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 침공

Invasion of Ryukyu
류큐 침공
Ryukyu orthographic.svg
류큐 왕국 지도
날짜1609년 3월~5월
위치
결과사쓰마 승리, 류큐는 신하국가가 된다.
호전성
Ryūkyū Kingdom 류큐 왕국마루쥬지. 일본 사쓰마
지휘관과 지도자
3,000명 이상, 알려지지 않은 선박 수100척에 3,000명
사상자 및 손실
최소 1,500개 이상500개 이하

1609년 3월부터 5월까지 일본의 봉건 영토사쓰마(四島)의 세력에 의한 류큐(劉ky攻, 신코 류큐)의 침공이 일어났으며, 사쓰마(四川) 영토 아래 류큐 왕국속국으로서의 지위의 시작을 알렸다.침략군은 유세가 진행되는 동안 한 섬을 제외한 모든 섬에서 류위안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류큐는 1879년 오키나와 현으로 일본에 정식으로 합병될 때까지 이미 오래 전부터 확립된 중국과의 지류 관계와 함께 사쓰마 산하의 속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원

이 전쟁을 기유( kiy, 기유 노런)의 난(己己ノ, 기유 노런)이라고 불렀는데, 1609년은 성년기기유년이었다.류큐 왕국에서는 기유(酉酉,, 와가 운영하는 기유) 왜란으로 불리기도 했다.[1]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는 류큐 확장(琉球,, 류큐 세이바쓰 류큐) 또는 류큐 진입(琉ky入, 류큐 이리)이라고 불렸으며,[2] 2차 대전 이전 많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오키나와 확장 운동( okinawaの, 나와노 세이에키)으로 불렸다.[3][failed verification]

배경

사쓰마의 류큐 침공은 사쓰마 왕국과 시마즈 가문 사이의 오랜 관계 전통의 절정이었다.이 두 지역은 적어도 수 세기 동안 그리고 아마도 그보다 훨씬 더 오래 무역을 해왔으며, 게다가 류큐는 1372년 이후 일본아시카가 막부(136~1573)에게 일본처럼 때때로 조공을 바쳤다.

16세기 말기에 시마즈 가문은 158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을 통치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왕국에 각종 원조나 봉사를 요구하거나 요구하였다.쇼나이 왕(재위 1587–1620)은 이러한 요구의 일부를 충족시켰다.쇼네이( tribute 1592)는 1592년 2월이나 3월에 조공선 아야부네( sat and)[4][5]를 사쓰마(四 and)에 파견하고, 1593년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할당된 짐의 약 절반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6]그러나 쇼네이도 1603년–1867년 신설된 도쿠가와 막부의 허락을 받아 시마즈에 박차를 가한 시마즈와 히데요시의 많은 교신을 무시하여 1609년 류큐를 침공했다.

사쓰마에게 침략을 촉발시킨 주요 사건 중 하나는 히데요시가 두 번의 침략 중 첫 번째를 감행했을 때 일어났다.시마즈 요시히사는 1591년, 「히데요시(히데요시)는 류큐(劉yu)와 사쓰마(四松)에게 중국 침략을 위해 1만5000명의 병력을 지원하라고 명령했지만, 류큐는 먼 나라여서 일본군의 군사전략은 귀국에 생소하다.나는 너에게 군대의 동원을 면제해 준다.그러나 그 대가로 7천 명의 병력에 10개월분의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7][8][9]쇼네이는 1593년 요구량의 절반만 공급했다.

1598년 히데요시가 죽고,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좌에 오른 데 이어 쇼네이도 사쓰마로부터 새로운 막부에 정식으로 복종하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그 요청은 무시되었다.1603년 일부 류큐 선원들이 센다이 번 해안에 상륙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들을 류큐로 돌려보냈다.[10]시마즈 일행은 류큐에게 다시 한 번 이에야스에게 고마움을 전하라고 했지만 류큐는 그 요청을 무시했다.[11][12]그러자 시마즈 일행은 류큐에 대한 징벌적 임무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다.1609년 3월 1일 약 3천 명의 병사를 태운 약 100척의 배가 야마카와 항에 집중되었다.그들 중 한 명인 이치라이 마고비는 원정대를 기록한 일기를 쓰곤 했다.함대는 3월 4일, 카바야마 히사타카, 히라타 마스무네의 지휘를 받아 항구를 떠났다.

