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보헤미아 공작
Frederick, Duke of Bohemia프레데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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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데릭 공작 국새 | |
보헤미아 공작 | |
군림하다 | 1172 – 1173 |
전임자 | 블라디슬라프 2세 |
후계자 | 소비슬라프 2세 |
보헤미아 공작 | |
군림하다 | 1178 – 1189년 3월 25일 |
전임자 | 소비슬라프 2세 |
후계자 | 콘라트 2세 |
태어난 | c. 1142 |
죽은 | 1189년 3월 25일 | (46-47)
배우자 | 헝가리의 엘리자베스 |
이슈 | 보헤미아의 루드밀라 |
집 | 페미슬리드 왕조 |
아버지 | 블라디슬라프 2세 |
어머니 | 게르트루드 |
종교 | 가톨릭의 |
프레데릭(체코: 베데지치) c.(1142년 – 1189년 3월 25일)은 페제미슬리드 왕조의 일원으로 1172년부터 1173년까지 보헤미아 공작이었으며, 1178년부터 다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생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의 마르그라베 레오폴트 3세의 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Gertrude of Babenberg)와 첫 결혼하여 보헤미아(d. 1174년)의 블라디슬라프 2세 왕의 장남이다. 그의 아버지는 1140년부터 보헤미안 공작으로 통치해 왔으며, 1158년 프레드릭의 대부이자 이름뿐인 호엔슈타우펜 황제 프레드릭 바르바로사에 의해 왕실의 칭호를 얻었다. 그의 승천은 블라디슬라프의 충성과 충실한 봉사에 대한 황제의 감사를 표현했고, 그로 인해 그는 그의 조부 브라티슬라프 2세 (d. 1092년)에 이어 두 번째 페제미슬리드 왕이 되었다. 그의 아들 프레데릭은 1164년부터 올로무크의 모라비아 왕자로 통치했다.
1172년 블라디슬라프 왕은 프레데릭을 옹호하여 퇴위시켰을 때 황제와 관계가 악화되어, 인종적 연공 원칙에 따라 계승선을 실시하려 하였으나 바르바로사와의 협의는 없었다. 프라하의 왕좌는 고(故) 소브슬라프 1세 공작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의 사촌들에 의해 주장된 반면 프레데릭은 보헤미안식단도 황제도 그의 집권을 승인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을 고수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결국 1173년 9월 헴스도르프(에르벤도르프)에서 열린 제국식당에서 황제에 의해 퇴위선고를 받았다. 바르바로사는 보헤미안 귀족들과 합의하여 블라디슬라프의 사촌 올드치히에게 왕위를 바쳤다. 그러나 올드지치는 영예를 사양하고 농민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던 형 소부슬라프 2세를 옹호하는 보헤미아 지배를 포기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를 떠나 두 번째 부인 주디스의 튜링안 영지로 은퇴하는 동안 프레데릭은 황실에서 복무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브슬라프 2세는 보헤미안 귀족과 황제 모두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1176년 레그나노 전투에서 제국군이 대패한 롬바르드 리그에 대항한 이탈리아 유세에서 바르바로사 지원을 꺼렸다. 게다가, 소브슬라프 공작은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땅을 유세했는데, 바바로사의 삼촌인 헨리 재소미르고트 공작은 사고로 죽었다. 소브슬라프가 황실에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무시한 반면 프레데릭은 모라비아 왕자인 Znojmo의 콘라드 3세 오토, 오스트리아의 바벤베르크 공작 레오폴트 5세와 동맹을 맺을 수 있었다. 이들은 바르바로사 황제의 지원을 받아 1178년 프레데릭이 공작으로 선출된 프라하에 대항해 행진했다. 로데니체 전투에서 소브슬라프의 군대에 의해 처음으로 공격당하고 패배한 그는 마침내 1179년 1월 27일 현재의 노베 메스토 지역에서 프라하 도시 성벽 밖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소부슬라프는 그 이듬해 추방되어 죽었다.
황제는 이제 프레데릭을 황태자로 인정했다. 공작은 보헤미안-오스트리아 국경의 도면을 확인했으며 폴란드, 메이센, 헝가리 이웃들과도 평화를 유지했다. 1184년, 그는 황제 아들 헨리 6세와 스와비아의 프레드릭의 기사 작위 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거대한 레티누를 가지고 마인츠로 건너왔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프제미슬리드 왕조의 내부 투쟁에 가려져 있었는데, 그가 모라비아에 대한 이복동생 오토카르의 지배를 주장하려 하자, 그의 전 우방인 즈노즈모의 콘라드 왕자가 그에게 등을 돌리고 일시적으로 프라하에서 쫓아냈다는 것이었다. 1182년 바르바로사에 의해 다시 발령이 났지만, 프레데릭은 콘라드의 통치하에 모라비아의 제국 마가렛으로 승격하는 것을 마주해야 했다. 황제는 또 프라하 주교인 프레데릭의 프세미슬리드 사촌 헨리 브레티슬라우스를 왕자의 지위로 올려 보헤미안 땅을 모두 자신에게 의존하는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수년 간의 논쟁 끝에 내부 투쟁으로 쇠약해진 프레데릭 공작은 사실상 황제의 꼭두각시였다. 마르그라베 콘라드가 로데니스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프레데릭의 이복형 오토카르의 군대에 패배했을 때, 마침내 1186년 보헤미안들과 모라비안 피에미슬리드는 크닌에서 만났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콘라드는 프레데릭의 오버로드권을 인정했고, 공작은 콘라드의 권리와 보헤미안 왕위 계승권을 확인했다. 프레데릭은 제3차 십자군 원정에 대해 황제를 따를 준비를 하던 중 1189년에 사망했다. 크닌 협정에 따라 다시 한번 자신의 통치하에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통합한 콘라드(콘라드 2세 공작)의 뒤를 이었다.
결혼과 아이
헝가리의 아랍파드 왕 게자 2세와 키예프의 유프로시네 왕비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갖게 되었다.
- 헬레나(Helena, 1158년 출생)는 1164년 마누엘 1세의 아들 콤네노스의 아들 베드로와 약혼했다.
- 소피아(Sophia, 1185년 5월 25일 사망)는 메이센의 마그라브 알베르트와 결혼했다.
- 루드밀라(Ludmilla, 1240년 8월 14일 사망), 1184년 보겐의 알베르 3세 백작과 결혼하였고, 1204년 바이에른 공작 루이 1세와 결혼하였다.
- 브라티슬라우스 (1180년 사망)
- 올가 (C.1163)
- 마거릿 (1167년 8월 28일 사망)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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