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드위트
John L. DeWitt존 레슨 드위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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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G 존 L. 드위트 | |
태어난 | 미국 네브래스카 주 시드니 포트 | )1880년 1월 9일
죽은 | 1962년 6월 20일 미국 워싱턴 D.C. | (82)
매장지 | |
얼리전스 | 미국 |
서비스/지점 | ![]() |
근속년수 | 1898–1947 |
순위 | ![]() |
보유된 명령 | 미 육군 채석관장, 육군전대학 특전사, 미 4군단, 사령부, 서부방위사령부, 사령부, 육해군 참모대학 특전사 |
전투/와이어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수상 | 공로훈장 |
존 레스네 드위트(John Lesne DeWitt, 1880년 1월 9일 ~ 1962년 6월 20일)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의 수용을 주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진 미군 총 장교였다.
드위트 장군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 서부해안에서 일본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국의 전쟁 노력을 방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고 해안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권고했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군사적으로 민감한 위치를 제한할 권한을 부여하면서 9066년 행정명령을 내렸다. 드위트는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이용해 서부해안의 대부분을 일본계 미국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11만 명의 일본인과 여성, 어린이들을 감금하기 위해 군사적인 탄원서를 발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 시민이었다. 일본계 미국인 제거는 엄밀히 말하면 피난이라고 했지만,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것으로 밝혀졌다.
초년기
드위트는 1880년 1월 9일 네브라스카의 포트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칼빈 드위트 준장(1840~1908)은 미 육군에서 복무했으며 1863년 프린스턴대를 졸업했다. 어머니 조세핀(레즈네) 드위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 출신이며 외할아버지 존 F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여졌다. 레즈네. 그에게는 형 월러스, 여동생 메리 월러스, 남동생 캘빈 주니어가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 혈통이었다.[1]
군경력
1898년 10월 10일, 미 육군 보병대의 부소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결국 육군에서 1898년부터 1947년까지 거의 50년을 복무할 것이다. 그의 임명은 프린스턴 대학에 재학 중인 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초기 임무는 필리핀 반란과 멕시코 징벌 탐험 동안 복무하는 것을 포함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8년 드위트는 42사단과 함께 사단본부 채석관으로 프랑스의 전장으로 출항했다. 이 사단의 다른 주목할 만한 멤버로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윌리엄 도노반이 있다. 1918년 7월, 드위트는 육군 제1군단장으로 진급하여 채석관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 공로훈장을 받았다.
전쟁중년
1919년과 1930년 사이에 드위트는 총참모대학 부사령관, 저장 및 발행부총장, 보급부장을 포함한 다양한 채석관 직책을 역임했다. 1930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미 육군의 채석관장군(Qumtermaster General)에 배속되었다. 드위트는 또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사망한 아들들의 묘지를 방문하기 위해 금성 어머니 순례의 통제권을 행사했다. DeWitt 장군은 의회가 승인한 이 행사와 관련된 모든 물류 업무를 담당했다.
보병으로 복귀한 뒤 드위트는 필리핀 사단의 통제를 맡았다. 1937년 7월 육군전쟁대학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9년 12월 중장으로 진급하고,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미국의 서해안 지역을 보호할 책임을 지고 4군단뿐 아니라 미 육군 서부방위사령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62세에 DeWitt는 "최종 보고서: 1942년 서부 해안으로부터의 일본인 피난"을 제작하게 되는데, 이 보고서는 미국 태생의 조상이민들을 일본의 과거 또는 현재 이민자와 결부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2]
10만 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의 억류 말미에 단 한 건의 간첩사건도 적발되지 않았다.[3]
1939년 12월 5일부터 1943년 6월 15일까지 드위트는 IX 군단 구역과 1942년 후계자인 서부방위사령부의 지휘권을 부여받았으며, 둘 다 샌프란시스코의 영재부에 본부를 두고 있다.