캠페인

아마미 섬

사쓰마 함대는 4월 7일 아마미 오시마에 도착했는데, 이 곳에서 아마미족은 저항하지 않고 사쓰마군을 부축했다.가사리 족장인 타메텐(太門)은 가바야마의 신하로서, 아마미아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했다.[13]야키우치 촌장 시게다루(市etedaru大大子子)가 사쓰마 군을 보급했다.[14]4월 10일 쇼네이에는 사쓰마의 아마미 상륙을 알렸고, 투항하기 위해 텐류사 제사장 이분(李bun, [15]天長老文長)을 아마미에게 보냈으나, 이분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사쓰마군을 놓쳤다.이어 4월 16일에는 13척의 사쓰마 배가 미리 도쿠노시마로 떠났고,[16] 나머지 배들은 4월 20일 오전 6시에 아마미를 떠났다.

토쿠노 섬

4월 17일, 13척의 배가 도쿠노시마에 도착하여 흩어졌다.두 척의 배가 가나구마에 도착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여덟 척의 배가 완야에 도착했다.[17]그 배들은 1,000명의 인파에 의해 밤새 포위되었다.4월 18일, 사쓰마 군은 하선하여 군중들에게 발포하고 50명을 죽였다.의 배가 아키토쿠에 도착하여 아키토쿠족에게 물가에서 공격을 받았다.[18]그러나 군대는 재빨리 반격하여 20~3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19]사쓰마 함대도 4월 20일 오후 4시에 아키토쿠에 도착했다.4월 21일 가바야마는 미리 10척의 배를 이끌고 오키에라부 섬으로 떠났다.다른 사람들은 4월 24일 오전 10시에 도쿠노시마에서 출발해 해질 무렵 오키에라부에 도착했다.그들은 그곳에서 가바야마와 그의 배들을 만났고, 재빨리 오키나와 섬으로 떠났다.

오키나와 섬

사쓰마 함대는 4월 25일 18:00에 오키나와 섬의 모토부 반도의 운텐 항구에 도착했다.4월 27일 몇몇은 하선했다.그들은 나키진 성이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여러 곳에 불을 질렀다.[20]쇼네이(쇼나이)는 사쓰마가 나키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선주인 기쿠인(菊隠[21])을 불러 왕명을 내렸다. "사쓰마에서 몇 년을 살았으니 시마즈 가문의[22] 영주 세 사람을 아주 잘 알고 있다.가서 화의를 하시오."[23] 키쿠인과 그의 외교사절(키안은 조교였다)은 4월 26일 오전 8시에 류큐안 왕가의 수도 슈리를 떠나 12시에 쿠라하에[24] 도착했다.그들은 배를 타고 쿠라하를 떠나 온나로 향했다.4월 27일, 그들은 온나를 떠나 나키진에 도착했다.키쿠인은 카바야마와 담판을 벌였고, 카바야마는 나하에서 평화회담을 지시했다.

4월 29일 새벽,[25] 사쓰마 함대와 키쿠인은 운덴항을 떠났다.그들은 오후 6시에 요미탄잔[26] 근처의 오완에 도착했다.류큐안 미션은 즉시 출발하여, 오후 10시에 마키미나토에 도착하여, 배를 떠나 밤늦게 도착했다.키쿠인은 가바야마의 명령을 쇼네이에게 보고하고, 이른 아침에 나하로 내려갔다.오완에서 가바야마는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장교 몇 명을 나하로 보냈고, 나하항 입구에 쇠사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부하들을 하선시켰다."사슬이 있으면 어떤 배도 항구로 들어갈 수 없다."[27] 카바야마와 그의 군대는 그 후 오완에 상륙하여 슈리로 진군했다.

