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라우 전투
Battle of Stellau스텔라우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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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십자군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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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성 | |||||||
덴마크 | 홀슈타인 | ||||||
지휘관과 지도자 | |||||||
발데마르 2세 | 아돌프 3세 | ||||||
힘 | |||||||
~2000-4000 | ~3000 | ||||||
사상자 및 손실 | |||||||
경미한 손실 | ~3000 전체 병력이 소멸되었다. |
스텔라우 전투는 1201년에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의 손목 근처의 스텔라우 마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홀슈타인의 아돌프 3세가 이끄는 독일군은 덴마크의 카누테 6세 왕 밑에서 덴마크 군대와 싸웠다.슐레스비히의 발데마르 공작은 동생인 덴마크 왕의 이익을 지지하여 홀슈타인으로부터 아돌프와 그의 군대를 물리쳤다.
역사
1197년 홀슈타인의 아돌프 3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온 후, 1200년 뤼겐 섬에서 그와 덴마크 국왕 카누테 6세 사이의 의견 충돌이 발생했고, 뒤이어 디트마르첸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슐레스비히의 발데마르 공작은 그의 군대에 전쟁에 대비하고 그의 형제가 통치하는 덴마크 편을 들라고 명령했다.아돌프는 홀슈타인으로부터 독일군을 이끌고 스텔라우에서 전투를 벌이며 데인족을 격파했다.그러나 아돌프와 그의 군대가 함부르크 성 쪽으로 후퇴하자 그는 포위되어 패배하고 발데마르에게 붙잡혔다.
1202년 슐레스비히의 발데마르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되었다.아돌프를 투옥한 것은 1203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병으로 인해 홀슈타인에게 모든 청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새 왕에게 풀려났다.아돌프는 1225년 죽을 때까지 그의 조상 자리인 샤움부르크 성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가 끝난 뒤 발데마르는 '정복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홀슈타인을 비롯한 북독 해안을 헤게모니로 유지했다.그의 권위는 1227년 보른호베드 전투까지 계속되었는데, 이때 그는 아돌프 3세의 아들인 홀슈타인의 아돌프 4세에게 패했다.
브레멘의 게브하르트 2세 대주교가 1230년에 봉헌한 로마네스크 석조 교회는 현재 스텔라우에 있는 역사적인 전투 장소를 나타내고 있다.
원천
- Detlev von Liliencron, Die Schlachbei Stellau 1201, Projekt Gutenberg–DE, 2006년 7월 24일 회수(독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