 에다팔리에서 임무를 맡게 되어 있었고, 제2차 후계자는 코친에서 페럼파다푸로 옮겨 자신의 후계자(새 제2차 후계자)에게 코친을 배정하게 되어 있었다. 포르투갈인은 왕자의 후계자들이 서로 어느 정도 대립하던 시기에 도착한 것 같다(코친의 증가하는 번영은 아마도 왕자의 자기주장을 부추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 마침내 코친의 통치자가 적절한 왕이 된 것은 그 후였다(즉, 에다팔리 왕좌는 코친으로 옮겨갔다).
  9. ^ 화이트웨이(1899: 페이지 95, 251)
  10. ^ 다메스(1918년)에 따르면 복잡한 후계 규칙에 의해 트리맘파라 라자는 실제로 석호영주의 정식 자리인 에다팔리로 옮겨 코친시 정부를 후계자에게 할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그가 코친에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이 날짜(1503)는 보통 코친 왕국의 건국 시작을 적절하게 표시한다. 반면 일부 소식통들은 트리름파라 라자가 이 무렵이나 전투 직후 퇴위했고, 그의 후계자(명백한 조카) 역시 운니 고다 바르다(칸다고라)가 코친의 왕이 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것은 반드시 정상적으로 이해되는 퇴위일 필요는 없고, 단순히 후계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일 수도 있다 – 늙은 트리름파라는 정말로 에다팔리에게 '움직임'했을지도 모른다(즉, 그 직함을 정식으로 인수하고, 그의 후계자인 새로운 트리름파라에게 코친을 공식적으로 할당했다). 1505년 말 프란시스코 알메이다가 황금 왕관을 쓰고 '코친의 왕'으로 등극한 것은 원래의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트리름파라가 아니라 후계자였다.
  11. ^ 로건 (1887, 페이지 310)
  12. ^ 숫자의 불일치는 파체코가 귀환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아프고 다친 포르투갈 승무원들과도 모두 안장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총계가 150명이 될 수도 있지만, 신체 건강한 남성은 더 낮은 숫자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일, 1863: 페이지 92)
  13. ^ 알라스의 5번째 무적함대 목록에는 디오고 페르난데스 페레이라의 원래 배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 앨버커키의 논평 (16 페이지)은 그가 나우 컨센스상(파체코 자신의 배인 에스피리토 산토, 분명히 앨버커키와 함께 돌아왔다) 두아르테 파체코를 떠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앨버커키가 단지 2개의 캐러벨을 남겨두고 단순히 두아르테 파체코에게 인도에서 잃어버린 제3중대대의 naus가 무엇이든지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디오고 페르난데스 페레이라는 콘세상호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소코트라에서 막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추측이다. '디오고 페레이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14. ^ The auxiliaries of the Zamorin of Calicut named by João de Barros (Vol. 2, p. 140) include the kings and lords of Tanore (Kingdom of Tanur or Vettattnad), Bespur (Beypore) Cucurão ("by the Western Ghats", Kottakal?), Cotugão ("between Cannanore and Calicut"), Curim ("between Ponnani and Cranganore"), Repelim (Edapalli), Crangalor (Cranganore), Chal이아오(찰리얌), 파라푸람(파리야푸람?) 바날라 카리(?), 그리고 그 외 몇 개의 큰 지역 영주들과 '가까운 사람들'이 있다.
  15. ^ 벨(1917:84); 화이트웨이(1899: 페이지 97). According to João de Barros (Dec. I, Lib 7, c. 7, vol. 2, p. 139) the nominal vassals of Cochin included the lords of Paliporte (Pallipuram), Balurt (Palluruthy?), Bagadarij (?), Porca (Purakkad),Mangate (Alengad), Cambalão (Kumbalam), Cherij (Cherai) and Vaipij (Vypin). 비핀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를 버린 것 같다.
  16. ^ 화이트웨이(1899:98)
  17. ^ 코레아 (427 페이지)
  18. ^ 매튜(1997년)
  19. ^ 화이트웨이(1899: 페이지 98)
  20. ^ 오소리오 (278)
  21. ^ 매튜(1997: 페이지 23)
  22. ^ 사라바(1849: 페이지 132); 매튜(1997: 페이지 13)
  23. ^ 오소리오(p. 278)는 캘리컷 함대가 1만2000명을 태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5만 7천 보병과는 별도로 말이다. 파리아 에 수자는 함대가 4,000대만을 수송했다고 주장한다.
  24. ^ 파리아 에 수사, 페이지 61
  25. ^ 오소리오 (p. 278)는 베네치아 요원들의 권유로 칼리코트 파라우스 또한 면자루로 보강되었다고 주장한다.
  26. ^ 코레아 (427 페이지)
  27. ^ 화이트웨이(1899:93); 코레아(427 페이지)
