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먼드 프로스
Hammond Pros설립됨 | 1917 |
---|---|
일시 중단됨 | 1926 |
기준: | 미국 인디애나 주 해먼드 |
리그 | 내셔널 풋볼 리그 |
팀 이력 | 해먼드 프로스(1920–26) |
팀 컬러 | 퍼플, 골드, 화이트 |
수석 코치 | 행크 길로 (1920년) 맥스 힉스 (1921년) 월리 헤스 (1922–24) 프리츠 폴라드 (1925년) 의사 영(1925년) |
소유자 | 폴 파르둔 의사 영 |
홈 필드 | 컵스 파크 |
인디애나주 해먼드의 해먼드 프로스는 1920년부터 1926년까지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여행 팀으로 뛰었다.
역사
프로스는 지역 사업가 폴 파르둔과 알바 영 박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복싱 프로모터 겸 레이싱 마굿간 주인 영은 1915~17년 해먼드 클랩비 체육회가 운영하는 준프로 축구팀에서 의사/트레이너(및 파트 오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8년 영은 "해먼드 올스타즈"로 알려진 새로운 팀을 지휘하고 미국프로축구연맹의 중추적인 역할을 할 많은 팀(레이신 카디널스, 디트로이트 프리메라리가, 록아일랜드 독립 운동가, 미니애폴리스 마린스, 클리블랜드 타이거스, 캔톤 불독스, 그리고 톨레도 마룬스 등)과 경기를 했다. 영은 1920년 APFA가 결성된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열린 역사적인 회의에 참석했다.(해먼드와 캔턴의 경기는 1919년 추수감사절을 치르고 시카고에서 1만2000여 명의 관중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전해져 구단주들에게 리그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1919년, 그 팀은 조지 할라스가 와이드 리시버에서 주연을 맡았고, 할라스는 이듬해 디케이터 스티니스-미래 시카고 베어스로 떠났고, 198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선수, 코치, 구단주로 남아있었다.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프로팀은 반 프로 복장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정규직을 가지고 있고 많은 연습을 할 수 없는 현지인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대부분의 NFL 선수단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정말로 마을의 경기장(A)으로서 해몬드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었다. 머레이 터너 필드)는 야구를 위해 지어졌고 몇 천명만 앉아 있었다. 프로스는 1923년 데이튼 트라이앵글스에 7대 0으로 패한 해먼드에서 정규시즌 NFL 한 경기만 치르게 된다. 대신 시카고의 컵스 파크는 비공식적인 "홈" 구장으로 활동했다. 그럼에도 영은 7년 34경기 연속 NFL에 출전해 5-26-4의 합계 성적을 냈다. 프로가 더 오래 지속되었을 수도 있지만, 1926년 아메리칸 풋볼 리그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NFL은 프로스를 포함한 많은 소규모 프랜차이즈를 제거하면서 12개 팀으로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그 해 동안 리그에 참가한 9명의 흑인 선수들 중, 프로스에서 뛰었던 6명은 NFL 최초의 흑인 감독인 프리츠 폴라드, 그리고 성공한 음악 프로듀서 메이요 윌리엄스를 포함했다.
명예의 전당
해먼드 프로스 명예의 전당 | ||||
---|---|---|---|---|
플레이어스 | ||||
아니요. | 이름 | 포지션 | 테뉴어 | 인덕티드 |
— | 존 "패디" 드리스콜 | QB/HB | 1919 | 1965 |
— | 조지 할라스 | 끝 | 1919 | 1963 |
— | 프리츠 폴라드 | HB 코치 | 1923, 1925 | 2005 |
계절별
연도 | W | L | T | 마무리 | 코치 |
---|---|---|---|---|---|
1920 | 2 | 5 | 0 | 12일 | 행크 길로 |
1921 | 1 | 3 | 1 | 13일 | 맥스 힉스 |
1922 | 0 | 5 | 1 | 15일 | 월리 헤스 |
1923 | 1 | 5 | 1 | 15일 | |
1924 | 2 | 2 | 1 | 10일 | |
1925 | 1 | 4 | 0 | 14일 | 프리츠 폴라드, 닥 영 |
1926 | 0 | 4 | 0 | 21일 | 의사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