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트 더건

Mart Duggan

마틴 J. "마트" 듀건(Martin J. "Mart" Duggan, 1848년 11월 10일 ~ 1888년 4월 9일)은 미국 서부총잡이로서, 오늘날에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서부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그는 작가 로버트 K에 의해 등재되었다.DeArment, 그의 책 "Deadly Tastes"에서 구 서구의 가장 과소평가된 총잡이 중 한 명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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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년기

듀건은 아일랜드 리머릭 카운티에서 마틴 J. 듀간으로 태어났다.그는 어렸을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뉴욕의 아일랜드 빈민가에서 자랐다.1863년 7월, 뉴욕 드래프트 폭동에 이어 듀건은 뉴욕을 서쪽으로 향했다.그는 콜로라도의 광산 캠프를 떠돌아다니며 광부와 노새 스키너로 일하게 되었다.이 기간 동안, 그는 다른 광부들과 카우보이들과 함께 인도인들과 수많은 싸움을 벌였지만 기껏해야 대략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876년 광부로서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강자로 발전한 듀건은 조지타운, 콜로라도 살롱 오시덴탈 댄스홀 & 살롱에서 바운서로 일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총격전

그 자리를 수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듀건은 권총을 휘두르고 있는 술주정뱅이를 무장해제시켜 자신의 총으로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그 남자는 듀건을 위협했고, 만약 그것이 맞선 총격전이었다면 듀건이 그렇게 잘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듀건은 그 남자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그는 그 남자의 권총을 구석으로 던졌다.그리고 나서 그는 길 건너 바깥으로 걸어나와 그 남자가 나와서 그와 대결하기를 기다렸다.술 취한 남자는 거리를 향해 밖으로 걸어나갔고 두 사람은 30피트 정도 떨어져 마주쳤으며 많은 살롱 손님들은 이를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이어진 총격전에서 두 사람은 재빨리 권총을 찾아 나섰지만 듀건은 총 3발을 쏘고 사내의 가슴을 때리는 등 간신히 먼저 총을 쏘았다.[1]그 남자의 신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름조차 전할 만큼 오랫동안 시내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다.듀건은 총격전에서 무혐의로 풀려났고, 자기 방어를 결정했다.

총잡이와 법률가로서의 삶

1878년 봄, 듀건은 당시 번화한 광산촌이었던 콜로라도의 리드빌로 들어갔다.처음에 듀건은 이름이 비슷해 10년 전에 여러 채굴촌을 공포에 떨게 했던 불량배 샌포드 '샘' 듀건이었던 것으로 오인되었다.그러나 시내에는 1868년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샘 듀건이 린치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몇몇 사람들이 있어서 혼란은 해소되었다.

1878년 2월 12일, 나중에 미국의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운명인 호레이스 오스틴 워너 타보르시장에 선출되었다.1877년 설립 당시 리드빌에는 300여 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광부였다.불과 1년 후, 듀건이 도착했을 때, 그 마을은 15,000명에 가까운 인구를 자랑했다.T. H. 해리슨은 마을의 증가하는 폭력 범죄율을 진압하기 위해 이 마을의 초대 보안관으로 임명되었다.해리슨은 무시무시한 평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약속 이틀 만에 구타를 당하고 마을을 뛰쳐나갔다.

그러자 타보르 시장은 조지 오코너를 마샬로 임명했고, 한 달 동안 오코너는 칭찬할 만한 일을 했다.그러나 그는 1878년 4월 25일 오코너가 살롱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블러드스워스를 질책한 후 자신의 대리인 중 한 명인 마셜 제임스 M. "텍스" 블러드스워스에 의해 임명된 지 5주도 안 되어 총에 맞아 죽었다.블러드스워스는 그 후 훔친 말을 타고 달아났고, 리드빌에서는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타보르 시장은 마을 의회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오코너 후임으로 마트 듀건을 임명했다.즉시 듀건은 마을을 떠나거나 살해당할 수 있다는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같은 날 듀건은 광부들의 소란스러운 인파 때문에 톤타인 레스토랑에 불려갔다.그는 그들에게 자기 입장을 고수하고, 그들을 물러섰다.비록 그의 첫 번째 논쟁은 성공적이었지만, 목격자들은 나중에 그것이 단명할 것이라고 느꼈다고 주장할 것이다.

