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슬라우스 2세, 보헤미아 공작 겸 국왕
Vladislaus II, Duke and King of Bohemia블라디슬라우스 2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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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공작 | |
군림하다 | 1140년 2월 11일 – 1158년 1월 11일 |
전임자 | 소비슬라프 1세 |
후계자 | 왕으로서의 자기 자신 |
보헤미아의 왕 | |
군림하다 | 1158년 1월 11일 – 1172년 |
대관식 | 1158년 1월 11일 레겐스부르크 |
전임자 | 그 자신이 공작으로서. |
후계자 | 프레데릭 |
태어난 | c. 1110 보헤미아 |
죽은 | 1174년 1월 18일 독일 메레인 | (63~64세)
매장 | |
배우자 | 게르트루드 튜링아의 주디스 |
이슈 디테일 | 프레데릭, 보헤미아 공작 잘츠부르크 대주교 아달베르트 3세 오토카르 1세, 보헤미아의 왕 블라디슬라우스 3세 |
왕조 | 프제미슬리드 |
아버지 | 블라디슬라우스 1세, 보헤미아 공작 |
어머니 | 리체자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블라디슬라우스 2세 또는 블라디슬라프 2세(c. 1110년 – 1174년 1월 18일)는 1140년부터 보헤미아 공작, 1158년부터 1173년 퇴위할 때까지 보헤미아 왕이었다. 그는 브라티슬라우스 2세에 이어 두 번째 보헤미안 왕이었지만, 어느 경우에도 왕위 계승은 없었다.
블라디슬라프는 블라디슬라프 1세와 버그의 리체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처음에는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 다음에는 튜링아의 주디스와 결혼했다.
군림하다
듀크
그는 모험심이 강한 청년이었다. 숙부 소부슬라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위에 오를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는 바이에른으로 이주했다. 1140년 소브슬라프의 죽음으로 귀국하였고, 형수 콘라트 3세의 도움으로 보헤미아 귀족에 의해 보헤미아 공작으로 선출되었다.
처음에 블라디슬라브도 역시 블라디슬라브라고 이름 붙여진 소브슬라프의 아들인 사촌의 주장과 싸워야 했다. 소브슬라프의 요청에 따라 로테어 2세 황제는 1138년 5월 밤베르크 의회에서 아들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다가 6월에 사드스카에서 귀족들이 단언했다. 그러나 밤베르크의 또 다른 식단은 1140년 4월 블라디슬라프의 아들이 계승되는 것을 확인했다. 현지 덕테스 콘라드 2세(Znojmo), 브르노(Brno) 브라티슬라우스 2세(Vratislaus II), 오토 3세(Otto III)가 그에게 폐를 끼쳤다. 그들은 올로무크의 주교인 진디히 즈디크가 파문했는데, 그는 그 후 그의 교구에서 쫓겨났다. 이후 1142년 4월 22일 비소카에서 영토 두키스는 반역을 통해 블라디슬라프를 격파했으나 프라하 포위작전은 실패했다. 블라디슬라프는 독일의 콘라드 3세의 도움으로 왕좌를 지켰는데, 그의 이복 자매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가 결혼했다.
1147년 블라디슬라프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콘라드와 동행하였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행진을 중단하고 그 후 귀환하였다.[1] 보헤미아로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와 크라쿠프를 지나쳤다.
