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아펜젤러
Henry Appenzeller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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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 1858년 2월 6일 |
죽은 | 1902년 6월 11일 한국 소녀를 구하려다 바다에서 익사 |
직업 | 한국에 기독교를 소개한 감리교 선교사 |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년 2월 6일 ~ 1902년 6월 11일) 목사는 감리교 선교사였다. 그와 호레이스 N을 포함한 4명의 다른 선교사들. 알렌, 호레이스 G 언더우드, 윌리엄 B 스크랜턴과 메리 F. 스크랜턴은 1885년부터 1902년까지 한국에 개신교 기독교를 소개했다. 그는 한국에 크게 기여한 세 가지 공로로 잘 알려져 있다: 배재 대학관, 서울 감리교 성공회, 그리고 신약성서 번역.[1][2]
배경과 초기의 삶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는 1858년 펜실베니아 소더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스위스 메노나이트였고, 그의 아버지는 펜실베니아 출신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독일 개혁 교회에 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일요일 오후에 그들과 함께 독일 성경을 읽음으로써 헨리와 그의 두 형제의 신앙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어를 사용했지만 영어는 거의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어는 헨리의 모국어였다. 그는 집에서 펜실베니아 독일어로 말하면서 자랐다. 독일어와 문어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여 나중에 미국, 유럽, 한국에서 독일인과 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헨리는 1876년 10월 6일 개인적인 영적 경험으로 인해 변화되었다. 그는 매년 이 날을 영적인 생일이라고 기념했다. 그는 개혁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사립 주거 교양대학인 프랭클린과 마셜 칼리지에서 공부했는데, 그곳에서 고대 언어를 공부했고 그리스어와 문학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3][4] 헨리는 또한 성서 언어와 프랑스어에 유창하게 공부했다.[4]
개종 3년 만인 스물한 살에 랭커스터에 있는 감리교 성공회에 가입했다. 그 후 그는 감리교 설교자로 교회에서 근무했다. 그 후 신학대학원인 드류 신학대학원에 다녔다. 드류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해외 선교에 참여했다. 아펜젤러가 한국으로 항해하기 전에 그는 엘라 닷지와 결혼했다. 그들은 세 아이를 함께 낳았다. 그들의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태어난 첫 미국인이다.[5][2]
한국에서 일하기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일요일 아침 부인 엘라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 기간 동안 서울은 정치적 투쟁에 빠져 있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울 수도, 대중 앞에서 설교할 수도 없었다. 복음전도 은밀히 행해져야 했다. 아펜젤러는 처음 2년 동안 선교사 거주지를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1887년 공공장소에서 예배가 가능해지면서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이 세워졌다. 그의 목표는 파간 코리아를 기독교 코리아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6]
아펜젤러는 1887년 한국의 유용한 인재 양성의 전당인 배재학당을 설립했다. 배재대학교와 배재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3] 그는 복음을 전파하고 서양 문화를 소개하며 학생들을 감리교 신앙으로 훈련시켰다. 그는 서울 최초의 한국감리교 교단인 종동(宗洞)의 창립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개신교 기관도 많이 설립하였다. 1887년 목사로 종동(宗洞)에서 1902년 사망할 때까지 종동(宗洞)에서 근무하였다. 1886년 아펜젤러는 다른 감리교 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들, 그리고 다른 한국어 번역가들과 함께 성경 번역가 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을 도왔다.[2]
죽음
1902년 44세의 나이로 아펜젤러는 성경번역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남부 항구도시 목포로 여행을 가고 있었다. 그는 바다에 있는 동안 한국 소녀를 구하려다 익사했다. 그를 기리는 세노탑이 19세기 말~20세기 초 통합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파의 선교사 80여 명을 포함한 300여 명의 외국인의 묘지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세워졌다.
레거시
대한감리회는 19세기 설립 이후 한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중 하나로 극적으로 발전해 왔다. 2001년 교단은 교회 5262개, 신도 139만4514명, 목사 7298명으로 구성됐다. 감리교 모델에 따라 설립된 대학은 파이차이 등 6곳이었다. 또 교단에는 서울 감리교 신학교인 자체 신학교가 있었다. 또한 6개의 신학원과 54개의 중·고등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2016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서울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선물로 드루 신학대학원 캠퍼스에 아펜젤러의 청동 흉상이 헌납되었다. 박사님 이세영(충동 영어목사) : "한국의 정동 사람들과 감리교 신자들에게는 마치 아펜젤러가 한국에 와서 자수하고, 1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를 다시 데려와 깊은 감사를 표하고 있다."[7]
참고 항목
참조
- ^ "Henry Gerhard Appenzeller : His Contribution to Korean Independence, Democracy, and Modernization". 1988.
- ^ a b c "The Legacy of Henry G. Appenzeller".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October 1994. ProQuest 216002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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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 ^ a b "A Century After: The Legacy of the Appenzellers, Pioneer Missionaries to Korea" (PDF). Journal of the Historical Society of the EPA Conferenc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2-08-03.
- ^ a b Griffis, William Elliot (1912).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Fleming H. Revell.
- ^ Davies, Daniel (1992). "Henry G. Appenzeller: Pioneer Missionary and Reformer in Korea" (PDF). Methodist History. 30 (4): 195–205. Retrieved 22 July 2015.
- ^ Davies, Daniel M. (December 1992). "Building a City on a Hill in Korea: The Work of Henry G. Appenzeller". Church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61 (4): 422–435. doi:10.2307/3167795. JSTOR 3167795.
- ^ Kinney, Josh. "Chungdong First Methodist Church, Drew and GNJ Remember Appenzeller". United Methodist Church of Greater New Jersey. The Relay. Retrieved 11 August 2017.
- 1607년-1896년 미국의 Who Was Who in America, History Volume. 시카고: 후작 후작, 1963년
- Davies, Daniel M. (1988). The Life and Thought of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2-1902), Missionary to Korea. Lewiston, NY: E. Mellen Press. ISBN 978-0889460690. OCLC 15550759.
- Griffis, William Elliot (1912).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London and Edinburgh: Fleming H. Revell. OCLC 2538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