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메이렌

Gada Meiren
가다메이렌
몽골어: ᠭᠠᠳᠠ ᠮᠡᠢᠷᠡᠨ
태어난1892 (1892)
죽은1931년(38~39세)

Gada Meiren (Mongolian: ᠭᠠᠳᠠ ᠮᠡᠢᠷᠡᠨ ɣada meyiren, Гаадаа мэйрэн, simplified Chinese: 嘎达梅林; traditional Chinese: 嘎達梅林; pinyin: Gādá Méilín, 1892 - April 5, 1931) was the Mongol leader of a struggle and, eventually, an uprising against the sale of the Khorchin grasslands (in what is now Tongliao City of Inner Mongolia) to Han settlers in 1929.

가족

가다 메이렌은 청나라 지림 리그코르친 좌익중기(일반적으로 다한기)의 잼운도쿠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다 메이렌은 별명이었다. 그의 이름은 나드미드였으며 뮐튀트족에 속했다. 그는 또한 중국 이름인 멍칭산( (山)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집안의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항상 루바다라고 불렸다. 메이렌은 만추의 차용어였고 군관(軍官)을 지칭했다.

지림리그가 중국과 제대로 가까워 중국 심장부로부터 엄청난 인구 압박을 받았다. 한족 이민자들은 중국 군정의 통치하에 들어왔고, 몽골의 현수막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의 가족은 원래 외두르 왕자가 지배하는 초원에서 살았다.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인구과잉으로 인해 몽골인들이 가축 사육에서 농업으로 옮겨갈 수 밖에 없게 되자 그의 조상들은 성공적으로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가다 메이렌이 10세 때 현수막 부주석인 지그덴방쿠르 왕자 요라이투는 외두르 왕자의 허락 없이 한족에게 초원을 팔았다. 이에 따라 그의 가족은 서쪽으로 도망쳐 만두르쿠라는 마을로 갔다. 1921년경 그는 현수막의 군대에 합류하여 더 서쪽으로 다크한 왕자의 초원으로 이동했다.

반란

1920년대 후반까지 다크한 기지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땅은 중국 농민들에 의해 경작되었다. 당시 중국의 군벌 장주올린이 지배하던 랴오닝 성의 당국은 이 기의 마지막 땅을 시차황과 랴오페이황 두 지역으로 나누어 경작사업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경작이 깃발 속의 몽골인들을 생존의 여지로 내몰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몽골족들은 지배계급과 일반계급에서 모두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가다 메이렌은 랴오페이황에 반대하는 캠페인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29년 초, 가다 메이렌 등은 무크덴에 사절단을 조직하여 식민지를 종식시켰다. 다크한 왕자와 장술리앙(그의 아버지 장주롤린이 폭격으로 죽었음)에 대한 그들의 호소는 실패했다. 가다 메이렌과 다른 3명의 대표단은 갑자기 투옥되어 다시 현수막으로 보내졌다.

계속되는 토지 매매는 물론 더 많은 일반적 불만과 절박함이 공개적인 반란을 초래한다. 가다 메이렌은 아내 무단에게 감옥에서 풀려나 200여 명의 전사를 재빨리 규합했다. 북부 산악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그들은 히시아황과 랴오페이황의 토지 측량사를 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또한 토지 매매 계약을 파기하기 위해 사무실을 공격했다. 비록 반군들이 민족주의적이고 반중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또한 중국 현지 인구의 더 가난한 부분의 지지를 받았다.[1] 가다가 8개 지방 도적단을 모집한 후 반군은 1000명이 넘는 전투원까지 뽑았다. 그러나 이 도적들은 가다의 군대의 기강을 약화시켰다.

다칸 왕자의 현수막 군대는 반란군을 분쇄할 수 없었다. 그는 장술량에게 도움을 청했다. 펑톈과 제홀의 압도적인 중공군은 가다 메이렌을 포위했다. 1931년 봄, 가다 메이렌이 함락되고,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2] 아이러니하게도 중공군은 훗날 일본 괴뢰 국가 멍장에서 일했던 몽골족 리수신(부얀델거)이 이끌었다.

