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빈 컴퍼니

Calvin Company
캘빈 컴퍼니
유형사설
산업영화 제작
설립됨1931년 (1931년) 미국 미주리캔자스시티에서
파운더스
  • 포레스트 캘빈
  • 베티 캘빈
  • 로이드 톰프슨
  • 래리 셔우드
현존하지 않는1982년 10월 31일 (1982-10-31)
본부,
미국
상품들Movie-Mite 필름 프로젝터
서비스교육 및 산업 영화

캘빈 회사는 미주리 주의 캔자스 시티에 본사를 둔 광고, 교육 및 산업 영화 제작 회사로서 거의 반세기 동안 미국에서 그 유형의 가장 크고 성공적인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

오리진스

포레스트("F. O.") 캔자스 플레전턴 출신의 칼빈은 1920년대 후반 캔자스 대학에서 저널리즘광고를 공부했다. 1928년 F. O.는 KU 마스코트인 제이호크의 간략한 버전을 그렸다.[1] 대학을 졸업한 후, F. O.는 캔자스 시티의 광고 대행사에 일하러 갔고, 우편 광고와 상업 예술을 직접 하고, 두 가지 모두 거친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기관에서의 그의 임기는 흥미로운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 광고 대행사는 고객들을 위한 작은 광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때때로 16mm 영화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관행이었는데, 당시 16mm의 영화 형식은 편리하고 저렴하며 교육용 및 비즈니스용 영화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대부분 홈 영화용으로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F. O. 칼빈은 16mm의 미래에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이 기획사는 대공황에서 살아남지 못했지만, 1931년 F. O.와 그의 아내 베티는 원래 16mm 비즈니스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광고 대행사인 칼빈 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들은 캔자스 시티의 유니언 역 건너편에 있는 비즈니스맨 보증 빌딩의 원룸 사무실에서 출발했다. Betty Calvin은 사업적인 측면을 관리했다; F. O. 캘빈은 세일즈맨이었다. 초기에는 16mm가 자신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예비 산업 고객들에게 납득시키는 것과 영화를 제작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이 나뉘었다. 초기에 칼빈 부부는 캔자스시티가 입지, 산업, 상업에 근접하는 것을 이용했고, 그들의 초기 고객들은 캔자스 밀가루 밀스, 토페카, 캔자스, 캔자스시티 상공회의소, 웨스턴 오토, 캔자스시티 남부 철도와 같은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과 단체들이었다.

1932년 F. O.의 전 대학 동우애자 중 한 명인 로이드 톰슨(영화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사진 애호가)이 신생 칼빈 컴퍼니에 부사장으로 입사했다. 그 다음 해, 또 다른 F. O. Calvin의 오랜 대학 친구인 Larry Sherwood는 총괄 프로듀서 겸 총괄 영업 매니저로 입사했다. 몇 년 후 캘빈 회사는 괜찮은 사업을 해서 20명의 정규 직원을 채용했다. 1936년, 그들은 캔자스 시티에 있는 그들 자신의 스튜디오와 본사 건물로 이사했다. 이 시설에는 칼빈이 자체 제작을 위해 사용했던 최첨단 16mm 필름 가공 실험실은 물론 대학 등 자체 영화 제작 능력을 갖춘 16mm 소규모 제작자들에게 가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도 포함됐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캘빈이라는 이름을 비연속적인 영화 산업 전반에 널리 퍼지고 더 나아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얼마 후, 전국적으로 알려진 포춘지 500대 회사들은 16mm에 기회를 잡기 시작했고 그들을 위한 판매 훈련과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캘빈 회사를 고용했다. 듀폰, 굿이어, 캐터필러 트랙터 컴퍼니, 제너럴 밀스, 사우스웨스트 벨, 웨스팅하우스는 1930년대 말까지 모두 캘빈의 고객 목록에 합류했다. 이것들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될 계정이었다. 칼빈은 또한 맥그로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미국 교육청 등의 회사를 통해 전국의 공립학교에 배포된 선구적인 교실 영화를 제작하면서 교육 영화 분야에도 진출했다. 캘빈 컴퍼니는 또한 비극영화 산업에서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세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효율적인 16mm 영화 제작과 처리 방법을 개척했으며, 1938년에는 최초의 사업영화를 풀 사운드와 풀 컬러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1940년대

