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H. 한네켄
Herman H. Hanneken허먼 헨리 해네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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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먼 H. 한네켄 준장, 훈장 수여자 | |
태어난 |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 1893년 6월 23일
죽은 | 1986년 8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 졸라 | (93)
매장지 | |
얼리전스 | ![]() |
서비스/지점 | ![]() |
근속년수 | 1914–1948 |
순위 | ![]() |
보유된 명령 | 해병 7기 제2대대, 해병 제7대대 |
전투/와이어 | 제1차 세계 대전 바나나 전쟁 • 아이티 점령 • 니카라과의 점령 제2차 세계 대전 • 과달카날 전투 • 카트휠 작동 • 펠레리우 전투 |
수상 | 메달 오브 아너 네이비 크로스(2) 실버스타 레지오트 오브 메리트 청동별 |
허먼 헨리 해네켄(Herman Henry Hanneken, 1893년 6월 23일 ~ 1986년 8월 23일)은 미 해병대 장교로 미군 최고 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사병 생활을 시작한 한네켄은 1910년대와 1920년대 바나나 전쟁에 참전했다. 미국이 아이티를 점령하는 동안, 그는 저항 지도자 샤를마뉴 페랄트를 암살했고, 이로 인해 그는 명예 훈장을 받았다. 그 후, 임무를 부여받은 한네켄은 아이티에서 몇 달 더 복무했고 또 다른 반군 지도자를 살해한 혐의로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 1920년대 후반 니카라과 점령기의 행동으로 제2의 해군십자사를 받았다.
10년간의 국가직 근무 후,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극장에서 근무했다. 이 분쟁 중에 은성, 레지오트 훈장, 동성 등을 받았다. 그는 34년간의 경력을 마치고 1948년에 은퇴했고, 은퇴 후 준장으로 승진했다.
초년 및 경력
Herman Henry Hanneken은 1893년 6월 23일 성에서 태어났다. 미주리 주, 루이스. 그는 그 도시에 있는 헤닉 예비학교에 다녔다.
1914년 7월 해병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고, 이후 5년간 사병으로 복무하여 중사 계급에 올랐다.
아이티 점령
미국은 1915년 아이티를 침공해 19년간 아이티를 점령했다. 초기 침공 이후 몇 년 동안 샤를마뉴 페랄테 휘하의 반란군은 점령에 대해 무장 저항을 실시했다. 1919년 10월 31일 밤 11월 1일, 한네켄은 저항 지도자 페랄테를 암살했다. 한네켄은 변장을 하고 아이티 지도자를 배신한 페랄테의 장교 중 한 명인 장바티스트 콘제에 의해 아이티 북부의 반군 진영으로 끌려갔다. 이어진 짧은 교전에서 한네켄은 페랄테를 살해했고 그의 추종자 중 약 1,200명이 살해, 포로로 잡히거나 흩어졌다. 한네켄은 이어 페랄테의 반나체 사진이 문에 묶여 있는 것을 유포했다. 그러나 협박하려는 시도는 역효과를 냈고 대신 페랄테에 대한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Hanneken은 "특출한 영웅주의"와 "적과의 실제 충돌에서 융통성 있는 용맹과 용맹함"으로 명예훈장을 받았고, 1919년 12월에 소위로 임관했다.
샤를마뉴가 죽은 지 불과 5개월 만에 또 다른 습격으로 샤를마뉴의 뒤를 이은 또 다른 아이티 반군 지도자 오시리스 요셉을 사살했다. 그는 이 행동으로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
그는 부소위로 임명되자마자 아이티 경찰대인 겐다메리 부대를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오류일 수 있다: 아이티 겐더메리(Itiian Gendarmerie)의 지휘관으로 계속 근무한 사람은 역시 훈장을 받은 스메들리 버틀러(Smedley Butler) 해병 소령이었다고 한다. 1920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버지니아 주 콴티코 마린 막사에 도착한 후 해병대 학교 특별반에 배정되었다.
