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프렌치 보이드
David French Boyd데이비드 프렌치 보이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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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번 대학교 총장 | |
재직중 1883–1884 | |
선행자 | 윌리엄 리로이 브룬 |
성공자 | 윌리엄 리로이 브룬 |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 총장 | |
재직중 1877–1880 | |
선행자 | 초대 LSU 사장 |
재직중 1884–1886 | |
성공자 | 토머스 덕켓 보이드 (인터심) |
개인내역 | |
태어난 | 와이더빌, 와이더 군 미국 버지니아 주 | 1834년 10월 5일
죽은 | 1899년 5월 27일 루이지애나 주, 배턴 루즈 | (64세)
휴게소 | 배턴루즈의 매그놀리아 묘지 |
관계 | 토마스 덕켓 보이드 (형) |
상위 항목 | 토마스 J.와 미네르바 A. 프렌치 보이드 |
병역 | |
얼리전스 | ![]() |
지점/서비스 | ![]() |
순위 | ![]() |
구성 단위 | 루이지애나 보병 제9대 |
전투/와이어 | 미국 남북 전쟁 |
데이비드 프렌치 보이드(David French Boyd, 1834년 10월 5일 ~ 1899년 5월 27일)는 미국의 교사 겸 교육 행정가였다. 루이지애나 주립대(LSU) 초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수학과 도덕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또한 잠시 앨라배마 농기계대학(현 아우번 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전기
부유한 변호사 겸 철도 프로모터인 토마스 보이드의 장남 보이드는 버지니아주 와이더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버지니아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모국에서의 개인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는 루이지애나로 이주했고, 1860년에 센트럴 루이지애나 파인빌에 새로 생긴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교수진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남북전쟁 전날에 남북전쟁의 열렬한 분리주의자인 보이드에게 이길 수 없는 북한과의 전쟁을 추구하는 남한의 어리석음을 경고한 것으로 유명한 윌리엄 테쿰세 셔먼 교육감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전쟁 중에 보이드는 남부 연합군에서 싸웠다. 그는 처음에 북버지니아군의 유명한 루이지애나 타이거스의 일부였던 제9기 루이지애나 보병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후에 웨스턴 극장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공학을 전공했다. 그는 제이호커 민병대에 붙잡혀 연합군에 팔렸다가 셔먼의 개입에 따라 교환되어 남으로 돌아왔다.
1865년 전쟁이 끝난 후, 보이드는 감독관으로 다시 신학교에 복귀했고 이후 모릴랜드그랜트대학법의 조건에 따라 바톤루즈에 근거지를 둔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으로 이 기관을 변화시킨 헌장을 썼다. 1880년 교수진과의 갈등으로 해임되었다가 1884년 LSU 사장으로 복직되었다. 공백기에는 앨라배마주 오번 소재 오번대 총장으로 1년간 재직했다.
그는 1899년에 사망했으며, 바톤루즈의 목련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참조
-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 정보
- 저메인 M. 리드, 데이비드 프렌치 보이드: LSU University Press, 1977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설립자.
- 데이비드 F. 보이드 원고, 월터 L.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교 플레밍 컬렉션, http://www.lib.lsu.edu/special/findaid/0890m.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