5월 1일 오후 2시, 사쓰마 함정은 나하 항에 입항했고, 즉시 오야미세(五野ise)에서 평화 회담을 열었다.[28]당시 슈리에는 불이 났고, 카바야마의 세력이 반응하여 앞으로 밀려왔다.일부 사쓰마 장교가[29] 나하에서 슈리로 달려와 병력을 진정시켰다.쇼네이에는 가바야마에게 친형 쇼 (尚[30])를 주고, 세 명의 대신을 모두 인질로 삼았기 때문에 가바야마는 부하들에게 슈리에서 나하로 돌아가라고 명령했고, 5월 1일 오후 4시까지 사쓰마 군대는 모두 그곳에 있었다.5월 4일 쇼네이(쇼나이)는 슈리 성을 떠났고, 5월 5일 일부 사쓰마 장교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발견한 보물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파

쇼네이 선서와 3인방 및 15인방의 서약문 번역본, 1879년 10월 『북중국 헤럴드』의 류큐 처분에 관한 문맥으로 출판되었다.

5월 17일 쇼네이(Show Nei)는 약 100명의 신하들과 함께 운덴항을 떠나 사쓰마(Satsuma)로 향했다.1610년 8월, 순푸 성에서 은퇴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이어 8월 28일 도쿠가와 히데타다 쇼군과의 정식 관중을 위해 에도로 끌려갔다.12월 24일,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항복하고 시마즈 씨족에게 여러 번 맹세를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1611년, 침공 2년 후, 은 슈리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돌아왔다.국왕의 부재에 가바야마 히사타카( kab山)와 부관 혼다 지카마사가 영주 시마즈 다다쓰네를 대신하여 섬들을 다스렸다.사쓰마 출신의 사무라이 관리 14명과 직원 163명이 함께 왕국의 정치 구조와 경제 생산성을 점검하고, 모든 섬에 대한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31]국왕의 슈리 복귀와 왕실의 통치 재개에 이어 일부 류큐안 관리들이 인질로 가고시마로 갔다.

1611년 가고시마에서 서명한 항복 문서에는 일련의 선서들이 첨부되어 있었다.[32]왕과 그의 평의원들은 "고대부터 류큐의 섬은 사쓰마의 봉건적 종속이었다"[33]고 맹세하도록 하였고, 사쓰마 영주들의 계승에 대해 오랜 기간 공물과 축하 사명을 보낸 전통이 있다고 맹세하도록 하였으나,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었다.선서문에는 또한 왕국이 수많은 자재와 인력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데 있어서 그 과실을 인정하고, 침략은 정당하고 마땅하며, 사쓰마 영주는 자비롭고 친절하게 왕과 신하들이 귀향하고 권좌에 머물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규정도 포함되어 있었다.마침내 참의들은 왕을 두고 시마즈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밖에 없었다.왕실의 참의원이자 침략에 대항하는 왕국의 방어 지휘관인 데이 도는 서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고, 이후 참수되었다.

류큐스는 명목상 독립된 상태로, 일본인에게 "이해 왕국"(異海, 이코쿠)[34]을 유지했다.왕실의 혈통과 함께 왕실의 정부 구조도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그러나, 현재 사쓰난 제도로 알려진 오시마 아마미 군도와 그 밖의 여러 북방 섬들이 사쓰마 번으로 병합되어 오늘날 가고시마에 남아 있다.왕은 상당한 권력을 유지했지만 사쓰마가 정한 엄격한 지침의 틀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고, 사쓰마에게 정기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공물로 바쳐야 했다.당시 중국이 일본과의 공식적인 관계나 무역을 거부했기 때문에 무역과 외교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사쓰마의 류큐 지배를 중국 법원으로부터 모호하게 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이러한 지침의 틀은 대체로 1611년 가고시마에서 서명한 선서와 함께 왕국에 대한 상세한 정치 경제적 제약을 가한 15인조(五人朝)라는 문서에 의해 정해졌다.사쓰마가 공식적으로 허가한 대외 무역, 외교, 국외 여행 금지는 이러한 침해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이다.류큐의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와의 광범위한 무역 관계는 사쓰마의 이익으로 바뀌었고, 일본과 류큐인의 교류와 두 섬 국가 간의 여행을 금지하는 다양한 법이 시행되었다.마찬가지로 류큐로부터의 해외여행, 류큐 항구의 선박 접수도 사쓰마 허가의 공식 무역과 외교 여행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면서 크게 제한되었다.