1940년, F. O. Calvin은 16mm 영화 프로젝터와 기타 장비를 제조하는 자회사인 Movie-Mite Corporation을 설립했다. 여기에는 최초의 책상 크기의 영화 프로젝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0년대까지 수만 개의 이 "영화-미트"가 팔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 농무부 같은 사람들이 후원하는 수많은 사기 진작 반바지뿐만 아니라 해군공군을 위한 수십 편의 안전과 훈련 영화를 만들어 번창했던 칼빈 회사에 금광을 증명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F. O. 칼빈은 워싱턴 D.C.에서 해군의 연간 1달러짜리 사내로서 칼빈 컴퍼니의 것과 유사한 영화 제작 시스템의 가동을 조언했다. 해군은 그가 캘빈 작전을 워싱턴으로 옮기기를 바랐지만 F. O.는 자신이 일하고 사는 것을 좋아하는 마을인 캔자스 시티에 그 설정이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저항했었다. 전쟁 중 군인들을 위한 작업은 칼빈 컴퍼니의 명성과 명성을 확립했고, 그 회사는 이후에도 수년간 미국 정부를 위한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칼빈 회사는 엄청난 성장을 경험했다. 이 회사의 정규 직원은 60명으로 늘었고, 그들은 캔자스 시티 시내에서 바로 동쪽에 있는 트루먼 로드와 트루먼 애비뉴의 모퉁이에 있는 7층짜리 방화벽돌 건물인 그들의 새롭고 가장 큰 본부로 이사했다. 뉴센터빌딩은 1907년 지어진 건물로 원래 1층에 2개의 대형 영화관을 수용해 왔으며, 캘빈컴퍼니는 이를 영화 제작을 위한 거대한 음향 단계로 전환해 뉴욕로스앤젤레스 사이 최대 규모라고 한다. 캘빈 빌딩에는 1950년대 초반까지 강세를 보였던 영사실, 회의실, 임원실, 감독 및 작가를 위한 사무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인쇄 및 가공 실험실, 무비-미트 코퍼레이션의 공간도 들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미국에서도 산업영화, 교육영화 제작 붐이 일었고, 칼빈컴퍼니는 이 분야의 선도적 제작자가 되기 위해 줄을 섰다. 또한 현재 시장에는 합리적인 가격의 16mm의 새로운 필름 장비들이 넘쳐났고, 이것은 16mm의 대중화를 위한 칼빈사의 초기 목표가 달성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한편, 그것은 또한 경험이 부족한 많은 새로운 생산자들을 현장으로 불러들였다. 1947년 F. O. Calvin은 이것을 산업문제로 인식하여 캔자스 시티에서 회사의 음향무대에서 열리는 Calvin Workshop이라고 불리는 3일간의 세미나를 조직하여 16mm의 작업 가능한 영화제작 절차를 설명하고 시연하기로 결정했다. 북미의 비영화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참석하도록 초청받았고, 그 행사에는 2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렸다. 캘빈 컴퍼니가 계속하기로 결정했을 정도로 성공적이었고, 1975년까지 매년 개최되는 기념 연례행사가 되었다. 칼빈워크숍에는 매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450여명의 생산자와 기술자들이 몰려들었다.

1950년대와 "골든 에이지"