드위트는 1941년 12월 8일 저녁,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하루 뒤, 공습 사이렌이 울린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약 35대의 일본 전투기가 샌프란시스코 만 상공에서 정찰 임무를 띠고 목격된 것으로 추정된다. 드위트는 공습 중 정전 예방책이 없는 것에 격분했다. 그는 다음날 열린 민방위협의회에서 시 지도자들을 향해 "죽음과 파괴가 이 도시에 당장이라도 닥칠 것 같다"고 맹비난했다.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면에서 전쟁 중이라는 것을 고마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우리가 행동을 원하고 우리는 지금 행동을 원하기 때문에 여기에 왔다. 어젯밤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 확실하고 엄중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엄청난 파괴가 닥칠 것이다. 그 비행기들은 우리 지역 상공에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동안 우리 공동체를 초월했다. 그들은 적기였다. 일본 비행기 말이야. 바다까지 추적당했답니다."
디위트는 민방위협의회 회의에서 "이 도시를 깨우기 위해 비행기에 폭탄을 투하했다면 좋은 일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말로 네 머릿속에 박아넣을 수 없다면 경찰에 넘겨 몽둥이로 때려눕히도록 해야겠다"고 말했다. DeWitt는 일부 사람들이 그가 왜 비행기에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물어봤다고 인정했다. "나는 그것이 그들의 빌어먹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라고 그가 대답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4]
DeWitt는 보통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서 열리는 1942년 로즈볼 축구 경기에 이적을 권고했다.[5] DeWitt는 많은 관중들이 일본 전투기들의 표적을 너무 유혹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한 1942년 로즈볼 경기는 노스캐롤라이나로 옮겨졌다.
1941년 12월 19일, DeWitt 장군은 육군 GHQ에 "적국의 14세 이상 모든 외계인 피험자를 적국의 14세 이상에 수집하여 내무반으로 제거하는 실행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조치를 개시할 것"을 권고했었다. 그는 처음에 12월 26일 앨런 W. 귈리온 소령과의 전화통화에서 시민들을 가두는 것의 필요성과 실용성에 대해 매우 다르게 느꼈다. 이와 무관하게 1942년 1월 25일 로버츠 위원회의 보고서인 진주만 이전 하와이에서 일본인 조상이 광범위하게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비난한 데 이어, 반일 여론에 대한 인식과 함께, 그는 일본인 및 초기 독일인,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수용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사보타주 노력의 부족은 그것이 대규모의 노력을 위해 읽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보타주에 산발적인 시도를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통제력이 행사되고 있을 때 대량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불길한 느낌이 든다."[6]
일본계 미국인 억류
1942년 2월, 드위트는 프랭클린 D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루즈벨트는 일본계 미국인에 의한 방해행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런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불안하고 확실한 징후"[7]라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알래스카의 해안 지역에서 온 모든 일본인들의 대피를 권고했다(당시 미국 영토를 편입했다). 그리고 나서 DeWitt는 행정 명령 9066을 사용하여 "유니저블"의 분류, 반올림 및 제거 계획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드위트는 1942년 3월 2일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등 서부지역을 '군사지역 1호'로 지정한 '군사선언 1호'를 발표하여, 더 나아가 '금지구역 A-1'과 '제한구역 B호'로 구분하였다. 1단계 명령에는 "현재 군사 1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 조상은 누구나 이사하기 5일전이나 1일전까지 자신의 지역 우체국에 '거주변경 통지서'를 제출해야 한다"[8]는 내용이 포함됐다. 며칠 후, DeWitt는 군대가 캘리포니아의 만자나르2 근처에 있는 5,800 에이커의 땅을 "군사 지역에서 제외된 사람들을 위한 더 영구적인 재정착을 위한 개간소로 주로 사용되어야 한다"[9]고 말했다. 3월 6일, 9066년 행정명령이 알래스카에 살고 있는 모든 일본인들과 일본인 조상의 미국인들에게 확대되었다.[10]
1942년 3월 23일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정착하면서 철거가 시작되었다. 그 날짜에 드위트 장군은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적용되는 새로운 명령을 내려 오후 8시에서 오전 6시까지 통행금지를 정하고 총기, 라디오, 카메라, 기타 밀수품의 소유를 금지했다. 드윗은 "피해 외국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에게 이 선언의 조항을 엄격히 준수하지 않으면 즉각적인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겠다"고 말했다.[11] 북캘리포니아는 지난 4월 드위트가 "최대한 빨리 대피 속도를 높일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12] 특정 지역의 시민들은 지정된 "민원관제소"에 신고해야 했고, 그 후 그들은 국회의사당으로 옮겨져 이전하게 된다.
