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로드

Herbert Lord
허버트 메이휴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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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 군수 건물에서 일하는 영주
미국 예산국 제2국장
재직중
1922년 7월 1일 – 1929년 5월 31일
대통령워런 G. 하딩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
선행자찰스 G. 도스
성공자클로슨 홉
개인내역
태어난(1859-12-06) 1859년 12월 6일
미국 메인주 록랜드
죽은1930년 6월 2일(1930-06-02) (70세)
미국 워싱턴 D.C.
휴게소알링턴 국립묘지
정당공화당
배우자애니 스튜어트 월도 (1886-1930, 그의 죽음)
아이들.3
교육콜비 칼리지 (AB, MA)
직업기자
직원, 미국 하원의원
병역
얼리전스 미국
지점/서비스 미국 육군
근속년수1898-1922
순위US-O7 insignia.svg 준장
구성 단위미 육군 페이마스터 주
명령미국 육군 재무국장
전투/와이어스페인-미국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수상육군 공로훈장

허버트 메이휴 로드(Herbert Mayhue Lord, 1859년 12월 6일 ~ 1930년 6월 2일)는 미국 육군 장교 및 공무원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재무국장과 1922년부터 1929년까지 미국 예산국(현 예산국) 국장으로 근무한 것이 가장 눈에 띄었다.

메인 록랜드 출신인 로드는 콜비 대학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고 신문 기자 및 편집자로 일했다. 로드는 미 하원 의원으로서 윌슨-고만 관세법에 따라 발생한 요금 인하에 대응하기 위해 관세를 인상한 딩리법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 로드는 스페인-미국 전쟁을 위한 미국 자원 봉사 소령으로 임명되고 페이마스터 부서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주군은 육군을 위한 재정 분야에서 계속 일했고 1914년 그레이트 살렘 화재 이후 연방 재난 구호 기금 지출을 감독하는 등 특별 프로젝트에 대한 전문지식을 제공하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로드는 육군 재무국장으로 준장으로 승진했고, 240억 달러의 전쟁부 지출 관리 노력을 이끌었다. 그의 전후 활동에는 의회가 개회하지 않을 때 기업들에게 전시 물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려는 노력이 포함되었다. 그의 계획은 경제 위기를 피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미 의회는 소급해서 그의 행동을 승인했다. 로드는 또한 전쟁 중 부상, 부상 또는 중병을 입은 군인들에게 장해금을 지급하기 위한 자신의 이니셔티브에 따라 행동했는데, 의회가 소급하여 승인한 또 다른 행동이었다. 1922년 로드(Lord)가 예산담당 이사로 임명되어 1929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로드는 캘빈 쿨리지허버트 후버 대통령 행정부 시절 정부의 경제를 우선시했는데, 이는 1차 세계대전의 빚을 갚고 연방 예산에서 흑자를 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드는 1929년에 병이 났고 예산담당 이사직을 사임했다. 그의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1920년 6월 2일 워싱턴 D.C.에서 사망했다. 로드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초년기

허버트 M. 로드는 1859년 12월 6일 메인주 록랜드에서 사빈 로드와 애비(스웨트) 로드의 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Rockland에서 자라서 교육을 받았고, Rockland 고등학교를 졸업했다.[2]

로드는 베이츠 대학에 잠시 다녔고, 그 후 콜비 대학으로 전학했다.[2] 1884년 콜비를 A.B.학으로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위해 공부하면서 학교를 가르쳤다.[3] 교사로서 그리스어, 라틴어, 영어 등을 전공했으며, 메인주 토마스턴에 있는 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2] 로드는 또한 음악을 가르치고 노래를 불렀으며, 그의 테너 목소리는 그가 노래하는 직업을 추구할 수 있었다고 제안하는 팬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2]

그는 1889년에 콜비로부터 석사학위를 받았다.[3] 콜비에 있는 동안, 로드는 델타 업실론 클럽에 가입했다.[4] 1920년에 Colby College는 LL.D.의 명예 학위를 Lord에게 수여했다.[3]

초기 경력

대학 졸업 후, 로드는 테네시주 카디프에서 한 신문사와 함께 저널리즘에 종사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기자, 편집자, 광고 매니저로 일했다.[2] 그는 다음에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한 신문에 고용되었는데, 거기서 메인주로 돌아올 때까지 남아 있었다.[2] 그 후 로드는 록랜드에 있는 쿠리어 가제트의 편집장이 되었고, 그 중 소유지분을 사들였다.[2] 공화당원이었던 로드는 록랜드 신문을 편집하면서 시의회 공동의회와 연회에서도 임기를 채웠다.[2]

1894년부터 메인 주의 미국 대표 넬슨 딩글리 주니어는 로드(Lord)를 Ways and Meals Committee)의 직원들에 고용했다.[2] 1897년 딩리가 위원회의 의장이 되자, 그는 Lord를 위원회의 수석 서기로 임명했다.[2] 로드는 관세율을 낮춘 윌슨-고만 관세법에 대응하기 위해 관세를 인상한 법률인 딩리법의 세부 내용을 연구했다.[2]

군경력

1921년 예산국 국장으로서의 허버트 로드

1898년, 로드는 스페인-미국 전쟁을 위해 미 육군에 입대했고, 미국 자원 봉사자의 소령으로 임관되었다.[2] 그는 페이마스터 부서에 배속되어 정규군에 입대할 때까지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복무했다.[2] 1902년 로드(Lord)는 정규군 대위로 임관되었고, 페이마스터(Paymaster) 부서에서 계속 근무하였다.[1]