듀건은 즉시 마을 치안 유지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그의 첫 업무지시는 형사적인 요소에 대해 지나치게 우호적이라고 의심되는 모든 대리인을 해고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나서 그는 치안 판사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 그들의 판단에 너무 관대하다고 말하고 그들에게 모두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치안판사가 그런 권한이 없다며 이의를 제기하자 듀건은 총을 꺼내 책상에 던지며 빙글빙글 돌리며 모두 체포됐다고 선언했다.그 혼란에 대해 그는 "나는 이 건물에 있는 어떤 빌어먹을 사무실도 날려버릴 수 있다"고 선언했다.듀건은 그 후 치안판사 후임자를 직접 선임하고 6일 동안 법정에 서서 형을 선고했다.처분된 치안판사는 나중에 듀건에게 사과했고,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그들의 자리로 돌아갔다.비록 완전히 불법적이고 부적절했지만 듀건의 전술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용인되었다.그는 이 기간 동안 두 명의 남자를 죽였는데, 둘 다 살롱 총격 사건이었다.

1878년 5월 말, 듀건은 당시 콜로라도에서 가장 부유한 광산 소유주 중 한 명이었던 어거스트 리스슈를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혐의로 체포했다.리쉬가 저항하자 듀건은 물리적으로 그를 연석 안으로 들어올려 주립 교도소로 호송했다.리슈는 타보르 시장의 친구였는데, 는 그의 체포에 항의하기 위해 감옥으로 왔다.그러나 듀건은 물러서지 않았고, 리슈는 듀건이 자신을 풀어줄 만반의 모습을 보일 때까지 감옥에 남아 있었다.같은 달 말, 듀건은 진행 중인 소동으로 인해 파이오니어 살롱에 불려갔다.

광부 존 엘킨스(흑인)와 찰리 하인즈는 포커 게임에서 냄비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싸움이 이어졌고 엘킨스는 하인스를 칼로 찌른 뒤 도망쳤다.듀건의 두 대신이 재빨리 엘킨스를 찾아내어 아무 사고 없이 그를 체포했다.그러나 하인스가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인종적 증오가 온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고 린치 폭도들이 형성되었다.듀건은 감옥으로 향하는 폭도들을 따돌리기 위해 달려갔다.그는 권총 한 자루를 쥐고 그들에게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첫 번째 남자를 죽이겠다고 알렸다.100명이나 되는 군중이 흩어졌다.하인즈는 결국 그의 상처에서 회복되었다.엘킨스는 정당방위를 위해 행동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석방되자마자 마을을 떠났다.

듀건은 1879년 2월 의심스러워 보이는 행인들에게 반복적으로 권총을 얼굴에 휘두르며 협박하는 폭음을 한 후 보안관직에서 해임되었다.그는 마을의 떠들썩한 지위에 비춰볼 때 그 당시 아무도 그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재빨리 복직되었다.1879년 3월 10일, 사업가이자 타보르 시장의 친구인 빌과 짐 부시는 부시 형제들의 소유의 부지에 자신의 작은 판자 판잣집 사업을 분명히 세운 또 다른 사업가 모티머 아르버클과 공터에서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물리적인 교류의 열기 속에서 짐 부시는 권총을 뽑아 아르부클을 쏘아 죽였다.Arbuckle은 무장하지 않았고, 마을에서 호감을 샀다.빌 부시 소유의 호텔을 불태우고 짐 부시를 교수형에 처하는 등 또 다른 폭도들이 형성됐다.듀건은 다시 폭도들을 물리쳤고, 짐 부시를 살인죄로 체포했다.다음날 새벽이 되자 다시 말썽이 일고 있는 것이 분명해졌고, 그래서 듀건은 재판 때까지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감시하에 있던 짐 부시를 덴버로 데려갔다.리드빌 사업가인 G. W. 바틀렛은 몇 년 후 듀건에 대해 말하면서 "캠프에는 더 용감한 남자가 없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듀건은 임기가 만료된 1879년 4월 아내와 함께 미시건주 플린트로 이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마샬의 자리를 떠나 리드빌로 향했다.그는 또 다른 아일랜드인인 팻 켈리로 대체되었지만 켈리는 듀건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원시적인 공격성이 부족했고, 몇 달도 안 되어 리드빌 마을은 이전의 난폭한 상태로 되돌아갔다.유타주 브리검 출신의 에드워드 프로즈햄이 이끄는 총기 난사 사건 당시 불량배들이 사업체와 도시 재산을 넘겨받기 시작했다.프로즈햄은 페슬리가 프로즈햄의 아내와 불륜에 연루된 후 와이오밍에서 존 피즐리라는 남자를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징역 10년을 선고받은 그는 겨우 2년 만에 풀려났다.