드위트는 모두 11만 명의 일본 교민을 서해안에 있는 그들의 집에서 내륙에 있는 수용소로 철수시키고 수용하도록 명령했다. DeWitt에 따르면, "Jap은 미국 시민이든 아니든,[7][13] "Jap이다.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제임스 알제리 피 연방 판사는 1943년 11월 계엄령 선포 없이는 미국 시민을 구금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DeWitt의 대응은 "이 본부의 모든 군사적 명령과 선언은 완전한 효력을 유지한다"[14]는 것이었다.
일본계 미국인의 이주가 완료된 후, DeWitt는 10월 19일 이탈리아계 미국인에 대한 통행금지를, 12월 24일 독일계 미국인에 대한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엄밀히 말하면, 통행금지는 "이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피해 구역에서 제거되었기 때문에 일본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15]고 말했다. 드위트는 특히 한 이탈리아인 Remove Bosia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보시아의 자서전 The General과 I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DeWitt는/일본군 전미 전투부대를 창설하는 것에/충성 없는 일본인과 구별하려는 전쟁 재배치 당국의 노력에 반대했다. 그는 1943년 의회 앞에서 "모든 적절한 수단을 동원하여 일본계 미국인들의 외부 주둔과 전쟁 후 결국 서해안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겠다"고 증언했다. 그와 칼 벤데슨 대령의 '최종 보고서'(1943년과 1944년 동그라미를 친 뒤 급히 수정)도 그들의 인종이 그들의 충성심을 결정할 수 없게 해, 따라서 인턴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원본은 1940년대 전시의 분위기 속에서도 너무 불쾌해서 벤데센은 모든 사본을 파기하라고 명령했다.[2][16]
1980년, 10대 때 만자나르 수용소에서 인턴 생활을 했던 아이코 에르치히 요시나가(Aiko Herzig-Yoshinaga)는 원본과 수정본의 수많은 차이를 보여주는 노트와 함께 국가기록원에서 원본 최종보고서 사본을 발견했다.[2] 앞서 연방수사국(FBI)과 해군정보국(ONI)은 물론 인종 차별적이고 선동적인 버전을 통해 코람 노비스 리트리얼로 이어져 프레드 코레마츠, 고든 히라바야시, 미노루 야스이 등이 배척 및 수용 거부와 관련된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뒤집었다. 법원은 정부가 대법원에 이르기까지의 재판에서 고의적으로 보도와 다른 결정적인 증거를 보류한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일본계 미국인의 배척과 수용에 군사적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이다. 전쟁 중 법무부 관리들이 쓴 글에서, 정당화는 "의도 있는 역사적 부정확성과 의도적인 거짓"에 근거했다.
기타 조치
DeWitt의 명령은 또한 서해안의 다른 삶의 지역들을 규제했다. 포고령은 밤에 사슴 사냥과 야외 스포츠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17] 알래스카 여행 사무소는 알래스카의 영토를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허가증을 발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18]
알류샨 열도에서의 전투 작전을 감독하는 데 위트의 역할은 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일부는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미국 전역에 매춘 주택이 폐쇄되었을 때, DeWitt 장군은 샐리 스탠포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고급 매춘굴을 계속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19] 서방사령부의 수장으로 재임 말기에 워싱턴 육군과 해군참모대학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0] 그는 1947년 6월에 군에서 은퇴했다.
후기 경력
1943년, DeWitt는 워싱턴 D.C.의 포트 레슬리 J. McNair에서 육군-해군 참모대학(국립전범대학의 교수)의 지휘관으로 재배치되었다. 그는 1946년 육군에서 전역할 때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은퇴 후
1954년 7월 19일, DeWitt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공로로 의회 특별법에 의해 정식 장군이 되었다.
