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 캐버니
Ike Caveney이케 캐버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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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수 | |
출생:(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 1894년 12월 10일|
사망: 1949년 7월 6일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 (54세)|
배팅: 오른쪽 던짐: 오른쪽 | |
MLB 데뷔전 | |
신시내티 레즈용 1922년 4월 12일 | |
마지막 MLB 출연 | |
1925년 9월 27일, 신시내티 레즈팀 선수 | |
MLB 통계 | |
타율 | .260 |
홈런 | 13 |
타선이 강타하다. | 196 |
팀 | |
제임스 크리스토퍼 "아이크" 캐버니(James Christopher "Ike" Caveney, 1894년 12월 10일 ~ 1949년 7월 6일)는 1922년부터 1925년까지 신시내티 레즈에서 뛰었던 메이저리그 유격수였다.이후 1932년부터 1934년까지 퍼시픽 코스트 리그의 샌프란시스코 실의 선수 겸 감독이 되었다.
선수생활
캐버니는 1914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해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샌프란시스코 씰의 선발 유격수가 되었다.[1]1922년 신시내티 레즈의 새로운 왼쪽 내야수 소속이었다.그의 최고의 시즌은 1923년 타율 0.277을 기록했고 내셔널리그에서 최고의 수비 부족 선수 중 한 명이었다.[1]1925년 말에 그는 부상으로 인해 그만두어야 했다.
1926년 오클랜드 오크스 소속으로 1927년 부분시즌과 풀시즌을 뛰며 태평양 코스트리그로 복귀했다.1928년 그는 샌프란시스코 씰로 트레이드되어 1934년까지 뛰었다.[1]
경력관리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캐버니는 씰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다.비록 실이 1931년과 1935년에 PCL 페넌트를 수상했지만, 그들은 1933년과 1934년에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로부터 이 타이틀을 얻기 위해 패배했다.
그의 매니지먼트 경력에서 가장 잘 알려진 측면은 조 디마지오의 커리어의 초기 발전이다.빈스 디마지오는 1932년 팀에 의해 계약되었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 주전 유격수 아우귀지갈란은 하와이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시즌 마지막 4경기를 결장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유격수 없이 팀을 남겨둘 터라 빈스는 당시 세미프로볼을 하던 동생에게 몇 경기를 채울 수 있다고 캐버니에게 제안했고 캐버니는 이에 동의했다.[2]비록 몇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는 개막식 팀을 만든 다음 시즌에 Seals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대되었다.유격수 조 디마지오의 수비 플레이는 1933년 정규시즌까지 버텨온 실책과 1루 타도 모두 실책으로 골머리를 앓았다.[3]플레이에 좌절된 캐버니는 시즌 4번째 경기에서 조를 외야로 이적시켰고, 이 경기는 남은 시즌과 그의 경력에 있어 그의 위치가 되었다.[2]
카베니는 1934년 시즌 이후 레프티 오둘에 의해 교체되었다.
참조
- ^ a b c Outland, George E. (2009). Baseball Visions of the Roaring Twenties. p. 310.
- ^ a b Stout, Glen (2003). Top of the Heap: A Yankees Collection. Houghton Mifflin Company. p. 93.
- ^ Cataneo, David (2001). I Remember Joe DiMaggio: Personal Memories of the Yankees Clipper by People who Knew Him Best. Cumberland House Publishing. p. 68.
외부 링크
- 야구 레퍼런스의 경력 통계 및 선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