로드는 1908년 소령으로 복무 중이었는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새로운 관세법안 개발을 위해 주군을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이전 경험을 활용했다.[2] 그 결과 1909년 페인-알드리히 관세법은 낮은 관세를 지지한 공화당 개혁파와 보호주의를 지지한 보수 공화당 사이에 불화를 일으켰다.[2] 1910년, Lord는 미군의 제2차 쿠바 점령 이후 쿠바 정부에 대한 미국 자금 지출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다.[2]

1914년 그레이트 세일럼 화재 이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주에게 연방 재난 구호 기금 지출을 감독하도록 임명했다.[2] 20만 달러가 그 노력에 충당되었고, 로드 씨는 모든 원조 요청을 효율적으로 이행하여 15만 달러의 기금을 절약했다는 찬사를 받았다.[2]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육군 재무국장을 지냈다.[3] 전쟁 중에 준장으로 승진하여 240억 달러의 전쟁부 세출 지출을 통제하였다.[3]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공로로 육군 공훈장을 받았다.[3] 1919년 3월, 의회는 공장, 철도, 그리고 다른 사업체들에게 8억 달러 이상을 지불해야 하는 조항을 만들지 않고 휴회했다.[3] Lord는 스스로 주도하여 다른 용도로 전용된 자금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여 그 빚을 갚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 금액은 그때까지는 10억 달러가 넘었다.[3] 채권단은 경제 위기를 모면한 채 만족했고, 다음 의회에서는 하원과 상원이 주님의 행동을 소급 승인했다.[3]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동안, 전시의 상처와 부상, 심각한 질병을 앓았던 군인들이 장애 수당을 신청했다.[3] 최전방에서의 긴급한 근무로 인해 발생된 허황된 기록 보관 때문에, 참전용사들은 종종 그들의 부대, 복무 유형, 또는 의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없었다.[3] 로드는 그들 자신의 적격성 증명서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지불하도록 솔선수범했고, 이후 전쟁부는 중앙에 위치한 기록을 검증에 사용했다.[3] 주님의 노력으로 자격을 갖춘 참전용사들이 신속하게 장애수당을 받을 수 있었고, 의회는 다시 한번 그의 행동을 소급 승인했다.[3]

로드는 1922년 6월 30일 미 예산국 국장의 임명을 수락하기 위해 육군에서 전역했으며, 초대 국장인 찰스 G. 도스의 뒤를 이었다.[2]

예산국장

로드는 1922년 7월 1일 예산국장을 맡았다.[3] 그의 임기 동안, Lord는 지출에서 경제에 우선순위를 두었는데, 이 정책은 Calvin Coolidge 대통령이 지시하고 그의 후임자인 Herbert Huver가 계속하였다.[3] 로드는 많은 관찰자들로부터 연간 8,000달러를 절약하기 위해 우편환 주문 공란의 크기를 1인치 줄이는 것과 같은 겉보기에 사소한 조치들을 포함하여 지출을 줄이는 데 집착하는 것으로 여겨졌다.[3] 비웃는 사람들은 또한 주님이 공무원들이 연필을 사용하는 기간을 늘림으로써 돈을 절약한다고 주장했을 때 주님을 조롱했다.[3] 회의론자들에도 불구하고, 1929년 주님이 사임했을 때 연방 재무부의 제1차 세계대전의 부채는 없어졌다.[3] 게다가 연방 잉여금은 27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 중 24억 달러는 주님의 절약에 기인했다.[3]

죽음과 매장

로드는 1929년에 장기간 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예산담당 이사직을 사임하게 되었다.[3] 그는 1929-1930년 겨울의 일부를 에서 보냈다. 플로리다 페테르부르크는 건강을 되찾고자 하는 바람이다.[3] 그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어 1930년 6월 2일 워싱턴 D.C. 우들리 아파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3] 로드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3]

가족

1886년, 로드는 애니 스튜어트 월도와 결혼했다.[2] 그들은 세 아이의 부모였다.[2] 스튜어트 월도 로드는 1886년에 태어나 1889년에 죽었다.[2] 케네스 프린스 로드(Kenneth Prince Lord, 1888~1957)는 직업군 장교였으며 준장으로 은퇴했다.[5] 루스 메이휴 로드(Ruth Mayheu Lord, 1890~1974)는 프랭클린 로빈슨 반 렌셀라이어의 아내였다.[2]

참조

  1. ^ a b Davis, Henry Blaine Jr. (1998). Generals in Khaki. Raleigh, NC: Pentland Press. p. 235. ISBN 978-1-5719-7088-6. OCLC 40298151 – via Google Books.
  2.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Army Officer Scheduled to Succeed Gen. Dawes Has Unique Service Record". The Sunday Star. Washington, DC. April 9, 1922. p. Part 4, page 5 – via Newspapers.com.
  3. ^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Gen. H. M. Lord Dies". The New York Times. New York, NY. June 3, 1930. p. 31 – via TimesMachine.
  4. ^ Chase, William Sheafe, ed. (1884). The Delta Upsilon Quinquennial Catalogue. Boston, MA: Rockwell & Churchill. p. 342 – via Google Books.
  5. ^ "Gen Lord Dies; Served In Two Wars". Hartford Courant. Hartford, CT. Associated Press. April 29, 1957. p. 4 – via Newspapers.com.


외부 링크

정치국
선행자 예산국장
1922–1929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