1920년대 니카라과의 서비스와 점령
제6연대 소속으로 한네켄 중위는 브라질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브라질로 항해했다. 이 부대는 1922년 후반 콴티코로 복귀했고, 몇 달 후 그는 미 해군 분견대인 USS 안타레스호로 이송되어 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맡았다.
1925년 1월 뉴저지 주 네이비 에어 스테이션 레이크허스트(Lakehurst)의 해병대 막사로 전근되었고, 1927년 4월 필라델피아 해군 야드의 해병대 막사로 전속되었다.
1928년 12월 다시 외국 해안에 출항 명령을 받은 그는 이듬해 1월 니카라과의 코린토에 도착했다. 니카라과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해병 2여단의 임무를 맡았다. 미국은 1912년에 이 중미국을 침공했고 그 이후로 이 나라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지 한 달 후, Hanneken은 미국의 침략에 저항하는 또 다른 반란군 지도자를 붙잡았다. 그는 니카라과 오귀스토 세사르 산디노의 과테말라 참모총장인 호세 마리아 지론 루아노 장군을 "입양"한 공로로 두 번째 해군 십자 훈장을 받았다.
1930년대 서비스
1930년 7월, Hanneken은 해병대 학교의 회사 임원 과정에 참석하기 위해 콴티코로 돌아왔다. 이듬해 1월 졸업과 동시에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해병대 기지로, 이후 캘리포니아주 산페드로의 해군기지로 전보되었다. 그의 다음 임무는 그가 1936년 8월 캘리포니아 마레아일랜드의 해병대 병영에서 소령으로 임명되는 것을 발견했다.
한네켄 소령은 1938년 6월 콴티코로 명령을 받았으며, 두 달 후 해병대 학교의 상급과정 그 기지에서 강의를 받기 위해 보고되었다.
1939년 6월부터 1940년 12월까지, 그는 매사추세츠 힝햄의 해군 탄약 저장소의 해병 막사 사령관이었다. 그는 다음에 뉴욕으로 가서 Transport Quartermaster로서의 추가 임무를 띠고 해리 리호에 승선한 해병 부대의 지휘를 맡도록 명령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및 만년의 삶
한네켄은 1941년 6월부터 1944년 11월까지 캘리포니아 오션사이드의 캠프 펜들턴에서 제2보병훈련연대와 본부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온 해병 1사단에서 복무했다.
유명한 해병 1사단과 함께 있는 동안 그의 임무는 다양했다. 과달카날 전역 중 해병 7연대 제2대대대장이었던 그는 적에 대한 전투에서 눈에 띄는 용맹과 용맹함으로 은성훈장을 받았다. 한네켄은 줄리안 N 대령을 안심시켰다. 프리스비는 제7 해병대의 지휘관으로 이 연대를 지휘하여 펠렐리우 전투 때 이 연대를 지휘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는 전투에 공로가 인정되어 레종 유공자 훈장을 받았고, 케이프 글로스터 작전 때는 청동성으로 훈장을 받았다.
1945년 9월, 그는 태평양함대, 수륙양용부대, 육군훈련부대로 전근하기 전 샌디에이고 지역 해병대 훈련교체사령부 예하 연대장으로 발령받았다.
그가 해병대 장교로 퇴역한 것은 그 조직의 참모총장으로서였다. 1948년 7월 1일 은퇴하여 34년간의 해병대 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퇴역하자마자 실전에서 특명을 받아 준장으로 진급했다
한네켄 준장은 1986년 8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라졸라의 재향군인병원에서 사망했으며 나흘 뒤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포트 로세크란스 국립묘지에 영예롭게 안장됐다. 93세였다.