DeWitt는 1962년 6월 20일 워싱턴 D.C.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알링턴 국립묘지 2부에 안장되어 있다. 인접한 묘지에는 미군 중령으로 전역한 아들 존 레세네 드위트 주니어(1904~1982)와 존의 아내 애니 수 드위트(1907~1996)가 안장돼 있다.[citation needed]
개인생활과 가족
1903년 6월 3일 앨라배마주 버밍엄에서 드위트는 조지 헨슨과 안나 조지아(손튼) 에스테스의 딸 마사 에스테스(1883~1968)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국 육군 장교 조지 헨슨 에스테스 주니어의 여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아들 하나를 낳았다.
- 존 레스네 드윗 주니어(1904~1982); 존은 두 번 결혼했다: 첫째는 마가렛 로레타 도르셋(1933년 6월 8일(div. 1946년, 세 자녀)이고 둘째는 애니 수 월드롭(1947년 6월 4일(한 자녀)이다.
- 마가렛 로레타 드위트 (1936년 b. 1936년); 1958년 7월 15일 첫 번째 윌리엄 클라크 영 (1927년-1988년)과 결혼; 1992년 10월 10일 두 번째 노르베르트 아놀드 존스와 결혼했다.
- 로렌 D. 영(b. 1960), 로버트 스콧 제이미슨(b. 1953)과 결혼했다.
- 앤드루 스콧 제이미슨 (b. 1985년)
- 조이스 E. 영 (b. 1961)
- 로렌 D. 영(b. 1960), 로버트 스콧 제이미슨(b. 1953)과 결혼했다.
- 존 레스네 드위트 3세 (1937년 b.), 다이앤 마리 제닝스와 결혼, 베트남 전쟁 중 미군에서 소령으로 복무했다.
- 손턴 브룩 드위트(1939-1991)
- 마사 루 드위트 (1948년 b. )
- 마가렛 로레타 드위트 (1936년 b. 1936년); 1958년 7월 15일 첫 번째 윌리엄 클라크 영 (1927년-1988년)과 결혼; 1992년 10월 10일 두 번째 노르베르트 아놀드 존스와 결혼했다.
그의 친조부모는 목사였다. 윌리엄 래드클리프 드위트(1792-1867)와 메리 엘리자베스(월레이스) 드위트(1807-1881)가 있다. 윌리엄은 펜실베이니아 해리스버그에서 장로교 목사였으며 그 이전에 1812년 전쟁에서 미국과 함께 일했었다. 메리는 윌리엄 매클레이 하원의원의 손녀였고, 존 해리스 주니어의 증손녀였으며, 해리스버그의 이름을 딴 존 해리스 시니어의 증손녀였다.
그의 친증조부인 존 래드클리프 드위트(1752~1808)는 미국 독립전쟁의 대위였으며, 1785년부터 1788년까지 뉴욕 주의원을 지냈다. 그의 친증조할아버지 피터 드위트(1722-1790)는 미국 독립전쟁의 일병이었다. 이 남성들을 통해 존 L. 드위트는 전 뉴욕 주지사 디위트의 세 번째 사촌이다. 또 다른 세 번째 사촌은 시므온 드위트였다.
그의 첫 사촌인 윌리엄 래드클리프 드위트 5세는 한국전쟁 당시 미 해병대에서 사병으로 복무했다. 세 번이나 제거된 그의 첫째 사촌 로버트 조지 쇤코프 3세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해병대에서 하사관으로 복무했다.