여파

가다 메이렌의 반란이 진압된 직후 랴오닝 성은 랴오페이 국가를 설치하기 위한 작업을 재개했다. 토지 조사를 강제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1931년 묵든 사건과 만주국 설립으로 중단되었다. 만주국은 '몽골의 토지 보호 정책'을 들고 식민지화를 위한 중국의 모든 사업을 중단했다. 흐시치아황과 랴오페이황의 경작 종료가 코르친 좌익중기 폐단을 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러티브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다 메이렌은 '반동적 군벌'(장주림과 장술리앙)과 싸운 몽골족 영웅으로 평가받고 있다. 즉 그의 활동은 마르크스 계급 투쟁의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 틀에서 다양한 문학이 가다 메이렌에게 바쳐진다.

몽골 민족학자 보르지긴 부렌체인은 이러한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며 몽골 땅을 둘러싼 몽골과 한족의 민족 갈등으로 그의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평민들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한족 식민지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한 한족 식민지에 대한 저항을 이끈 몽골의 왕자 양산자브를 조명한다.[3]

대중문화에서

2002년 영화 가다 메이린.

구전 노래의 전통을 바탕으로 가다 메이렌의 이야기는 1950년에 출간된 약 600줄의 긴 서술 시로 발전했다. 1980년에 2000개 이상의 행을 가진 버전이 출판되었다.

몽골 민요 「가다 메이렌」은 중국어로 번역되어, 중국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다. 마오 시대에는 중국에서는 금지되었지만, 지금은 중국 음악 교과서에서 볼 수 있다. 중국어 버전이 시작됨:

난팡페일라이디샤오홍야야, 부루오창장, 부야, 부이피,
(작은 기러기들이 남쪽으로 날아왔지만 양쯔가 옆에서 쉬지 않고 다시 날 수 없다)
야오 슈오 치이 디 가다메린, 위랴오 멩구 렌 디 투디.
(몽골인들의 지구를 지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은 가다 메이렌이었다.)

가다 메이렌은 내몽골민속 영웅으로 여겨진다. 2002년 펑샤오닝은 가다 메이렌의 삶을 소재로 한 영화를 연출했지만 그의 반란을 몽골의 땅을 빼앗은 '일본 침략자'에 대한 반동으로 묘사했다.[4] 게다가, 가다 메이렌의 이야기는 중국 작곡가 신후광가다 메이린이라는 교향시에도 영감을 주었다.

참고 항목

참조

  1. ^ Heissig, p. 472: "Im Aufstand des Γada meyiren, zwischen 1929-1931 vom Gebiet des Darkhan-Banners der Khorstin [sic] ausgehend, fanden antichinesische, nationalistische Motive der Mongolen auch die Unterstutzung verarmter Chinesen und Mongolen"
  2. ^ 헤이식, 페이지 472-476
  3. ^ (부렌사인:2003)
  4. ^ "Gada Meilin (2002) - IMDb".
  • Borjigin Burensain, "Ryōhokukō no kaikon mondai to Gādā Meirin hōki" 「遼北荒」の開墾問題とガーダー・メイリン蜂起, "Kingendai ni okeru Mongoru jin nōkō sonraku shakai no keisei" 近現代におけるモンゴル人農耕村落社会の形成 (Formation of the Mongolian Farming Village Society from later 19c to later 20c), pp. 127–154, 2003.
  • 콜린 맥케라스, 내몽골의 몽골 전통 공연 예술, 오스트레일리아 중국어 저널
  • https://www.imdb.com/title/tt0367765/
  • 발터 하이식, "Die Innere Mongolei 1911-1939", in: Michael Weiers(편집자), Die Molganen, Beitrage Zu ihrer Geschichte und Kultur, Darmstadt 1986, 페이지 467-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