프로즈햄은 장사로는 보석상이지만 성질이 무시무시하여 총을 잘 다루었다.1879년 8월 8일, 프로즈햄과 친구 리 랜더스는 탈옥수로서 와이오밍 주의 라라미에서 수지 파커의 사창가 안에서 두 남자와 총격전을 벌이며 잭 테일러라는 이름의 소상인을 살해했다.프로즈햄은 총격전에서 두 발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입었으며, 체포되었으나 보석금을 냈다.그 후 프로즈햄은 리드빌로 이사했고, 도착과 같은 달인 1879년 12월 29일, 라라미 주민인 피터 탐스와 테일러 총격으로 말다툼을 벌인 후 그를 총으로 쏴 죽였다.켈리 보안관은 아마도 두려움 때문에 프루즈햄을 살인죄로 체포하는 것을 거절했다.그러나 에드먼드 H. 왓슨 콜로라도주 레이크 카운티 보안관이 개입해 프로즈햄을 체포했다.비질테스는 교도소에 난입해 이틀 뒤 프루즈햄과 무법자 패트릭 스튜어트를 모두 감옥에서 데리고 나와 린치를 가했다.

마을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자 의회는 팻 켈리를 해고하고 다시 한번 마트 듀건을 불렀다.듀건은 1879년 12월 말에 돌아와 켈리의 모든 대신들을 즉각 해고하여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고용했다.그 후, 그는 지역 폭력배 "빅 에드" 번즈, "슬림 짐" 브루스, J. J. 할런, 그리고 총기 난사범인 빌리 톰슨, 형 벤 톰슨과 같은 그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1880년 4월까지 리드빌은 다시 통제되었고 듀건은 다시 연임을 거부했다.그는 에드 왓슨에 의해 대체되었는데, 그는 프로즈햄을 체포하여 마을 안팎에서 존경을 받았다.

후기 경력

1880년 5월, 듀건은 전 시장 타보르의 고용으로 몇몇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임금을 둘러싼 광부들의 파업을 끝내는 것을 도왔고, 한 달도 되지 않아 파업은 끝났다.1880년 11월 22일, 듀건은 광부 루이스 램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와 이전에 대립했던 적이 있었다.램은 가버렸지만 듀건은 여전히 화가 치밀었다.듀건은 푸르디 사창가의 앞까지 걸어간 람에게 계속 말로 고함을 질렀고, 람은 거기서 몸을 돌려 권총을 뽑았다.듀건은 또한 램의 입을 쏘아 즉사시키면서 그림을 그렸다.그는 총격 후 자수했고 나중에 정당방위를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그러나 램의 미망인은 듀건에게 영원한 증오를 맹세하고 듀건이 죽을 때까지 미망인의 잡초를 쓰고, 그의 무덤에서 춤을 추겠다고 맹세했다.

