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티우스 (콘술 361)
Florentius (consul 361)플로렌티우스는 카이사르 율리우스 휘하의 로마 프레이토리아 현관이자 후에 집정관이었다가 율리안이 황제가 되었을 때 은총에서 떨어졌다.
인생
플로렌티우스는 357년 콘스탄티우스 2세의 프라토리오 현으로 가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처음 듣는다. 그는 스트라스부르 전투가 임박하자 적과의 교전을 지지하며 말했다.[1] 그해 말 가울에서 얻은 세수가 여론조세와 토지세로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자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특별부담금을 올리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줄리앙은 가울 백성에게 가외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에 반대했고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현관의 정책에 반대하기로 결정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로렌티우스는 360년 초 콘스탄티우스로부터 갈릭 부대를 동부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가울의 현장으로 계속 있었다. 암미아누스 마르첼리누스는 그 명령은 플로렌티우스의 선동에 있었다고 믿었는데,[3] 플로렌티우스는 설명할 수 없이 비엔느로 철수하여 그곳에서 바쁘게 지냈고, 암미아누스는 이것이 명령의 도착에 따른 소요를 예상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4] 그리고 플로렌티우스는 줄리앙이 아우구스투스로 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울을 버리고 콘스탄티우스를 찾아 나섰다.[5]
콘스탄티우스는 아나톨리우스가 죽자 그를 일리쿰의 프라토리아 현주로 임명한 후 361년에 그를 집정관으로 삼은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 틀림없다.[6] 줄리앙의 반란이 일어나자 플로렌티우스는 이탈리아를 도망쳤다.[7] 율리안이 황제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62년 초 칼케돈에 법정이 설치되었는데, 이 법정은 플로렌티우스를 결석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8] 비밀 경호국 출신 두 사람이 플로렌티우스가 숨어 있는 줄리앙에게 지적해 주겠다고 하자 줄리앙은 그들을 밀고자로 꾸짖고 더 이상 듣기를 거부하면서 두려움에 몸을 숨기는 것을 선호했다.[9]
후자는 플로렌티우스의 마지막 역사적 언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