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레몬트의 휴

Hugh of Remiremont

칸디다스 또는 블랑커스(둘 다 "백인"이라는 뜻)로 불리는 레미레몬트의 휴(c.1020 – c.1099)는 중세 추기경이었다.[1]

로레인에서 태어난 휴는 레미레몬트 사원에서 베네딕틴이 되었고,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로마로 소환되어 1049년클레멘테의 추기경을 세웠다.

1061년 교황 니콜라스 2세가 서거한 후 대척점 카돌프(Cadoltic)를 고수하였으나 재빨리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제출하였다. 1063년 그는 교황 공관으로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어 1068년까지 머물렀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그는 오크, 툴루즈, 지로나, 바르셀로나에서 시노드를 지휘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사제들 사이에서 독신주의를 시행하고 모짜라비치의 소송 대신 로마인을 소개하는데 성공했지만, 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1072년 그는 프랑스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다시 같은 행동을 했다. 그러나 그는 알렉산더 2세와 그의 후임 교황 그레고리 7세 이전에 자신을 용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후자의 당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여 1073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파견되었다. 이 대사관에서 그는 새로운 유사 행위를 저질렀다.

1075년부터 그는 그레고리 7세의 쓰라린 적수로, 마침내 1078년 3월 3일에 그를 퇴위시키고 그의 적수로 그를 대체했다. 1076년 웜스의 반그렉토리안 시노드와 1080년 브릭센의 시노드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으며, 그레고리 7세에 의해 거듭 파문되었다. 그 후 그는 안티포프 클레멘트 3세의 복종에 동참하여 1084년 11월 4일의 황소를 S. 클레멘테의 추기경으로 등록하였다. 1085년에 그는 독일에서 항정신병 증후군이 있었다.

그는 페르모 c.1084의 주교가 되었고, 클레멘트 3세 ca. 1089에 의해 팔레스트리나의 교외 시선으로 옮겨졌다. 그는 1098년 8월 로마에서 열린 분파회의에 참가했다. 그의 이름은 1099년 10월 18일의 클레멘트 3세 황소의 서명자 중 마지막으로 나타난다.

메모들

  1. ^ Public Domain Herbermann, Charles, ed. (1913). "Hugh of Remiremont".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참조

  • 홀코테, 휴고 칸디다스, 에인 프룬트 und 게그너 그레고르 7세(Münster, 1903년)
  • 키르클릭체스의 빌마이어 핸들시콘 (Munich, 1907년)
  • R. Hüls, Kardinalle, Klerus und Kirchen Roms: 1049-1130, Tübingen 197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