듀건은 이번 촬영에서 석연치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커뮤니티에서 호평을 받았던 램의 촬영으로 많은 인기를 잃었다.듀건은 보석상을 열었지만 1882년 총기 난사 이후 사업이 완전히 실패하였다.그는 콜로라도 주 더글라스 시로 이사해 대리인이 된 뒤 술집을 돌봤다.1887년 한 사기꾼이 댄스홀 소녀 몇 명을 속여서 가짜 보석을 사게 하자 듀건은 그 남자를 쫓아가서 그를 때린 다음 빼앗은 돈을 몽땅 돌려주게 하여, 그가 파산할 때까지 댄스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술값을 지불하도록 했다.듀건은 그 후 사기꾼을 데리고 마을 밖으로 나갔다.

판매원은 곧바로 더건이 인기가 없는 리드빌로 갔다.그는 댄스홀 소녀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나와 법정에 출두한 듀건을 강도 및 폭행 혐의로 고소했다.판사는 더건에게 강도죄로 무죄를 선고했지만 폭행죄로 1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듀건은 누군가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판매원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화를 냈다.듀건의 성질을 본 판매원은 고소를 취하하고 마을을 도망쳤다.

그해 말 듀건은 리들빌로 돌아와 순찰대원의 일자리를 수락했다.하지만, 리드빌은 10년 전에 치안 활동을 했던 번잡한 광산 캠프를 훨씬 뛰어넘어 문명화되었다.그러나 듀건과 그의 기술은 변함이 없었다.1888년 3월 듀건은 보석장사 한 명을 체포했고, 혐의가 취하되고 듀건이 불법 체포로 25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자 경찰에서 물러났다.듀건은 다음 달부터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 분쟁에 휘말렸다.

4월 9일, 이른 아침, 듀건은 텍사스 하우스 안에서 윌리엄 고든과 도박꾼이자 사업주인 베일리 영스턴이라는 두 의 도박꾼과 말다툼을 벌였다.듀건은 총기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두 사람을 모두 밖으로 초대했지만, 그의 명성이 둘 다 거절할 것을 두려워했다.새벽 4시쯤 친구들은 듀건을 진정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그는 텍사스 하우스를 떠났지만, 누군가 뒤에서 접근하여 뒤통수를 쏘고 나서 달아나기 전에 겨우 몇 걸음 걸었을 뿐이었다.듀건은 즉시 내려가지 않고, 그가 쓰러진 브래드포드 약국 옆집으로 비틀거리며 갔다.그의 아내는 부름을 받았고, 그녀는 그의 많은 친구들과 함께 아침까지 함께 앉아 있었다.

그는 몇 시간 후 눈을 뜨고 물 한 잔을 청했다.누가 그를 쐈는지, 그리고 그것이 베일리 영스턴이었는지를 묻자, 그는 "아니. 그리고 내가 말하기 전에 나는 죽을 거야"라고 대답했다.듀건은 1888년 4월 9일 오전 11시에 사망했다.그가 왜 살인범의 이름을 숨기는 것을 선택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그가 겪었던 몇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듀건은 여전히 높은 존경을 받았고 그의 장례식에 많은 참석자들이 리드빌 전체에 의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베일리 영스턴은 사업 파트너인 톰 데니슨과 짐 해링턴, 직원 조지 에반스와 함께 살인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루이 람의 미망인은 듀건이 총에 맞아 쓰러진 곳에서 춤을 추고, 듀건의 아내에게 미망인의 잡초를 선물했다.

비록 그의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지 에반스가 몇 년 전부터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에 의해 듀건을 살해하도록 돈을 지불받았다고 믿었다.이건 절대 증명할 수 없는 일이야에반스는 무죄 판결을 받은 직후 마을을 떠났고, 1902년 니카라과에서 총격전으로 사망했다.

참조

  1. ^ 디아먼트, 로버트 K.죽음의 십수: 옛 서부의 잊혀진 총잡이들, 제3권.오클라호마 대학 출판부(2009년 9월 7일).c. 마트 듀건 978-0806137537

외부 링크

경찰 인사
선행자 콜로라도 리드빌의 시 보안관
1878–1879
성공자
선행자 콜로라도 리드빌의 시 보안관
1879–1880
성공자