  28. ^ 데이(1863: 페이지 92)는 그 패스를 코친에서 북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체투바'(체투바)에 놓으려고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게 되면 그 전투는 크랭가노레에 있는 캘리컷의 집결지보다 훨씬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29. ^ 예: 코레아 (482)
  30. ^ 날짜는 연대기와 역사에 따라 다르다. 일부 작가들(예: 로건, 1887년: 페이지 310)은 빠르면 3월 16일에 첫 번째 폭행을 데이트하는데, 이는 고이스가 포드로 출발하기 위해 제공한 날짜다. 그러나 고이스가 또한 5월 16일이 '팜 선데이 전 금요일'이라고 말하지만, 1504년의 팜 선데이는 18일이 아닌 3월 31일에 상륙했다. 우리는 이곳 카스타네다(196쪽)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화이트웨이(1899:99–100)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31. ^ 새리바, (1849: 페이지 133)
  32. ^ 두 코차이나는 오소리오 (p. 279)에서 프랑고르칸다가르로 명명되었는데, 이에 고이스 (p. 111)는 그들이 팔루르테아르라울의 영주였으며 트리맘파라 라자의 보물상(vedores)이라고 덧붙인다. 그들은 만남 내내 포르투갈인들과 함께 있었다.
  33. ^ 로건(1887년)은 3월 25일로, 화이트웨이(1899년: 페이지 100)는 2차 공격이 4월 5일이었다고 밝혔다. 다시 우리는 여기서 카스타네다 (p. 200)를 따라간다. 그는 그것이 부활절 일요일이라고 말한다.
  34. ^ 'Palinhar' in Góis (p. 115), and Castanheda (p. 228); 'Palignar' in Osório (p. 287), 'Palimbão' in Correia (p. 474), 'Palinhard' in Saraiva (1849: p. 138), 'Palignard' in Danvers (1894: p. 109), 'Palinganad' in Matthew (1997: p. 21); Whiteway (1899: p. 100) and Logan (1887: p. 310), both of whom placed the 'Kumbalam ford' at Edapalli, identify the 대체 패스 '발란자카'
  35. ^ 예: Duarte Pacheco Pereira의 8번 문서(1509: p.xix)
  36. ^ 고이스 (115); 사라바 (1849: 페이지 138)
  37. ^ 고이스, 이비드
  38. ^ 오소리오, 288쪽
  39. ^ 고이스 (115 페이지
  40. ^ 고이스 (116 페이지)
  41. ^ 예: 오소리오, 페이지 293
  42. ^ 오소리오, 289쪽, 고이스, 116쪽
  43. ^ 다시, 카스타네다 (208 페이지)가 준 날짜.
  44. ^ 이번 공격의 날짜를 제공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인 카스타네다(216쪽)는 이것이 "5월 6일 또는 7일 목요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1504년 5월 6일은 월요일, 목요일이 9일이었다. 그러나 6월 6일은 실로 목요일이었다. 만약 카스타네다 씨가 이달의 이름을 잘못 알았다면, 이는 콜레라 전염병이 싸움을 일주일 연기한 것이 아니라 한 달 내내 지연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런 규모의 전염병으로는 믿을 수 없다. 더구나 이번 사건 이후 다음 폭행을 6월 말이라고 신고한 사람들에 해당한다.
  45. ^ 카스타네다 (216 페이지)
  46. ^ 오소리오에 따르면, 301쪽; 카스타네다씨는 불을 지른 사람이 두아르테 파체코라고 말한다.
  47. ^ 코레아 (469); 화이트웨이(1899: 페이지 101); 카스타네다 (pp. 228-29)는 이 이야기를 폭행 후 긴 막간에 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아라울에서 있었던 두더지 컷의 에피소드 중에 두었다.
  48. ^ 하루(1863:93); 고이스(p. 123)는 여섯 번째 폭행 후 이 행사를 끝으로 향한다.
  49. ^ 댄버스(1894:112), 화이트웨이(1899:100) 및 벨(1917: 페이지 95)
  50. ^ 오소리오, 페이지 305
  51. ^ 카스탄헤다 (p. 243)와 고이스 (p. 121)는 이 폭행을 승천일 (theth 17th, 1504년 5월)에 날짜로 한다; 다른 사람들은 6월 중순이나 말경에 더 많이 배치한다.
  52. ^ 댄버스, 1894: 페이지 112
  53. ^ 고이스, 페이지 121; 카스타네다, 페이지 236; 오소리오, 페이지 306
  54. ^ 오소리오(p. 308); 고이스(p. 121)
  55. ^ 오소리오, 311쪽; 코레아는 모레노가 육지에 대한 담합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56. ^ 오소리오 (308)
  57. ^ 고이스, 페이지 123
  58. ^ 오소리오(p. 312), 고이스(p. 123)
  59. ^ 댄버스(1894: 페이지 114). 오소리오(313쪽)는 1만9000명, 고이스(123쪽)는 1만8000명(고장)은 1만8000명, 코레아(489쪽)는 2만 명이라고 한다.
  60. ^ Crowley, Roger (4 August 2016). Conquerors - how Portugal forged the first global empire. p. 149. ISBN 978-0-571-29090-1.
  61. ^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 8부(1509: p.xix)
  62. ^ (매튜, 1988 페이지 30)
  63. ^ In English translation, see W.J. Mickle, 1776, The Lusiad, or the discovery of India, an epic poem,p. 420, T.M. Musgrave, 1826, The Lusiad, an epic poem p. 365, R.F. Burton, 1880, The Lusiads, vol. 2, p. 367, and J.J. Aubertin (bilingual) 1878-84, The Lusiads of Camoens, vol.2 p. 201

