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C.크르지조스키
Edward C.에드워드 C.크르지조스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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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달 오브 아너 수상자 | |
태어난 | 일리노이 주 시카고 | 1914년 1월 16일
죽은 | 1951년 9월 3일 대한민국 강원도 양구군 | (37세)
매장지 | 일리노이 주, 정의의 부활 가톨릭 묘지와 묘지 |
얼리전스 | 미국 |
서비스/지점 | 미국 육군 |
순위 | 선장 |
구성 단위 | B 중대, 9 보병 연대, 2 보병 사단 |
전투/와이어 |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수상 | 메달 오브 아너 퍼플 하트 |
에드워드 C. 크르지조스키(Krzzowski, 1914년 1월 16일 ~ 1951년 9월 3일)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복무하던 군인이다.그는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피비린내 나는 능선 전투 중에 행한 행동으로 사후 명예훈장을 받았다.
명예훈장 표창
장소 및 날짜: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3일까지 한국의 톤둘근처
키케로, 일레에서 근무했다.출생: 1914년 1월 16일 시카고 일레
G.O. 번호: 1952년 6월 12일 56호.
인용:
크르지조프스키 대위는 B 회사의 지휘관으로서 적에 대항하여 행동할 의무의 부름을 넘어서서 눈에 띄는 용맹과 불굴의 용기로 두각을 나타냈다.힐 700호를 강력하게 방어하는 공격에 앞장선 그의 회사는 적의 벙커로부터 잔인한 십자포화와 수류탄 공격을 받았다.불을 뿜는 언덕을 기어오르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수류탄으로 벙커 1개를 없애고 카빈 불로 1초를 소탕했다.그날 밤 더 많은 종신직으로 퇴직할 수 밖에 없었던 회사는 캡틴이 이끌었다.크르지조프스키, 다음날 공격을 재개하여 수백 야드를 얻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수적으로 우월한 적대세력에 압도당한 그는 부하들에게 부상자들을 대피시키고 뒤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이들이 무사히 철수할 수 있도록 보호사격을 한 그는 수류탄 파편에 다시 상처를 입었지만 대피를 거부하고 방어를 지휘했다.9월 3일, 그는 그의 용맹한 부대를 지휘하여 몇몇 적대적인 위치를 전복시켰지만, 다시 회사는 살인적인 화재로 꼼짝 못하게 되었다.언덕에 박격포 농도를 계획하기 위해 열린 돌기둥으로 용감하게 혼자 진격하던 그는 적 저격수의 불길에 즉사했다.크르지조스키 대위의 완벽한 강인함, 영웅적인 리더십, 그리고 용맹스러운 자기 희생이 그렇게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내내 극명하게 입증되어, 자신과 보병, 그리고 미군에게 최고의 명예와 영속적인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1]
참고 항목
메모들
- ^ ""EDWARD C. KRYZOWSKI" entry". Medal of Honor recipients: Korean Wa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June 8, 2009. Retrieved 2007-12-31.
참조
- ""EDWARD C. KRYZOWSKI" entry". Medal of Honor recipients: Korean Wa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June 8, 2009. Retrieved 2007-12-31.
외부 링크
- "Edward C. Krzyzowski". Claim to Fame: Medal of Honor recipients. Find a Grave. Retrieved 2008-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