캠페인 갤러리

참고 항목

참조

  1. ^ Chūzan Seikan (中山世鑑), chapter 2: "琉球徃古ニハ金銀満ッテ或ハカンサシヲ作リ或ハ祭噐ヲ作リ又ハ大明暹羅日本ナトヘ往来致シ商賈ヲシケルモ察度王金宮ヨリ堀出給ケル金トソ聞ヱシ其ノ祭噐モカンサシモ数百年ノ後尚寧王ノ時マテ傳リケルカ己酉ノ乱ニ失セタリキ"
  2. ^ 高良倉吉『琉球王国の構造』吉川公文館、1987年、 ISBN9784642026536 페이지.234
  3. ^ 国土交通省 奄美群島の概要
  4. ^ 「雑録後編2」No.851
  5. ^ 上原 pp.64
  6. ^ 「大日本古文書巻16・島津家文書之3」No.1452「去々年貴邦の軍役について天下の命に任せて使礼をもって演説のところ、過半を調達、珍重々々」
  7. ^ 入唐. 중국은 원래 전쟁의 대상이었다.
  8. ^ 上原 pp.60
  9. ^ 「雑録後編2」No.785
  10. ^ 「島津家文書之二」(「大日本古文書・家わけ16」)No.1119
  11. ^ 「雑録後編3」No.1862尚寧宛義久書状「別て貴国の流人、左相府の御哀憐を以て本国に之を送らるる。其の報礼の遅延然る可からず。急ぎ一使を遣わすに謝恩の意の厚きを以てすべし。其の期に莅めば馳走を遂ぐ可き者也」
  12. ^ 「雑録後編4」No.532島津家久「呈琉球国王書」「今際聘せず、明亦懈たれば、危うからざるを欲して得べけんなり」
  13. ^ 「奄美大島諸家系譜集」「笠利氏家譜」「慶長十三年、日本薩州縦り御攻め取りの刻、両御大将舟を召し、一艘は笠利湊江御着岸、先一艘は同間切の内、雨天湊江御着岸。先一番佐文為転江御勢を向けられ、畢、為転薩州の御手に属し奉り、大島中の手引きをして、 則ち島人を降参せしむ」
  14. ^ 「奄美大島諸家系譜集」「前里家家譜」「然処に、鹿府より樺山美濃守様、本琉球対地の為、当津大和浜江御差入之宛、則ち茂手樽降参いたし、用物薪草野等捧げ奉り、首尾好く此の地相納り、之より数日ご滞在に及び、順風を以て、本琉球え御渡海なられ・・・」
  15. ^ 쇼타이큐는 텐류지를 건설했다.아무도 그것의 위치를 모른다.
  16. ^ 「渡海日々記」「十六日・・・此日とくと申嶋江類船之内十三艘参候」
  17. ^ 아마기 마을의 항구天城町・湾屋港
  18. ^ 도쿠노시마 시에 가메토쿠 항구를 내다徳之島町・亀徳港
  19. ^ 「肝付兼篤書状」「公(肝付越前守兼篤)の船及ひ白坂式部少輔の船唯二艘、徳の島の内かなぐまに着す、此間18里、従者の舟は同嶋の内わいな(湾屋)に着す、共に着する船7艘なり、ここにて敵一千ばかりかけ来り、通夜舟の辺を囲居るの際、翌18日、各船より下りて鉄炮を放ちかくれば、暫も支へず崩れ行を追打に首50ばかり討取けり、内当手の士前田左近将監・伊達斛兵衛尉・白尾玄蕃允・有馬藤右衛門尉・坂本普兵衛尉各分捕して5人を得たりと云々、同20日、同嶋の内あき徳に至(原注:かなくまより五里)、味方の舟二三艘此所に着けるに、敵寄せ来たりしをここかしこに追詰、二三十人討取しと云々、同21日、あきとくを出、海路七八里程行けるに、俄に風悪くなりしかば、辛して漕戻し又元の泊の隣かめそう(亀津)と云所へ着す、あきとくにて樺山氏を始兵船二十艘渡海、同湊に入、当手の小舟もここにて追付奉る、都合舟数70余と云々、」
  20. ^ 「渡海日々記」「ときじんの城あけのき候、巳之刻程に俄に打ちまわり候て、方々放火共候」