1152년 콘라드의 뒤를 이을 프레데릭 바르바로사가 당선된 후, 1152년 5월 블라디슬라프는 메르세부르크에서 열린 식단에 참석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프라하의 빈센트에 따르면, 그는 거절하고 대신 프라하의 다니엘 주교를 대표로 보냈다. 1155년 10월, 그는 보헤미안 국경 근처에서 프레데릭을 만났다. 그는 1156년 6월 뷔르츠부르크에서 열린 부르고뉴의 베아트리체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그와 프레드릭이 곧 있을 프레드릭의 이탈리아 원정에 블라디슬라브와 프레드릭이 참가하여 블라디슬라프를 왕위에 올려놓는 합의에 이르렀다.[2]
왕
1158년 1월 11일 레겐스부르크의 황실식단에서 1156년의 비밀조약이 발효되었다. 프레데릭은 블라디슬라브에게 자신의 황실 왕관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다이아뎀(고질자에 의해 다이애드마 또는 순환이라 칭함)으로 왕관을 씌웠다. 1월 18일 그는 블라디슬라브에게 왕관과 다른 휘장의 사용을 규제하는 특권을 주었다. 프레데릭은 왕실 직함과 왕관을 영구적으로 부여했지만, 블라디슬라프의 퇴위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후자가 보헤미아로 돌아오자 귀족들은 이탈리아에서 선거운동을 하겠다는 그의 의지와 보헤미아 헌법의 일방적 개정에 모두 강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그가 이탈리아 원정대의 비용을 직접 부담하기로 동의했을 때만 묵인했다.[2]
그는 또한 레겐스부르크의 어퍼 루사티아에 투자되었다. 그는 1158년 프레데릭과 함께 밀라노로 합법적으로 동행했다. 그의 대관식은 9월 8일 밀라노에서 두 번째 기념식에서 거행되었다. 블라디슬라프는 프레데릭 황제의 확고한 동맹이었다. 1161년, 1162년, 1167년의 이탈리아 원정 동안 블라디슬라프는 체코 사단의 지휘를 그의 동생인 잼니츠의 공작 드폴트 1세와 그의 아들 프레데릭에게 맡겼다.
After the revolt of the Moravian dukes, Vladislav gradually took control of the strongholds of Moravia: Brno with the death of Vratislaus II in 1156, Olomouc with the death of Otto III (in spite of the claims of Soběslav, the son of Duke Soběslav, who was imprisoned), and finally Znojmo with the death of Conrad II. 블라디슬라프도 1163년 황제를 대신해 헝가리에 개입했다. 둘째 아들 스비아토플룩을 헝가리 공주에게 시집보내고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와 외교 접촉을 가졌다.
1167년 1148년 이후 프라하의 주교로 블라디슬라프의 가장 위대한 고문이었던 다니엘 1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 결과 보헤미아 왕과 독일의 왕들 간의 관계가 경색되었다. 1169년 아들 아달베르트(Vojtch) 3세가 잘츠부르크 대주교가 되자 황제는 그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를 지지했다고 의심했다.
퇴위
아들 프레데릭을 보헤미아의 여전히 당선된 두키아의 왕좌에 앉히고자 열심인 그는 1173년 보헤미아 귀족들의 합의도, 황제의 허락도 없이 퇴위했다. 프레데릭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왕위를 유지하다가 소브슬라프 1세의 장남 소브슬라프 2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블라디슬라프는 1174년 1월 두 번째 아내의 땅에 있는 튜링아에서 살았다. 그는 마이센 성당에 묻혔다. 그의 치세는 보헤미아에 수많은 예멘스트라텐시안과 시스테르시안 압베이의 건국과 프라하의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의 건설로 특징지어졌는데, 이 건축물은 블라디슬라프의 둘째 부인을 기리기 위해 주디스 다리라고 명명되었다. 1342년 홍수로 다리가 파괴되었고 찰스 다리는 그 자리에 세워졌다.
가족과 아이들
그의 첫 번째 부인인 바벤베르크의 게르트루드(1150년 8월 4일 사망)에 의해 그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 딸(리체자?)은 키예프의 야로슬라프 2세와 결혼했다.
- 프레데릭, 후계자
- 스비아토플룩, 헝가리의 게자 2세의 딸과 결혼했다.
- 보헤미아의 아달베르트 3세로서 잘츠부르크 대주교 보헤치
- 1228년 6월 7일 사망, 프라하 성 조지의 부인 아그네스
두 번째 부인인 튜링아의 주디스(11555)는 튜링아의 랜드그레이브 1세의 딸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다.
- 후대 보헤미아의 왕 오토카르, 세습선 제1호
- 블라디슬라우스(Bladislaus)는 후에 블라디슬라우스 3세로 보헤미아의 공작이었다.
- 리체자 (1182년 4월 19일 사망)는 오스트리아 공작 헨리 2세의 아들 뫼들링 공작 헨리 1세와 결혼하여 1남 헨리 1세를 두었다.
참조
참고 문헌 목록
- Freed, John B. (2016). Frederick Barbarossa: The Prince and the Myth.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ISBN 978-0-300-122763.
- Mahoney, William (2011). The History of the Czech Republic and Slovakia. ABC-CLIO. ISBN 978-0313363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