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너드 필킹턴

Leonard Pilkington

레오나드 필킹턴(1527–1599)은 영국의 학계 및 성직자였다. 마리안 망명자였던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집권 초기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레지우스 신학 교수가 되었고, 케임브리지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의 마스터가 되었다. 이후 교회 생활을 하면서 그는 동생 제임스 필킹턴이 더럼의 주교가 되면서 열린 길을 따랐다.

인생

랭커셔리빙턴에서 태어나 1544년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B.A.를 졸업했다. 그는 1546년에 그곳에서 펠로우로 전향했고, 1547년에 M.A.를 졸업했다. 영국의 메리 1세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대학직을 박탈당하고, 나라를 떠났다. 망명 중에 그는 결혼했다.[1][2]

그는 영국으로 돌아왔고, 그의 아내가 죽은 세인트 존스의 펠로우쉽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1561년 그곳의 사부가 되었고, 그의 형 제임스를 교체하고 분열된 통치 기간과 가톨릭 협회를 제네바 개신교로 대체함으로써 대학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개시했다. 그는 윌리엄 풀케를 펠로우로 영입하고, 리처드 롱워스의 승계를 보장한 다음, 사부직을 사임했다. 그는 1567년 더럼 대성당의 성주가 되었다.[2][3][4]

메모들

  1. ^ "Pilkington, Leonard (PLKN544L)". A Cambridge Alumni Database. University of Cambridge.
  2. ^ a b "Pilkington Nightingale". www.mylesstandish.info.
  3. ^ "The colleges and halls: St. John's British History Online". www.british-history.ac.uk.
  4. ^ "Townships: Rivington British History Online". www.british-history.ac.uk.
학무실
선행자 레지우스 케임브리지 신학 교수
1561–1562
성공자
선행자 케임브리지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석사
1561–1564
성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