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 D. 콜러
Foy D. Kohler포이 D. 콜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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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소련 주재 미국 대사 | |
재직중 1962년 9월 27일 – 1966년 11월 14일 | |
대통령 | 존 에프 케네디 린든 B. 존슨 |
선행자 | 릴렐린 톰슨 |
성공자 | 릴렐린 톰슨 |
제5차 유럽 및 유라시아 담당 차관보 | |
재직중 1959년 12월 11일 – 1962년 8월 19일 | |
대통령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존 에프 케네디 |
선행자 | 리빙스턴 T. 상인 |
성공자 | 윌리엄 R. 타일러. |
개인내역 | |
태어난 | 오하이오 주 오크우드 | 1908년 2월 15일
죽은 | 1990년 12월 23일 플로리다 주 목성 | (82)
배우자 | 필리스 펜 |
직업 | 외교관 |
포이 데이비드 콜러(Foy David Kholer, 1908년 2월 15일 ~ 1990년 12월 23일)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 주재 미국 대사였던 미국의 외교관이다.
초년기
콜러는 오하이오주 오크우드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은 그가 어렸을 때 톨레도로 이사했다. 톨레도 대학교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에 다녔으며, 1931년에 외국학 BS로 졸업했다.[1]
외무부에 들어가 윈저(캐나다),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 부쿠레슈티(로마니아) 등에서 근무했다. 그는 1935년 부쿠레슈티에서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스보로 출신의 필리스 펜과 결혼했다.[1] 후에 그들은 아테네(그리스), 카이로(이집트), 베트남, 볼리비아에서 복무했다.[2]
콜러는 1946년 코넬 대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후 1947년부터 49년까지 월터 베델 스미스 대사 밑에서 일하면서 모스크바에서 첫 순회공연을 했다.[1]
소련 주재 대사
1962년 9월 미국의 소리 감독으로 순방에 이어 존 F 대통령. 케네디는 콜러 대사를 소련 주재 대사로 임명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 관저인 스파소 하우스로 옮겨와 저택의 전면 리모델링을 시작했다.[1]
불과 몇 주 만에 쿠바 미사일 위기가 시작되었고 콜러는 심각한 국제 위기 해소에 관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미국인들은 소련이 쿠바에 핵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2주간의 상승 위험성에 대한 긴장감 끝에 미사일 제거에 동의했다.
그 경험은 더 나은 의사소통의 필요성에 대해 양쪽 모두를 납득시켰다. 1963년 6월 20일, 양국은 대서양 횡단 보안 케이블에 대해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핫 라인"으로 지속적인 연결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3]
1963년 8월 5일 모스크바에서 대기권, 물속, 우주 공간에서 핵실험을 금지한 제한적 실험 금지 조약이 체결되었다.[4] 이것은 강대국들간의 일련의 군비통제 협정 중 첫 번째가 될 예정이었다.
콜러는 1967년 3월 6일 옛 소련 지도자 조셉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릴루예바가 뉴델리에서 미국으로 망명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아나톨리 도브리닌 주미대사를 통해 소련에 알릴 책임이 있었다.[1]
콜러는 1967년 커리어 앰배서더라는 개인 계급으로 외무부에서 은퇴했다.
관공서 근무
콜러 부부는 플로리다로 이주했고 그는 마이애미 대학의 국제 고급 연구 센터의 국제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90년 12월 23일 사망했다. 그와 필리스는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는 외교 관계 위원회, 베타 감마 시그마, 델타 업실론, 피 베타 카파(Phi Beta Kappa)의 회원이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