캘빈 컴퍼니의 '골든 에이지'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약 10년간 지속되었다. 당시는 기업과 학교를 위한 영화를 만드는 사업이 성황을 이루었고, 칼빈은 그 분야의 국내 대표 프로듀서였으며,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 모두를 위한 영화를 정기적으로 제작했으며, 이러한 노력으로 영화제 상과 상을 수상하는 경우도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칼뱅 직원은 100명에서 200명으로 성장했고, 그 후 결국 300명에 가까운 정규직으로 성장했다. 그 회사는 프리랜서를 고용하지 않았고, 상근직원을 유지했다. 스탭에는 항상 네다섯 명 정도의 이사가 있었고, 같은 수의 작가, 카메라맨, 편집자, 음향 기술자 등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로써 한 번에 최소 4편의 영화가 제작될 수 있었다. 모든 영화 제작은 캔자스시티 라디오 겸 신문 작가 출신으로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전쟁 중 이 회사에서 감독으로 일하게 된 프랭크 바하이트가 감독했다.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와 7월 4일 소풍이 있었고, 봉급날에는 직원들이 근처 펍을 방문하여 그들의 월급을 셔플보드 볼링에 거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캘빈에서는 조합이 여러 차례 투표에서 탈락했다. 이익 공유, 최고 경영진 접근, 주도권 장려 등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들은 1년에 약 1,800만 피트의 영화를 제작했다. (또는 현대 지역 신문의 표현대로 키웨스트에서 시애틀까지 16밀리미터 스트립 한 장을 만들고 부분적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1951년에 그들은 이스트만 코닥으로부터 컬러 필름을 가공하는 허가를 받은 최초의 외부 회사였고, 1950년대 초 칼뱅은 8mm 필름 형식을 활용한 최초의 전문 영화 회사였다. 1950년대 후반 칼빈컴퍼니는 대학과 맥그로우힐 등 출판사와 연계해 교육용 반바지를 자주 제작하는 대학필름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하며 교육영화 분야에 상당한 진출을 이루었다.

1950년대까지 칼뱅은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과 영화산업 종사자들에게 신뢰받는 공로 브랜드 이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회사는 캔자스시티에서 특별히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은 캔자스 시티 예술에 중요한 장소로서, 많은 지역 배우들을 꾸준히 고용했고, 그들 중 다수는 라디오텔레비전 발표와 같은 다른 분야에서 그들의 주 수입원을 벌었다. They included Art Ellison, Shelby Storck, James Lantz, Bill Yearout, Murray Nolte, Twila Pollard, Henry Effertz, Bob Kerr, Keith Painton, Ken Heady, Leonard Belove, Stan Levitt, Harriet Levitt, Ralph Seeley, Harvey Levine, James Assad, Al Christy, and Sid Cutright. 이들 중 몇몇은 영화와 TV에서 주인공 배우로 경력을 쌓았지만, 대부분은 캔자스 시티에 머물렀고 그들이 출연한 유일한 TV나 영화 배역은 인 콜드 블러드, 페이퍼 문, 더 데이 애프터, 그리고 미스터 앤 미세스 브리지와 같은 지역에서 촬영된 영화와 프로그램이었다.

캘빈 컴퍼니는 할리우드의 전문 배우들을 가끔 데려와 영화에서 특별한 역할이나 내레이션을 하기도 했다. 윌리엄 프롤리, 존 카라딘, 제인 다웰, 모리 암스테르담, 아르테 존슨, 주디 카네, 제임스 휘트모어, E.G 마샬이 모두 칼빈 오퍼링에 출연했다. 칼빈은 해리 트루먼, 월터 크롱카이트, 토마스 하트 벤튼, 존 카메론 스웨이지와 같은 이전 지역 사람들에게도 가끔 면회를 요청할 수 있었다.

칼빈은 할리우드에 갈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이 지역의 젊은 영화제작 지망생들에게 기회를 제공했다. 칼빈은 로버트 알트먼, 리처드 C로 장편 영화와 텔레비전 감독들을 위한 훈련으로 일했다. 사라피안, 그리고 레자 바디이. 캔자스시티 출신인 앨트먼은 1950년대 초 캘빈과 함께 영화감독을 시작했으며, 1956년 캔자스시티에서 촬영되고 톰 러플린이 주연한 그의 첫 장편 영화 ' 플라이버즈'에서 많은 캘빈 레귤러스를 캐스팅과 제작진으로 사용했다.[2] 지역에 기반을 둔 영화관 전시자 엘머 로덴 주니어가 제작한 이 적당히 성공한 10대 착취 영화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앨트먼의 성공적인 경력을 이끌어 냈고, 로덴 주니어가 제작한 두 번째 장편 영화로 이어졌으며, 1958년 캔자스 시티에서 촬영된 문제 청소년 '더 쿨 앤 더 크레이지'와 관련된 영화로도 이어졌다. 이 영화는 또한 출연진과 제작진에 칼빈 스타들을 많이 출연시켰다.