수상
- 참나무 잎 군락이 있는 육군 공로훈장
- 해군 공로훈장
- 필리핀 캠페인 메달
- 멕시코 서비스 메달
- 캠페인 클라스 7개로 구성된 승리 메달
- 미국 국방군 훈장 별과 함께
- 아메리칸 캠페인 메달
- 한 명의 캠페인 스타와 함께 아시아 태평양 지역 캠페인
-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
- 아즈텍 독수리 훈장(멕시코)
순위 날짜
1898년 휘장 없음 | 준위, 정규군: 1898년 10월 10일 |
![]() | 중령, 정규군: 1900년 1월 29일 |
![]() | 정규군 대위: 1906년 5월 25일 |
![]() | 소령, 정규군: 1917년 5월 15일 |
![]() | 중령, 국군: 1917년 8월 5일 |
![]() | 대령, 정규군: 1918년 7월 30일 |
![]() | 소령, 정규군: 1919년 8월 1일 |
![]() | 중령, 정규군: 1920년 7월 1일 |
![]() | 대령, 정규군: 1921년 5월 9일 |
![]() | 소장, 임시: 1930년 1월 18일 |
![]() | 대령, 정규군: 1934년 2월 2일 |
![]() | 준장, 정규군: 1934년 3월 26일 |
![]() | 소장, 정규군: 1936년 12월 1일 |
![]() | 중장, 임시: 1939년 12월 5일 |
![]() | 중장, 퇴역자 명단: 1944년 1월 31일 |
![]() | 중장, 현역: 1944년 2월 1일 |
![]() | 중장, 퇴역자 명단: 1947년 6월 10일 |
![]() | 장군, 은퇴자 명단: 1954년 7월 19일 |
참고 항목
참조
- ^ "John L. Dewitt".
- ^ a b c Headquarters Western Defense Command and Fourth Army, Office of the Commanding General, Presidio of San Francisco, California (1943). Final Report: Japanese Evacuation from the West Coast, 1942. Washington, DC: United States Government Publishing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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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보관소, 덴쇼 백과사전, 샌프란시스코의 가상 박물관에 의한 온라인 재인쇄. - ^ 뉴욕타임스(NYT)는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 내역에 대한 보고서 요약서"를 인용했다. 1983년 2월 25일.
- ^ 피츠버그 프레스는 "샌프란시스코에 새로운 경보가 발령됐다"고 전했다. 1941년 12월 10일.
- ^ 샌안토니오 라이트, 1941년 12월 14일 pB-1
- ^ Conn, Stetson; Engelman, Rose C.; Fairchild, Byron (2000) [1964]. Guarding the United States and its Outposts. United States Army in World War II.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pp. 117–123.
- ^ a b Stafford, David (1999). Roosevelt and Churchill: Men of Secrets. Woodstock, New York: The Overlook Press, Peter Mayer Publishers, Inc. p. 151. ISBN 1-58567-068-5.
- ^ 1942년 3월 3일 오클랜드 트리뷴, 페이지 1, 5
- ^ 1942년 3월 8일 오클랜드 트리뷴, 페이지 1
- ^ 제5장 서해안에서의 일본인 대피, 143페이지
- ^ 1942년 3월 24일 오클랜드 트리뷴, 페이지 1 "일본인의 새로운 통행금지 금요일 시작"
- ^ 1942년 4월 21일 오클랜드 트리뷴, 페이지 1 "Japs Face Quick Coast Ouster", "12,800 Japs Face Quick Coast Ouster",
- ^ 1988년 9월 11일 뉴욕 타임즈 "Behind Break Wire"
- ^ "장군이 무시한 판사의 칙령" 1942년 11월 17일 오클랜드 트리뷴, DeWitt" p1
- ^ 1942년 12월 24일 오클랜드 트리뷴 "독일 외계인 통행금지 해제" 1페이지
- ^ 니야, 브라이언. "존 드위트" 덴쇼 백과사전 2014년 8월 25일 회수
- ^ 1942년 8월 5일 오클랜드 트리뷴, p1
- ^ 1942년 6월 30일 오클랜드 트리뷴, p16
- ^ Starr, Kevin (2002). Embattled Dreams: California in War and Peace, 1940-1950. Oxford University Press. p. 106. ISBN 9780199923687.
- ^ "Army & Navy: Family Custom". TIME. September 27, 1943. Internet Archive(인터넷 아카이브)의 아카이브 버전(등록되지 않음)
- ^ 미국 육군 장교 공식 호적. 1948. 제2권. 페이지 2159.
외부 링크
- 알링턴 국립묘지
- 샌프란시스코시 가상 박물관의 존 레슨 드위트(1880-1962)
- 육군 채석기 재단 존 L. 드위트
- 뉴네덜란드 연구소의 존 L. 드위트
- 제2차 세계 대전의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