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두바소프
Fyodor Dubasov표도르 두바소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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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도르 두바소프, 1905-1906 | |
태어난 | 3 1845년 7월 3일 |
죽은 | 1912년 7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 | (66)
얼리전스 | ![]() |
서비스/지점 | ![]() |
근속년수 | 1870-1905 |
순위 | 해군 중장 |
전투/와이어 | 러-터키 전쟁 (1877–78) |
수상 | 성 훈장조지 성 훈장알렉산더 넵스키 |
Admiral Fyodor Vasilyevich Dubasov (Russian: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Дубасов) (3 July (O.S. 21 June) 1845 – 2 July (O.S. 19 June) 1912, Saint Petersburg) was, Governor General of Moscow from 24 November 1905 to 5 July 1906.
표도르 두바소프는 티버 구베르니야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그의 가족은 오랫동안 러시아 제국 해군과 연관되어 있었다.그의 조상 중 한 명인 Avtonom Dubasov는 1709년에 스웨덴 갤리선을 나포하는 데 참여했었다.
1870년 두바소프는 페테르부르크의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이는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넷소프의 이름을 딴 현대 러시아 해군 사관학교와 맞먹는다.표도르 두바소프는 다뉴브 군사 플로티야와 함께 1877-1878년의 러-터키 전쟁에 미니엘레이어 사령관으로 참가했다.전쟁이 끝난 후 1883년부터 1885년까지 순양함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함정을 지휘하였다.그는 1889년에 순양함 블라디미르 모노마크를 지휘했다.두바소프는 그의 아시아 항해에 미래의 차르 니콜라스 2세와 동행했다.1891년에 그는 전함 페트르 벨리키에게 명령했다.두바소프는 1893년 리어아드미랄, 1889년 부아드미랄로 승격되었다.
1897–1899년 표도르 두바소프는 태평양함대를 지휘하게 되었다.그의 지휘 아래, 이 중대는 3중첩 이후 아더 항과 달니 항구를 장악했다.1901~1905년 두바소프는 러시아 해군기술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1905년 6월 그는 국방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1905년 그는 도거은행 사건을 조사하던 국제위원회의 러시아 대표였다.
1905년 모스크바 봉기에서 두바소프의 역할
1905년 두바소프 제독은 체르니고프, 폴타바, 쿠르스크 구베르니야스에서 농민 반란을 진압한 혐의로 기소된 징벌적 원정대의 책임을 맡았다.모스크바 총독이 되자 두바소프는 공개적으로 자신을 "방버너"라고 칭했다.모든 계층에서 엄격한 행정 통제권을 설정하기를 열망한 표도르 두바소프는 총독의 권한을 넓히고 모스크바 수비대를 그의 바로 지배하에 두자는 제안과 함께 차르에 메모를 제출했다(거절되었다).1905년 12월 6일 두바소프는 수비대, 경찰, 그리고 겐데리에게 즉각 경계령을 내렸다.12월 7일 모스크바 소비에트 연방은 총파업을 선언했다.두바소프는 시에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것을 허가하고 대규모 체포를 승인했다.12월 8일 표도르 두바소프는 아쿠아리움 정원에서 집회를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12월 9일, 그는 그가 시 중심부에 집중했던 모스크바 수비대의 군대에 의한 경찰의 적극적인 개입을 승인했다.가용한 군대의 주요 부분은 2개 부대(각각 극장 광장과 마네지 광장에 배치)로 나뉘었다.예비역 은 크렘린 막사 안에 있었다.정부군은 철도역, 주 은행, 전신, 우체국, 전화 교환, 수도를 점령했다.두바소프는 도시 소방대와 무장한 야간 경비대를 불러 군대를 지원했다.12월 11일 표도르 제독은 집집마다 지붕과 창문에서 정부군을 향해 총을 쏘게 한 것에 대해 집주인들이 직접 책임을 지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체포된 사람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두바소프는 죄수들 중 일부를 페테르부르크로 이양할 것을 명령했다.12월 12~13일 그는 폭도들에 대한 대규모 징벌적 조치를 조직했다.그 결과 12월 14일에 정부군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당국은 21시부터 7시까지 통행금지를 도입하고 모든 회의를 금지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모스크바의 상설 수비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보병 징병대의 신뢰성에 대한 우려는 처음에는 두바소프의 부상 진압에 제약을 가했었다.12월 15일 세묘노프스키 연대의 레이브 근위대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표도르 두바소프는 쿠르스키 철도 터미널을 제외한 수도의 모든 철도역들을 장악할 것을 그의 부대에 명령했다.그는 프레시야 지역의 소요 진압을 위해 포병 사용을 허가했다.두바소프는 무장 저항을 장악하고 경찰을 보좌하며 반란군을 넘겨달라는 호소와 함께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고개를 돌렸다.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기만에 의해서 또는 무력에 의해서" 무장분자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정부군의 편을 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12월 19일 폭동은 진압되었다.12월 20일 각료회의는 두바소프가 고통받는 국민들에게 분배할 수 있도록 10만 루블의 기금을 발행했다.12월 21일 표도르 두바소프는 남은 긴장의 온상을 없앨 것을 명령했다.이어 두바소프는 모스크바와 모스크바 구베르니야의 군민행정 개편안을 내놓았다.1906년 4월 23일 사회혁명당 소속 보리스 비노롭스키-미슈첸코 당원은 표도르 두바소프의 마차 밑에 폭탄을 투척해 목숨을 노렸다.이 폭발로 두바소프의 부관과 테러범이 스스로 사망하고 총독과 그의 코치에게 부상을 입혔다.
1906년 7월, 암살 시도에 이어 표도르 두바소프는 모스크바 총독으로 공식 교체되었다.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만년
두바소프는 부상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은퇴했다.그는 러일 전쟁에서 사망한 러시아 선원들을 기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수역에 사비오르 교회를 세우는 데 관여했다.그는 1912년에 죽었고 알렉산더 넵스키 라브라에 묻혔다.
참조
이 기사는 러시아어 위키백과에서 번역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