1960년대와 폐쇄

1959년 칼빈 회사의 원래 설립자 4명이 은퇴하였고, 회사의 자문 위원회에서 계속 근무하였지만 칼빈 조직은 새로운 경영에 들어갔다. 칼뱅의 오랜 중역인 레너드 콕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 회사명은 칼빈 프로덕션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경영상의 변화는 오랜 기간 동안 핵심 생산직 직원 몇 명의 이탈과 1960년대 동안 느리지만 꾸준한 사업 감소로 이어졌다. 1968년까지 생산직원은 대폭 삭감되었고 몇 개의 오랜 계좌가 떠내려갔다. 케크는 1931년 캘빈커뮤니케이션즈라는 회사의 이름을 바꾸고 원룸 사무실과 함께 시작한 건물의 첫 2층을 매입하는 등 지지부진한 시기를 이겨내고 확장을 시도했으나 프로젝터가 VCR로 거래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1970년대 칼뱅은 잠시 비디오테이프 시장의 일부를 잡으려 했지만, 회사는 40년 전에 개척했던 16mm 필름 형식에 더 적합했고, 비디오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은 곧 포기되었다. 루이빌, 피츠버그, 디트로이트의 위성 스튜디오가 팔렸다. 마침내 캔자스시티에 칼빈 스튜디오가 생겼을 뿐인데,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1980년경 정규 영화 제작이 중단되었다. 오직 캘빈 필름 처리 실험실만이 계속되어, 1982년 할로윈에 가동을 공식적으로 중단할 때까지 점점 더 많은 사업과 돈을 잃었다. 1991년 1105 트루먼 로드의 옛 7층 칼빈 본사가 대형 가상 학교 프로젝트를 위해 난파 공에 쓰러졌다.

레거시

2002년, 산업 영화 보존가 릭 프레링거는 캘빈 컴퍼니의 생존 영화 판화 150점과 필름 명재 및 미청구 물품 약 2만 5천 캔을 캔자스 시티에서 의회 도서관으로 옮겼는데, 이 곳에는 2019년 가을 현재 약 3,000편의 캘빈 영화가 접속되어 목록화 되어 있다. 컬트 클래식인 The Your Name Here Story(Calvin Workshop 세미나에서 보여 주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산업 영화 형식과 진부한 이야기를 풍자함)를 포함한 캘빈 컴퍼니의 몇몇 영화들은 프레링거 아카이브에서 무료로 관람하고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프리링거에서 무료로 시청과 다운로드를 할 수 있는 11개의 테이크아웃과 캘빈 컴퍼니의 금고에서 발견된 재고 영상이 있는데, 그 중 일부는 The Your Name Here Story의 제작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 릴들은 194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칼뱅의 다양한 작품들에서 찍은 영상을 담고 있다. 칼빈 영화 위임 작업(1959년)은 A/V 긱스를 통해 사무실이 돌아가면서 편집 비디오테이프의 '밝은 젊은 신인'과 같은 사무 관리 문제에 관한 다른 칼빈 영화들과 함께 구입할 수 있다. 수상작인 안전영화 '완벽한 범죄'(로버트 알트먼 감독)는 물론 '위험의 색'(1968), '너의 학교 안전순찰대'(1958) 등 다른 영화들도 '뭔가 이상한 비디오'를 통해 비디오테이프나 DVD로 구입할 수 있다.

실제 산업 영화

산업 영화 자기 패러디

Calvin Company Outtake and Stock 영상 릴스

  • 1 (1940년대-1960년대)
  • 2 (1940년대-1960년대)
  • 3 (1940년대-1960년대)
  • 4 (1940년대-1960년대)
  • 5 (1940년대-1960년대)
  • 6 (1940년대-1960년대)
  • 7 (1940년대-1960년대)
  • 8 (1940년대-1960년대)
  • 9 (1940년대-1960년대)
  • 릴 10 (1940년대-1960년대)
  • 릴 11 (1940년대-1960년대)

참조

  1. ^ "Blackmar's Origin Of The Jayhawk". KU History. Retrieved 2019-02-17.
  2. ^ Armstrong, Rick, ed. (2011). Robert Altman: Critical Essays. McFarland & Company. p. 5. ISBN 978-0786444144.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