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바우처(예술가)
Jean Boucher (artist)장 바우처(Jean Boucher, 1870년 11월 20일 – 1939년 6월 17일)는 브리타니에 기반을 둔 프랑스의 조각가였다. 그는 그의 자유주의 정치와 프랑스와 브리타니에 대한 애국적인 헌신을 전달하는 공공 기념 조각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전기
초년
바우처는 브리트니 주 렌스 인근의 세손 세비네에서 태어났다. 바우처는 일찍이 학교를 다닌 후 대장부의 장사를 배웠지만, 곧 그림 그리기와 조각의 예술에 이끌렸다. 레네스 지방대학의 교수인 피에르 레누아르는 그에게 미술의 기초를 가르쳤고, 곧 어린 제자의 적성을 깨달았다. 1890년대에 그는 돌데브레타뉴에 있는 성 삼손 대성당을 복원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 일은 후에 그가 자신의 진정한 학교라고 묘사했다. 그는 파리에서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정부 보조금을 받아 그의 멘토 알렉상드르 팔기에르와 아카데미 줄리앙의 앙리 미첼 앙투안 차푸를[1] 만났다. 둘 다 조각에서 진리에 대한 존경을 그에게 주었는데, 그것은 쥘 달루와 아우구스트 로댕과 관련된 사실주의의 광범위한 경향의 산물이었다.
자유주의 이상
1898년 Boucher는 Bleus de Bretagne에 가입했다. Boucher는 Bleus de Bretagne에 가입했다. Bleus de Bretagne은 Britany에서 Boucher는 Armand Dayot에 의해 "Breton, Dreyfusard and freethinker"로 묘사되었다. 이 자격으로 그는 회의적인 사상가 어니스트 레난의 고향 트리기에에를 기념하는 조각품을 만들도록 위임받았다. 레난과 아테나 여신을 함께 묘사한 이 조각품은 특히 성당 옆에 놓이면서 천주교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돼 논란이 컸다. 그 설치에는 대규모 시위가 수반되었다. 바우처의 자유주의적이고 반체제적인 가치관과의 연관성은 브레튼 해안에서 멀지 않은 거른시(Guensey)로 망명 중인 진보주의 영웅 빅토르 위고를 묘사하는 위원회로 이어졌다. 위고는 섬에서 프랑스로 돌아보며 그의 유배를 곱씹으며 바위투성이의 외딴 곳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1907년 바우처는 파리의 장소 덴페르트 로체로에 유명한 드레퓌스 지지자 겸 인권 운동가 루도비치 트라리외를 위해 여러 인물의 기념비를 만들었다. 파리의 또 다른 큰 대리석은 생페르디난드에 있다. 그의 육상 기록 우승 스팀카에 레온 서폴렛이 스팀카에 휩싸인 어린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그린다.
Boucher는 또한 프랑스와 브리타니의 연합을 우화적으로 대표하는 조각품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특히 브레톤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은 연합과 브리타니의 독특한 문화의 침식에 분개했다. 그들은 브리타니의 안느를 묘사하는 것이 프랑스 왕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모욕적이라고 불평했다. 브레톤 민족당은 창당에 항의하기 위해 창당되었고, 1932년 세레스틴 레인이 이끄는 브레톤 분리주의 테러단체인 그웬 하두의 폭격을 받았다. 이 날짜는 1532년 브레톤이 프랑스와 연합한 기념일과 일치하도록 고안되었다.[2] 부서진 작품의 파편이 보존되어 있다.
바우처는 또한 이브 가이엇, 샤를 르 고펙, 시인 안드레 리부아르와 같은 저명한 문화 인사들을 위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기념 조각상들을 만들었다.
전쟁기념관
바우처는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하사 계급과 무기를 소지하기 위해 소집된 그는 중사로서 전쟁을 종식시켰고, 크룩스 드 게레의 승자로, 가스의 효과를 겪었다. 레콜 데 보아트스 교수로 임용된 그는 프랑스를 위해 죽은 군인들에게 기념비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신의 예술에 계속 몰두했다. 그는 "세인트 키리엔스"에게 바친 기념비, 베르둔의 조지프 갈리에니, 미국 자원봉사자들(파리 에타츠 우니스의 장소), 비행사인 에두아르 무니에 등에 바친 기념비들을 만든 사람이다. 베르둔 전투의 베테랑으로서, 그는 또한 베르둔 전투 자체에 대한 기념비에 놓여진 주요 조각품을 만드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또한 전쟁 후 대부분의 삶을 살았던 에데 마을을 위한 전쟁 기념비를 만들었다.