원천

연대기

  • 주앙 바로스 (1552–59) 데카다아시아: 도스 페이토스, 오스 포르투게스 피자암 데스큐브리멘토, e constista, dos marres, e teras do Oriente. [12월. 나, 리브 7.]
  • 페르낭 로페스 카스타네다(1551–1560) 히스토리아는 데스코브리멘토 & 정복자인디아 펠로스 포르투게스[1833판]
  • 가스파르 코레아 (C. 1550년대) 렌다 다 인디아 (Lendas da india, 1858-64년, 리스본에 있는 첫 번째 술집: Academy Real Das Sciencias.
  • Manuel de Faria e Sousa (1666–75) 아시아 포르투게사, 3권.
  • 다미앙 고이스 (1566–67) 크로니카펠리시시모 레이 D. 마누엘
  • Thomé Lopes "Navegação as Indias Orientaes, escrita em Portuguez por Thomé Lopes, traduzida da lingua Portugueza para a Italiana, e novamente do Italiano para o Portuguez", trans. 1812 into Portuguese, by Academia Real das Sciencias in Collecção de noticias para a historia e geografia das nações ultramarinas: que vivem nos dominios portuguezes, ou 5부 2권
  • 제로니모 오소리오 (1586) 데 레부스 에마누엘리스, 1804 트랜스. Da Vida e Feitos d'El Rei D. 마누엘, 리스본: 임프레상 레지아.
  •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 (c. 1509) 에스메랄도 데 시테 오르비스 온라인

이차적

  • A.F. 벨, (1917) "두아르테 파체코 페레이라, 1465–1533", 포르투갈 초상화, 옥스퍼드: 블랙웰
  • 데이미스, M.L. (1918) "인도양과 그 거주자들에 대한 설명" 제1권 (리브로 두아르테바르보사의 영 번역), 2005년 재인쇄, 뉴델리: 아시아 교육 서비스
  • 댄버스, FC (1894) 인도의 포르투갈인, 동방의 제국의 흥망성쇠의 역사. 2권, 런던: 알렌
  • 데이, F. (1863) 페르마울의 땅, 또는 코친의 과거와 현재. 마드라스: 아델피.
  • Logan, W. (1887) Malabar Manual, 2004 reprint, New Delhi: Asian Education Services.
  • 매튜, K.N. (1988) 인도의 포르투갈 항해 역사. 뉴델리: 미탈.
  • K.S. 매튜(1997) "인도 해군과 포르투갈의 만남: 장점과 단점"은 인도의 해군 전통, 뉴델리: Northern Book Centre에서 편집자 쿠럽에서 볼 수 있다.
  • 몬테이로, S. (1989) 바탈하스 콤바테스마리냐 포르투게사, 제1권(1139–1521) 리스본: 사다 코스타.
  • 사라바, F. S.L. (1849) Os Portuguees em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e Occeania, Vol. 2권, 리스본: 보르헤스.
  • 화이트웨이, R. S. (1899) 인도에서 포르투갈의 힘의 상승, 1497–1550. 웨스트민스터: 경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