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드와이트 테리

Henry Dwight Terry
헨리 드와이트 테리
H.D. Terry.jpg
헨리 드와이트 테리
태어난(1812-03-16)1812년 3월 16일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죽은1869년 6월 22일(1869-06-22) (57세)
미국 워싱턴 D.C.
파묻힌
얼리전스미국
유니온
서비스/지점미국 육군
유니온 아미
근속년수1861–1865
순위Union Army brigadier general rank insignia.svg 준장
보유된 명령미시간 제5 보병대
1여단, 1사단, 7군단
3사단, 6군단
존슨 섬[2]
전투/와이어반도 전역 서퍽 전투

헨리 드와이트 테리(Henry Dwight Terry, 1812년 3월 16일 ~ 1869년 6월 22일)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준장이다.

어린 시절과 경력

테리는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에서 태어났다.뉴잉글랜드에 뿌리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젊었을 미시간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나중에 디트로이트에서 실습하였다.[2]

남북전쟁과 만년의 삶

테리는 군사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미시간 제5보병대를 모집, 조직하여 1861년 6월 10일 대령되었다.전쟁의 첫 겨울 동안, 그와 그의 연대는 워싱턴 D.C. 방어를 위해 복무했다.

1862년 반도 전역 내내 제5대 미시간주는 새뮤얼 P 준장의 애착을 받았다. 하인첼만의 3군단, 포토맥의 군대.윌리엄스버그세븐파인스에서 모두 큰 손실을 입었고, 7월 중순 테리는 자원 봉사 준장으로 승진했다.[2]

1863년 초, 7군단의 일원으로 뉴욕,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남성들로 구성된 그의 여단은 버지니아서퍽으로 보내졌다.그곳에서 4월과 5월에 제임스 롱스트리트 중위 휘하의 남군들에게 포위되었다.일단 포위망이 풀리자 테리는 존 A 소령에게 보고했다. 6월말에 그의 여단을 요크파문키 강 상류로 버지니아주 백악관으로 보냈다.그 후 3주 동안 테리는 로버트 E 장군을 위협하는 작전에 참가했다. 펜실베니아 남부군의 침공 당시 리치먼드와의 통신선.[2]

1863년 7월 1일, 에라스무스 D 소령에게 애착을 느끼면서. 테리지휘관인 키예스의 4군단은 남부 연합 수도에서 공격 거리 내에 있는 볼티모어 크로스 로드까지 진군했는데, 거기서 수비수들의 긁힌 힘에 부딪쳤다.그러나 테리는 많은 수의 적들이 그들의 후방에 집결하여 퇴각선을 끊어버리고 있다는 키예스의 공포를 부채질했다.이것은 7월 2일 늦게 키예스가 백악관을 향해 후퇴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실패한 공격의 여파로 딕스와 키예스는 야전 지휘권을 잃었지만 테리는 포토맥의 군대로 복귀했고, 테리는 그해 가을 6군단에서 사단을 지휘했다.그의 군대는 Gouverneur K 소장을 지지했다. 지난 11월 실패한 마인드런 캠페인 당시 워렌의 V 군단.그로부터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단은 오하이오존슨스 아일랜드에 있는 교도소 수용소를 수비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1864년 5월, 사단이 봄 캠페인을 위해 버지니아로 돌아왔을 때, 테리는 자신이 대체된 것을 발견하고 가만히 있었다.이때 그는 공식 군사 기록에서 사라진다.그는 1865년 2월 7일 사임할 때까지 비활동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퇴역 후 워싱턴 D.C.에서 법률 업무를 재개했다.그는 1869년 6월 22일 5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사망했고 디트로이트 근교의 클린턴 그로브 묘지에 묻혔다.[2]

참조

  1. ^ 연합군 장성의 병력
  2. ^ a b c d e Ezra J. Warner (1964). Generals in Blue: Lives of the Union Commanders. Baton Rouge: LSU Press. pp. 498–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