후기 경력
그는 히폴리테 르페브르를 대신하여 1936년 2월 29일 아카데미 데 보-아트의 관리로 선출되었다. 바우처는 말년에 프랑스와의 브레톤 통합을 위해 폭격을 맞은 기념비를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설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개 이상의 제안된 디자인을 완성했다. 브레톤 민족주의자들이 이전 동상에 반대하는 것 중 하나는 브리타니의 공작부인 앤이 프랑스 왕 앞에 순종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디자인은 인물의 평등을 조심스럽게 강조하였다. 그러나 1939년 바우처의 사망과 전쟁 발발 이후 대체 사업은 포기되었다.[2] 그의 또 다른 후기 프로젝트들 역시 미완성인 카미유 데스물린에 대한 추모와 바스티유 강습이 계속되었다. 그가 죽은 후 그 석조 조각품은 보관하기 위해 여러 조각으로 꿰매졌다. 파리에 전시할 목적으로, 그것은 결국 세손 세비녜의 바우처의 고향 마을에 재건되어 전시되었다.
Boucher는 매우 존경받는 선생님이었다. 그의 제자 중에는 조각가 폴 벨몬도(장 폴 벨몬도의 아버지), 쥘 샤를 르 보젝, 프란시스 레노드가 있었다.
바우처가 죽은 후, 파리에서 그의 아들 장 마리 바우처는 아버지의 일에 대한 관심을 보존하기 위해 헌신적인 협회를 만들었다. 2000년 그가 스스로 세상을 떠난 후 렌즈에서 새로운 협회가 결성되었다. 명예회장으로는 장폴 벨몬도와 에드몽 헤르베가 있다.[3]
주요 작품
트레기어의 어니스트 레난 기념비(1902)
루이스 레오폴드 올리에의 기념비적인 조각상 두 개와 그의 고향 마을인 레스반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의해 금속으로 녹아내린 리옹의 올리에에에 있는 것이다.
브르타뉴와 프랑스 연합은 르네스 마을 회관(1911년)의 틈새에서 1932년 8월 7일 브레톤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거른시에서 망명 중인 빅토르 위고(1913년). 이 조각상의 축소된 형태는 파리 아이비엠 지역에 있는 호텔 드 로한-게메네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에 있다.
파리 16세아이에메 지구의 플레이스 바우반(Place Vauban)에 있는 조지프 갈리에니(Joseph Gallieni, 1926년) 총영사 기념비
파리 16세아이에메 지구의 플레이스 바우반(Place Vauban)에 있는 마리 에밀 파욜레(Maris Eille Fayolle, 1935년) 보안관 기념비.
파리 국립보-아트르 드 파리의 쿠르뒤 므리에에서 "포일루"를 상징하는 전쟁 기념비.
조각공원
바우처의 작품을 위해 헌신한 조각 공원은 두 곳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세손 세비네 생가와 그의 양자로 입양된 헤데에 있다. 전자는 파괴된 기념비에서 브레톤-프랑스 연합에 이르는 인물들과 인간의 머리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 후자에는 베르둔 기념비와 미국인 자원 봉사자들을 위한 기념비를 위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공부 머리도 들어 있다. 동네 브레톤 의상을 입은 여성 라 브레톤이 마을 광장에 있다.
컬렉션
갤러리
브리트니와 프랑스 연합의 기념비.
바스티유 폭풍을 기념하는 동상
브리트니의 앤을 묘사한 흉상
원천
참고 문헌 목록
- Funérailles de M. Jean Boucher : 1939년 르 사메디 21주 / [Discours de M. George Desvallier, ..., M. A. Tourerer, M. Landowski et M. Gasq]; Institut de France, Academie des aux-ts.
- 공지사항 sur la vie et les oeuvres de Jean Boucher (1870–1939) : Lue dans la séance du 13 février 1943 / Louis-Amé Lejeun; Institut de France, Academie des aux-ar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