  21. ^ 그는 일찍이 선종 사제가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선종 공부를 하였고, 10년 후 류큐로 돌아와 엔카쿠지(円aku地)의 주제가 되었다.사쓰마가 침입했을 때, 그는 나이가 들어 신전의 우두머리에서 물러난 상태였다.이 전쟁이 끝난 후 쇼네이에는 키쿠인을 위해 세이라이 신전(神殿)을 건립하였다.쇼네이는 키쿠인에게 왕자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왕자의 섭정 쇼 고의 뒤를 이을 것을 명했다.키쿠인은 쇼네이(Sho Nei)를 몇 년 동안 보좌하다가 다시 은퇴했다.그는 1620년 10월 13일 사망했다.「琉球国由来記」No.69
  22. ^ 시마즈요시히사, 요시히로, 이에히사
  23. ^ 「喜安日記」「西来院は数年薩州に住居ありて殊更御両三殿御存知の事なれば行向て無為和睦を申調られよ」
  24. ^ 久良波. 현재 온나마을의 일부분
  25. ^ 「喜安日記」「二十九日早天」
  26. ^ 히지야 강 하류 大湾 또는 大湾渡具(오완 토구치)
  27. ^ 「雑録後編4」No.553「樺山権左衛門久高譜中」「明くる日悉く那覇の津に到らんと欲するも、爰で津口に鉄鎖の設け有るを之聞き、鉄鎖有る、則ち豈に一船の津隈に入るを得んや、且つ亦、他江の軍船繋ぐ可き無し。是を以って四月朔日に、物主等の乗る船五、六艘をして、件の指南を以って那覇津に到らしめ、其の余は悉く陸地に上がらしめ、干戈を手に共にして進み向かうに・・・」
  28. ^ Satsuma delegation: 大慈寺, 市来織部, 村尾笑栖.Ryukyu: 具志上王子尚宏, 西来院(菊隠), 名護, 池城安頼, 豊美城續, 江栖栄真, 喜安, 津見. "Kian diary"
  29. ^ 이치라이오라이브(一 ich織)와 무라오시오수(村水)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기안일기"
  30. ^ 그는 왕국의 섭정이었다.그는 형을 매우 잘 보좌하였으나, 1610년 8월 21일 일본에서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上原 pp.201
  31. ^ 커 p159.
  32. ^ 이것들은 Ker. pp160-163의 번역에서 찾을 수 있다.
  33. ^ 스미츠. p16.
  34. ^ 토비, 로널드.근대 초기의 국가외교.프린스턴: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 1984. pp46–47.

추가 읽기

  • 사무라이는 1609년 오키나와에서 왕을 잡았다.작성자:스티븐 턴불.Osprey Raid Series #6; Osprey Publishing, 2009.ISBN 9781846034428
  • 琉球大学リポジトリ「喜安日記(伊波本)(Kian diary)」http://ir.lib.u-ryukyu.ac.jp/handle/123456789/10214
  • 鹿児島県歴史史料センター黎明館編「旧記雑録後編4」鹿児島県,1984年.제557호 「琉渡海日日(류큐에 바다를 건너는 나의 일기)」」No.659「琉球入ノ記」
  • 鹿児島県歴史史料センター黎明館編「旧記雑録拾遺家わけ2」鹿児島県,1991年.No.640「肝付兼篤書状」
  • 亀井勝信編「奄美大島諸家系譜集」図書刊行会,1980年.
  • 外間守善編「琉球国由来記」角川書店、1997年。No.69「達磨峰西来禅院記」
  • 上原兼善「島津氏の琉球侵略」榕樹書林、2009年。("Ryukyu invasion by Shimazu clan".작성자:우에하라켄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