군상
한네켄의 군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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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훈장 표창
한네켄, 허먼 헨리
미 해병대 2중대
G. O. 해군성, 536호
1920년 6월 10일
인용:
1919년 10월 31일 밤~11월 1일 밤, 아이티 공화국 그란데 리비에레 근처에서 적과의 실제적인 충돌에서의 비범한 영웅주의와 눈에 띄는 용맹과 용맹을 위하여, 아이티 공화국의 최고 도적단 책임자인 샤를망게 페랄테가 사망하고, 약 1200명의 하이(Hi)를 살해·포획·분산했다.추종자를 무법천지하다 한네켄 제2중위는 뛰어난 판단력과 리더십으로 자신을 구분했을 뿐만 아니라, 주저없이 큰 개인적 위험에 노출시켰을 뿐 아니라, 사소한 잘못도 그의 목숨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 있는 겐더메리의 별거 생활까지 몰수했을 것이다. 그의 임무가 성공적으로 종료되면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티 공화국에 엄청난 가치가 입증될 것이다.
인용:
미국 대통령은 1920년 3월 31일 - 4월 1일 밤 전시된 비상한 영웅주의로 미 해병대 Herman Henry Hanneken 중위(MCSN: 0-392)에게 해군 십자가를 수여하는 것을 기뻐하며, 전우들과 함께 일하면서 악명 높은 도적단 지도자 오시리스 요셉의 진영에 진출한다.해병대 임시여단(Gendarmerie d'Haiti) 경탄할 정도로 위험을 무시한 채 작은 디테일을 이끌던 한네켄 중위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인 오시리스 요셉의 15피트 안까지 진격해 그를 총으로 쏴 죽이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북부 아이티를 공포에 떨게 했던 도적 한 명을 이 나라에 몰아 넣었다. 보여준 용기와 더불어 보여준 지략과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세심한 계획은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하다.[1]
인용:
미 대통령은 미 해병대 Herman Hanneken 중위(MCSN: 0-392)에게 해군십자사 제2상 대신 금성(Gold Star)을 수여하는 등 대한민국 북부지역에서의 현역 복무기간 동안 특별한 성과와 열정, 가장 성공적인 노력에 기쁨을 느낀다. 니카라과 1928년 12월 11일부터 1929년 6월 30일까지. 해병과 니카라과 볼론타리오 전투 순찰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한네켄 중위는 도적들과 많은 성공적인 접촉을 했고, 그 동안 그는 용맹함으로 유명했다. 그의 용기와 능력은 뛰어나고 산적을 상대로 한 그의 작전은 이 지역의 산적을 진압하는 데 큰 가치가 있었다.
실버스타 표창장
인용:
미국 대통령은 일본군에 대항하는 제2대대대, 제7 해병대,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뛰어난 용맹과 용맹으로 미국 해병대 Herman Henry Hanneken 중령(MCSN: 0-392)에게 은별을 선물하는 것을 즐긴다. 1942년 11월 2일과 3일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에서. 한네켄 중령이 그의 대대를 메타포나 강 동쪽 해변에 배치한 후, 수적으로 우세했던 적대 세력이 그의 플란 근처에 상륙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향후 작전을 위한 비치헤드 구축에 성공했다. 비록 방어할 수 없는 지위에 의해 극도로 장애인이 되었지만, 그 대대는 엄청난 역경과의 별개의 싸움으로 일본 상륙부대에 큰 사상자를 내었다. 한네켄 중령이 더 유리한 지위로 철수하여 성공적인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 그의 용기 있는 리더십과 비난 받고 있는 냉정한 판단은 미 해군청의 최고 전통과 부합했다.
참고 항목
참조
- "Brigadier General Herman H. Hanneken, USMC". Who's Who in Marine Corps History. History Divisi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8-01-24.
- "Medal of Honor — 2ndLt Herman H. Hanneken (Medal of Honor citation)". Marines Awarded the Medal of Honor. History Division, United States Marine Corps.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07-02-22.
- "Herman Henry Hanneken". Claim to Fame: Medal of Honor recipients. Find a Grave. Retrieved 2007-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