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히트 군

Blackheath Army
찰스 2세제3차 앵글로-더치 전쟁의 일환으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그 군대는 아무런 행동도 보지 못한 채 해체되었다.

블랙히트 군대는 1673년 여름 켄트블랙히트에 모인 영국군의 부대였다. 낡고 새로 올라온 연대로 구성된 군대는 프랑스 후게노 프레데릭 슘베르크의 지휘 아래 배치되었다. 그것은 제3차 앵글로-더치 전쟁에 대한 영어 기여의 일환으로 네덜란드 해안 지방인 뉴질랜드를 공격하기 위해 블랙히트 군대를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텍셀 전투(1673년 8월)에서 영국 해군이 패배한 이후, 뉴질랜드 원정대는 포기되었다. 새로 올라온 연대는 해체되고 군대는 전쟁 전의 작은 규모로 되돌아갔다.

역사

영국의 상비군Restore 시대 동안 상대적으로 작았다. 전쟁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칼리슬 백작이나 알베말 공작 같은 유력 인사들에 의해 몇 개의 신선한 연대가 길러졌다.[1] 그 대열은 상비군 출신이나 대륙군에서 외국 근무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흩어진 채 갓 모집한 부담금으로 채워져 있었다. 1673년까지 블랙히트군의 종이 강도는 1만 2천 명이었다. 계엄령을 선포할 계획이었지만 의회에서 반대 의견이 제기되면서 무산됐다.[2] 연대장 중 한 명인 슘베르크와 버킹엄 공작 사이에 군대의 지휘권을 놓고 어느 정도 경쟁이 벌어졌고, 두 사람은 거의 결투를 벌일 뻔했다. 샤를 2세의 장남인 몬머스 공작이 그들 대신 지휘권을 부여받을 것이라는 소식이 널리 보도되었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3]

뉴질랜드를 공격하려는 계획은 조셉 윌리엄슨 경에 의해 작성되었다. 영국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네덜란드 공화국을 상대로 영토를 더 많이 획득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오렌지윌리엄과 그의 스페인 동맹국들의 반격으로 이 전략이 훼손되었다. 육군은 1673년 6월까지 집결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여러 연대가 블랙히트에 도착하는 데 늦었다. 7월 18일 탐험대는 마침내 출발했다. 루퍼트 왕자의 함대가 북해를 횡단할 수 있는 통로를 뚫는 동안, 그것은 처음에 그레이트 야머스로 이송되었다. 8월 21일 루퍼트의 영불 함대는 텍셀 전투에서 패했다. 이로 인해 뉴질랜드 원정이 취소되었다.[4]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평화 타결에 이어 군대의 미래는 의문의 여지를 남겼다. 영국 의회 일각에서 왕이 평시에 대규모 상비군을 동원해 절대 통치를 강행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압력에 눌려 샤를르는 새로 올라온 연대를 해산하고 군대를 더 작은 전쟁 전의 크기로 되돌리기로 합의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0년이 지난 1685년 샤를르의 동생 제임스 2세몬무스의 반란을 만나기 위해 확대된 이후 군대의 규모를 줄이지 않았다.

참조

  1. ^ 칠드런스 1976, 페이지 234.
  2. ^ 1976년, 페이지 77.
  3. ^ 왓슨 1997, 페이지 67–68.
  4. ^ Childs 1976, 페이지 181–182.

참고 문헌 목록

  • 아이들, 존(1976년). 찰스 2세의 군대. 루틀리지.
  • 왓슨, J.N.P. (1997년) 장군 및 반란군 대장: 몬머스 공작 제임스의 삶. 조지 앨런 & 언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