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테마 네크 전투
Battle of Latema Nek라테마 네크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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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제1차 세계 대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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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지휘관과 지도자 | |||||||
게오르크 크라우트 소령 | 윌프리드 말레손 장군 마이클 티게 준장 | ||||||
힘 | |||||||
1,500–2,000 3개 이상의 기관총 | 5개 대대 | ||||||
사상자 및 손실 | |||||||
70명 이상 사망 | 270명 사망, 부상 또는 실종 |
라테마네크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벌어진 동아프리카 전역의 전투였다.
배경
살라이타 전투 이후 동아프리카의 독일군 사령관 폴 폰 레토보-보르벡 장군은 또 다른 공격을 예상하고 식민지의 북쪽으로 방어선을 재편성했다. 살라이타 진지는 버려졌고, 독일군은 카헤로 가는 길에 서 있던 라테마-레아타 언덕으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새로운 방어 태세는 3월 8일 살라이타에서 독일 방어를 지휘했던 게오르크 크라우트 소령이 1,500-2000 슈츠루페와 독일 장교들과 함께 유인했다.[1] (네크를 사이에 둔 채) 이제 공격해야 할 언덕이 두 곳이나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윌프리드 말레손 장군이 직면한 문제들은 살라이타에서의 문제들과 비슷했다. 언덕은 울창한 덤불로 덮여 있었고, 그것은 언덕 위로 더 두꺼워졌다. 언덕 주위의 평야는 엄폐물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는 어떤 공격 세력도 위에서부터 살인적인 화재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퍼스트 어택
라테마에 대한 공격은 3월 11일 오전 11시 45분에 시작되었다. 살라이타에서 패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레손 준장은 제1차 동아프리카 여단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작전을 수행하게 하였는데, 이 여단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벨필드의 기마 정찰병
- 기마 보병 중대
- 6번과 8번 필드 배터리
- 134번째(콘월) 중전지, 왕립 수비대 포병(하위츠)
- 로데시아 2연대
- 제3대 킹스 아프리카 소총
- 130대 조지 왕 자신의 발루치스
- 충성북랜캐셔의 기관총 배터리
- 자원봉사 기관총 회사
말레슨은 부하들에게 라테마 힐에 대한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지형이 늪으로 뒤덮인 전장의 측면, 특히 남쪽의 지형이 밀집되어 있기 때문에 우회적인 측면 공격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1] 발루치스와 제3대 킹스 아프리카 소총은 로도스 연대가 예비군인 가운데 각각 오른쪽과 왼쪽을 잡고 공격에 투입됐다. 3차 KAR이 부대로서 싸운 첫 액션이었다. 보병은 3,000야드의 사정거리에서 독일군의 진지를 폭격하는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적의 진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영국군은 중총과 기관총, 그리고 소칼리 포탄에 의해 강제로 후퇴했다. 공격이 주춤하자 맬러슨 영국군 사령관은 중병에 걸려 지휘권을 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극장 지휘관 얀 스마우츠가 동의했고, 유능한 준장 마이클 티게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오후 2시에 공격은 오픈 레벨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재개되었지만 독일 포지션에서 약 1,000야드 떨어진 곳에서 실시되었다.[1]
두 번째 공격
오후 4시에 제5남아공 연대가 타베타에 예비로 도착했다. 새로 임명된 브리지 사령관이요 티게 장군은 오후 5시에 두 번째 공격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이번에는 130대 불루치스가 오른쪽 측면을 지키는 킹스 아프리카 소총과 함께 로도스인들이 앞장섰다. 9번과 5번 필드 배터리로 구성된 추가 증원군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즉시 실전 배치되었다. 킹스아프리카 소총 사령관인 콜로넬 B.R. 그레이엄 중령이 포함된 사상자를 내면서 공격군은 다시 한번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2] 어둠이 몰려오는 동안 몇 명의 고립된 공격자들의 주머니가 정상에 올랐지만, 결국 독일의 반격에 의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공격부대를 보강하기 위해 티게는 제5남아공 연대의 절반을 라인 안으로 진입시키도록 명령했다. Entente 부대는 증원에도 불구하고 다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스마츠 사령관은 티게의 지휘 아래 제7남아공 연대를 투입하며 응수했다. 7호는 대략 오후 8시에 티게에 도착했고, 새로운 계획이 작성되었다. 가장 신선한 병력이었던 두 남아공 연대는 밤이면 총검을 고친 채 네크를 공격할 것이다.
세 번째 공격
오후 9시 15분에 시작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파도는 곧바로 빛의 부족으로 인해 복잡해진 이전의 Nek를 빼앗으려는 시도와 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5연대가 공격을 주도했고, 7연대가 조금 뒤졌다. 이번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적이 네크 강에 남겨질 때까지 양쪽 언덕을 올라가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진격은 멈춰 있었다. 어둠의 혼란 속에서, 많은 수의 남자들이 길을 잃었고, 그들은 예비군인 제1동아프리카 여단에 합류하기 위해 다시 출발 위치로 후퇴했다. 그와 동시에 이전 공격에서 부대와 분리되어 아직 언덕에 있던 킹스 아프리카 소총과 로도스인들의 부하들이 공격에 다시 합류했다. 콜로넬 프리에스 중위(남자 18명)와 톰슨 소령(남자 170명)은 라테마와 리타의 정상들을 붙잡고 있었다. 티게는 전투의 사건을 따라가지 못하고 큰 사상자와 반격 가능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새벽 4시 20분에 철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순찰대가 퇴각을 명령하기 위해 네크에 이르자, 그들은 높은 곳을 지휘하는 프리스와 톰프슨과 독일군이 완전히 퇴각하는 것을 발견했다. 스마츠 사령관은 진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제8연대를 현장으로 출동시켰다.
여파
전투 후 독일군은 추가 방어 준비를 위해 카헤 호수로 후퇴했다. 프리스와 톰슨은 둘 다 약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로훈장을 받았다. 티게 장군은 말레손의 후임으로 2사단의 지휘권을 유지했다.
각주
참조
- 로스 앤더슨, 잊혀진 전선 1914-1918: 동아프리카 전역 (Tempus 출판사, 2004)
- 휴 스트라찬, 아프리카 제1차 세계 대전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 The King's African Squires (Gale & Polden Ltd, 1956) Col H. Moyse-Bartlett 중위, The King's African Squires (Gale & Polden Ltd., 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